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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미추홀구 고인돌의 본래 위치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2. 23:57

     

    인천 내외각을 걷다 보면 '정말로 지붕 없는 박물관이 따로 없구나'하는 생각을 자주 갖게 되니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역사유적 때문이다. 때로는 선사시대의 유적도 눈에 띄는데, 대표적인 것은 역시 고인돌이다.(선사와 역사의 구분은 문자의 사용 유무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강화도와 영종도의 고인돌을 제외하고서라도 인천의 고인돌은 상당했으리라는 짐작이 드니, 내륙에서는 주안동, 문학동, 대곡동, 동양동 등에서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인천 고인돌은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처럼 굄돌이 명확한 북방식(탁자식) 고인돌이 대종을 이루며 크기도 큰 편이다. 일례로 문학동 고인돌은 덮개돌의 길이 3.4m, 너비 2.2m로,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길이 7.1, 너비 5.5m)의 반 정도에 이른다. 참고로 부근리 고인돌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고인돌로서 2000년 11월 호주 케인즈 제24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강화, 고창, 화순의 고인돌이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때 얼굴 마담격으로 등록을 견인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주안동 고인돌과 문학동 고인돌은 지금 제 자리를 이탈해 미추홀구근린공원 내에 위치한다. 이미 오래전에 발견된지라 도시개발에 밀려 이곳저곳을 떠돌다 이곳 미추홀구근린공원 내에 위치하게 된 것인데, 안타깝게도 원형이 보존되지 못했다. 하지만 개발 논리에 밀려 유야무야 사라졌을 수많은 고인돌들을 생각하자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가히 고인돌 왕국이었던 대구시의 고인돌은 지금 거의 남은 게 없다.*

     

    * 대구는 전국에서 호수와 고인돌이 가장 많던 고장이었다. 일제강점기 '대구읍성 바깥쪽에 즐비하니 장관을 이루었다'는 대구시 고인돌은 1945년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3천여 기의 고인돌 온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급격한 도시개발 붐에 그 많던 호수와 고인돌이 멸실됨으로써 대구는 훌륭한 역사문화유산과 관광자원을 스스로 저버린 셈이 되었다.

     

    1936년에 찍은 대구 4구역 대봉동 고인돌 III / 이 고인돌은 경북대학교로 이전돼 살아 남았다.
    인천시 미추홀구 학익동 미추홀 근린공원 내에 있는 문학동 고인돌(왼쪽)과 주안동 고인돌

     

    하긴 인천 고인돌도 최근에 발견된 대곡동, 동양동 고인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 자리를 벗어났거나 혹은 사라졌거나 했으니 특별히 내세울만하지는 못하다. 본래 미추홀구에는 알려진 것만 12기가 있었으나 (학익동 8기, 주안동 3기, 문학동 1기) 현재 4기만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그중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인돌은 단 한 기도 없다. 예를 들자면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마당에 있는 강화 부근리 고인돌의 닮은꼴인 학익동 고인돌 I은 원래 소년형무소(현 인천구치소) 서쪽 구릉에 있던 것이다. 

     

    인천 소년형무소 담장 부근에 있었던 학익동 고인돌 I
    인천 인천시립박물관 뒷마당으로 옮겨진 학익동 고인돌 I
    학익동 고인돌 I / 주차장 쪽 후미진 곳에 있어 마음 먹고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학익동 고인돌 I은 192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와 사와 준이치(澤俊一) 등이 최초로 조사했다. 이어 1929년에는 경성대학에서 학익동 고인돌 8기를 더 확인하고 돌칼, 돌도끼, 갈판돌 등을 수습했는데,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의 고인돌 무리는 1938년, 일대에 인천소년형무소(현재 인천구치소, 인천지방법원과 검찰청)가 들어서며 사라지고 오직 서쪽 구릉에 1기만이 남았는데, 그것이 위에서 말한 인천시립박물관 뒷마당의 학익동 고인돌 I이다. 

     

     

    인천시 학익동 대안파크타운 바로 맞은편 법원 담장 안이 학익동 고인돌 I이 있던 곳이다.
    위치 추정이 가능하도록 왼쪽으로 연이어지는 담장을 찍었다.

     

    인천시립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학익고인돌 II는 비교적 최근인 1998년 인천지방법원 신축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4개의 굄돌과 길이 2m, 너비 1.75m의 덮개돌로 구성돼 있다. 학익고인돌 II는 발견 시기가 늦어서인지 수습된 유물은 전혀 없었고,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지며 덮개돌의 위아래가 바뀌었다가 이후 바로잡히는 해프닝이 있었다. 학익동 고인돌 II가 있던 곳은 말한 대로 법원 단지가 조성돼 있어 본래의 위치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학익고인돌 II
    학익고인돌 II의 덮개돌과 굄돌
    지금은 사라진 학익고인돌 III / 1927년 사진이다.
     

