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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운센트 상사 영화의 시작 '담손이방앗간'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8. 28. 22:14

     

    앞서도 말했지만 미국인 월터 데이비스 타운센드(Walter Davis Townsend, 1856~1918)는 인천에 진출한 외국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의 회사 '타운센드(Townsendc. Co.)'는 인천에서는 한자 음차인 '타운선(陀雲仙)'이라고 불렸으며 독일의 '세창양행'과 함께 외국계 회사의 쌍두마차를 형성했다. 타운센트의 사옥은 현 중구 신포로 391번지에 있었는데, 인천 경찰서 앞 지금의 크라운 볼링장 일대의 금싸라기 땅이 모두 타운센트의 소유였다. 

     

     

    신포로 크라운 볼링센터 일대
    볼링장 뒷길 / 크라운 볼링센터도 50년 가까이 됐으니 이 자체가 역사다.

     

    미국 태생의 타운센트는 1878년, 23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가 도쿄의 미국무역상사 모오스에 취직했다. 그리고 입사 불과 1년 만에 고베지점 설립 및 운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그의 능력을 높이 산 모오스(James R Morse)의해 1884년 조선으로 파견되어 인천에 모오스&타운센드상사(Morse and Townsend & Co.)를 설립했다. 이후 그는 왕실관련 사치품, 전기용품, 식료품, 그릇, 의류, 침구류, 의약품 등을 수입하며 사업의 확장을 꾀했다. 

     

     

    월터 타운센드(Walter Davis Townsend, 1856~1918)

     

    당시 조선에서 수출품이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상품은 전국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쌀이었다. 이에 주목한 타운센트는 1885년  순신창(順信昌) 상회를 인수하며 미곡 수출에 나섰고, 더 나아가 정미업에도 진출하여 미국으로부터 엥겔식 스팀 정미기를 들여와 본격적인 정미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1892년 용동에 첫 정미소를 세운 것을 필두로 일본 기술에 앞서는 증기 동력의 정미소를 운영하였는데, 이 스팀 시스템의 엥겔식 도정기는 미국에서 발명된 지 3년 만에 인천에 설치된 최신식 설비였다. (아직도 동남아에서 스팀 시스템 설비가 사용되는 것을 보면 이 도정설비가 얼마나 첨단적이었는 지를 알 수 있다)

     

     

    도정공장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용동의 글뚝

     

    같은 해 타운센트는 지금의 신포동 크라운볼링센터 자리에 4대의 정미기를 장착한 정미소를 새로 건립했다. 정미기 1대는 60마력으로 12시간 가동에 석탄 1.5톤을 소비하였고, 그렇게 발생된 증기 동력으로 1대당 하루 64가마의 쌀을 정미해 그 대부분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이후 이에 자극받은 일본인들도 앞다투어 스팀 시스템의 정미업에 뛰어들었던 바, 오쿠다, 가토, 리키다케 정미소 등이 줄을 이었다.

     

    타운센트 정미소에서 도정된 백미(이른바 '수정미')는 당시 현미만을 보아왔던 조선인에게는 신세계였고, 부자들만 먹는 최고급 쌀로 불리며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그 수정미는 일반인은 구경조차도 힘든 쌀로 서민들과는 경계가 있었음에도 타운센드 정미소는 조선사람들에게 ‘담손이 방앗간’이라고 불리며 친근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이는 당시 노동착취를 했던 다른 일본인 정미소와 달리 인간적 경영을 했음을 뜻한다)

     

    알려진 대로 모오스는 같은 미국인인 선교사 알렌의 알선으로 1896년 3월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며 한국 내 이권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타운센트는 이와는 별개로 정미업에 집중하며 큰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모오스의 권리를 사들여 1895년 타운센트상사(Townsend & Co.)라는 독립회사의 CEO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금융업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시도했으며, 스탠다드 오일과의 독점계약으로 미국에서 정유된 석유를 수입하는 등 범위를 넓혀갔다.  

     

    타운센트는 이미 1896년 인천 월미도에 약 50만 톤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유류창고를 완공했다.(현 월미공원 한국전통정원지구) 운센드 양행이 수입한 미국산 석유는 경쟁사인 세창양행이 들여온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산 수마트라 석유 및 일본산 '월후유'(越後油), 기타 러시아산 석유의 품질을 크게 앞질러 완승을 거두었고, 타운센트 상사를 대박나게 했다. 자동차도 없던 시절인데 웬 오일 파워인가 할지 모르겠으나 거의 전 국민이 사용한 석유 호롱불을 생각하면 그 수요가 짐작 가리라 본다. 

     

     

    월미공원 한국전통정원지구의 월미마당 자리에 타운센트 상사의 유류창고가 있었다.
    부근에서 본 인천 연안부두

     

    타운센트의 영화는 1912년 스탠다드 오일과 결별하며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1900년 부평 서면 율도에 건설한 폭약창고를 바탕으로 한 건설용 폭약 거래와 1910년 개설한 홍콩&상하이 뱅크 국내지점을 바탕으로 한 보험업 진출 등으로 사세를 회복하려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18년 3월 10일 62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별세하였다. 그의 사후 타운센트상사는 사위인 제임스 앗킨슨이  경영하다 영국인 멕코넬과 미국인 비들에게 분할 매각되었다.

     

     

    <독립신문>에 실린 타운센트 양행의 석유 광고
    1903년 <황성신문>에 실린 타운센트 양행의 석유 광고 / 자사 상표인 솔표석유(松票油)와 다른 상표의 석유(他票油)를 비교해 우수한 품질을 설명했다. 솔표석유의 등잔은 그을음 없이 환하게 불을 밝히지만 타사 석유는 불빛도 약하고 그을음 천지다.
    미국 뉴욕 스탠다드 본사 건물을 실은 광고
    절기 달력을 넣은 솔표 신문광고
    스탠드다드 석유판매소 승리표 석유상화 간판
    위 간판에 대한 안내문 / 인천시립박물관
    부평 외국인묘지의 타운센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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