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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류가 정도(定都)했다는 문학산성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3. 22:20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는 추모왕(고주몽)의 친자가 아니라 소서노와 우태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하지만 의붓아들도 자식이니 둘 중 하나는 고구려의 2대왕이 될 뻔했으나 주몽이 과거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리가 등장하였고, 주몽이 그를 태자로 세우면서 희망은 물거품이 된다. 이에 소서노와 비류와 온조는 유리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 자신들을 따르는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이주한다.

     

    이것이 기원전 18년의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한강변에 이르렀을 무렵 이주민은 두 패로 나눠지니, 비류는 한 패를 끌고 바닷가 마을인 미추홀로 갔고, 온조는 한강 남쪽인 하남 위례성에 정도(定都)했다. 온조는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나라를 세운 후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하지만 미추홀로 간 비류는 정착에 실패하였던 바, 그곳의 땅은 습기가 많고 물이 매우 짜서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비류는 별수없이 하남 위례성으로 돌아갔는데, 가서 보니 동생 온조가 도읍을 정하고 백성과 편히 잘 살고 있었다. 비류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부끄럽게 여겨 자살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비류의 신하와 백성은 위례성으로 들어가 온조에 귀부하니, 온조는 남하했던 백성들이 다시 합쳐짐을 기뻐하여 나라 이름을 고쳐 백제(百濟)라고 하였다.

     

     

    인천시립박물관의 '매소홀'과 '매소홀수'명 기와편 / <삼국사기> 속 미추홀은 이후 매소홀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남하의 영향으로 보인다.

     

    인천 미추홀구와 연수구 사이에 있는 해발 217m의 문학산은 비류가 정착했던 미추홀 왕국으로 여겨진다. 뚜렷한 근거는 있는 것은 아니고 고문헌에 그렇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문헌이라는 게 사실은 그리 오래된 문헌이 아니니,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과 1757∼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비류백제의 흔적이 나타난다.  

     

    안정복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남산고성(南山古城)을 "이 성이 비류의 옛 성이며, 성안에 비류정(沸流井)이란 우물이 있다"고 단정했다. <여지도서>와 <인천읍지>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 기록들은 비류백제 건국 후 1700년이나 흐른 뒤의 기록이니 그저 구전을 채록한 것에 불과한 것일 터인데, 고고학적으로도 문학산성의 비류백제 존재 가능성에 대하여 밝혀진 바가 없다.

     

    그리고 설령 비류가 문학산성 자리에 도읍을 했다 해도 그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하니 문학산에는 1960년대 초부터 미군부대의 미사일 기지가 만들어지며 변형이 가해졌고, 특히 정상부는 아주 평평하게 밀려버렸다. 이 미사일 기지에는 평양을 타깃으로 하는 200km 사거리의 MIM-14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이 배치되었는데, 소형 전술핵의 탑재가 가능한 지대지 미사일이었다.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은 1974년부터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대체되었고, 이후로는 한국 공군이 기지를 관리하였다.

     

     

    MIM-14 나이키 허큘리스 마사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군기지의 MIM-14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 / 1979년 플로리다주와 알래스카주 의 포대를 끝으로 모두 퇴역하고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대체되었다.
    미사일 기지가 있던 문학산 정상

     

    까닭에 전에는 문학산 정상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으나 2015년 미사일 기지가 영종도로 이전하며 2015년 10월 15일부터 낮 시간에 한해 일반인의 정상부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2020년부터는 문학산성에 대한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던 바, 전체 길이 577m 가운데의 339m의 성벽이 보수·수축되었다. 현재의 성벽 높이는 약 1.5m∼4m 정도이다. 성벽은 장방형의 돌로 수평 들여쌓기를 했는데 1949년에 확인된 바 있는 동문과 서문은 복원되지 않았다.

     

    문학산성은 인천시 기념물 1호로 인천 지역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유적임에 분명하나 국방개념 앞에서 아쉽게도 옛 자취가 사라졌다. 이경상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이 1949년 문학산 유적 조사에서 발견한 봉수대, 동문 서북쪽 150m 지점에 있었다는 우물, 안관당(安官堂) 등도 복원되지 않았다.

     

    안관당(安官堂)은 이곳 문학산성에 왜적을 물리쳤던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을 모시는 사당으로, 이경상 관장이 봉수대 동쪽 산록에서 길이 7m, 동서 3m의 건물터와 석단을 발견하고 이를 안관당으로 추정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내부에 의복을 입은 목조 남녀상이 목마와 함께 모셔져 있었다는 구전만 전한다.  

     

     

    이경상 관장이 1949년 조사 때 찍은 동문 사진

     

    하지만 이상의 문학산성 내의 옛 자취는 비류백제와는 관계가 없다. 만일 이곳에 미추홀 왕국의 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백제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같은 토성이었을 것이다. 까닭에 그 자취를 찾기가 더더욱 쉽지 않다. 비류백제가 인천에 있었다는 기록 상의 근거는 딱하게도 '물이 짜서 정착에 실패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문학산성 정상부에 있었다는 비류정은 오히려 문학산성을 미추홀 왕국의 후보지로부터 밀어내는 기분이다. 설마 그 산정 우물에서도 짠물이 나왔을라구? 

     

     

    문학산 산정 오르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옛 부대의 흔적
    문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계양산 방면
    계양산 방면 야경 / 퍼 온 사진
    오이도 방면 풍경
    송도 신도시 방면
    문학경기장, 소래산 방면
    월미산 방면
    인천대교 방면
    인천국제공항, 영종도 방면
    연수구 비류대로
    비류대로의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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