    미추홀근린공원 내 주안동 고인돌과 문학동 고인돌은 학익동 고인돌과 달리 본래 모습을 잃었다. 주안동 고인돌은 주안동 용일사거리 근처 중앙메디칼의원 뒤쪽 언덕에 있었는데, 근방에 택지가 조성이 되며 1979년 수봉공원으로 이전됐다. 그러다 2005년 수봉공원에 인공폭포 등을 만드는 공원 재정비 과정에서 미추홀근린공원 내로 옮겨왔는데, 이때 굄돌과 덮개돌이 분리된 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놓여 있다. 원래 어떻게 붙어 있었던 것인지 몰라 그대로 놓았다고 한다. 옮기면서 사진조차 찍지 않았던 모양이다.

     

    *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주안동 용일사거리 사미마을에 있던 고인돌은 2기였는데, 그중 1기는 1970년 초 소실되었다고 한다. 미추홀근린공원 내에 있는 2개의 정체 모를 작은 돌이 70년대 소실되었다는 고인돌의 굄돌이 아니었을지....?

     

     

    주안동 고인돌의 덮개돌 / 바로 뒤에 정체 모를 돌 하나가 있다.
    덮개돌의 측면

     

    ‘주안동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성혈(性穴) 수십 개가 있다. 앞서 '인류 최초의 천문기록, 우리나라 고인돌'에서 말했듯, 그 밖에도 별자리가 새겨진 고인돌은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 고인돌, 전남 화순 절산리 고인돌, 경남 고성 송학동 고인돌, 경남 함안 동촌리 고인돌, 경북 영일 칠포리 고인돌, 대구시 동내동 고인돌 등을 비롯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한에서는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200여 기의 별자리 고인돌을 세계 최초의 것이라 보는데, (기원전 2500년 이전) 그중 평남 증산군 용덕리 외새산 10호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는 무려 기원전 2900년의 것이라고 한다. 주안동 고인돌의 별자리도 살펴볼 일이다.    

     

     

    평남 증산읍 별자리 고인돌

     

    주안동 고인돌의 굄돌의 수는 두 개로, 서쪽의 고임돌이 약간 내부로 기울어졌다. 현재 공원 내에는 받침돌이 3개가 있는데, 앞의 작은 돌은 굄돌이 아니라 무덤 방의 남쪽 입구를 막은 돌이다. 이런 형식은 북방식 고인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로서, 대표적인 사례로는 중국 랴오닝성 하이청(海城)시의 고조선 지석묘를 들 수 있다. 황해남도 배천군 용동리의 고조선 지석묘도 마찬가지 형식이다. 

     

     

    중국 해성시 요동반도의 고인돌 / 여기서도 성혈이 발견됐다.
    해성시 고인돌 내부 성혈 / 인천일보 사진
    황해도 용동리 고인돌 / 덮개돌 길이와 너비 7.1x5m, 전체 높이 3.1m
    주안동 고인돌의 막음돌(사진 앞)과 굄돌

     

    문학동 고인돌은 굄돌이 없이 길이 3.4m, 너비 2.2m, 두께는 35~60㎝의 마름모형 덮개돌만 있는 형태이다.  덮개돌 윗면에는 채석을 위한 흔적이 일렬로 남아 있어 언뜻 다른 고인돌을 만들다 남은 판석처럼도 여겨진다. 게다가 굄돌도 없는 상태라 그런 생각을 더 들게 만든다. 하지만 이 같은 형태의 고인돌도 적지 않다. 일례로 경기도 남양주시 가운동 고인돌의 모양새는 아래와 같다. 아울러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에도 관청리 고인돌(지금의 문학동 고인돌)은 현재 모습 그대로 훼손된 흔적 없이 놓여있다. 

     

     

    옛 문학동 고인돌 사진
    미추홀근린공원 문학동 고인돌
    문학동 고인돌 측면
    남양주시 가운동 고인돌
    길이 3.3m, 너비 1.6m, 두께 60㎝로 문학동 고인돌과 비슷한 규모다.

     

    문학동 고인돌은 위의 다른 고인돌과 달리 발견된 장소가 온전히 남았다. 문학동 고인돌은 원래 문학산 서북쪽 도천(禱天) 고개 남쪽 밭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하늘에 기원하는 도천제가 올려졌다는 구전이 전한다. 최초 발굴은 1957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이던 우문국과 이화여자대학교의 이경성의 약식 발굴로서, 이때도 굄돌이 없었다 하며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현재의 법정동은 인천직할시 학익동이며, 도로명 주소는 미추홀구 매소홀로 448번길이다. 주변으로는 도천 어린이공원, 무지개교회, SK황금주유소가 있는데, 도천 어린이공원 맞은편 길 무지개교회 부근이 예전에는 도천 고갯마루였다. 문학동 고인돌은 교회 바로 아래 주택 입구가 본래 위치인데,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 누군가 울타리를 쳐놓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잡초 밑에 2집의 수도계량기가 묻혀 있었다)

     

     

    학익동 무지개교회
    문학동 고인돌이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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