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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에 수돗물을 공급했던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12. 00:12

     

    앞서 기원전 18년 멀리 부여에서 내려와 미추홀(고 인천)에 정도(定都)하려고 했던 비류 왕자의 이야기를 실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는 인천 정착에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땅에 습기가 많고 물이 매우 짜서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인천 미추홀구와 연수구 사이에 있는 해발 217m의 문학산은 비류가 정착을 시도했던 곳이라 전해지나 고고학적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또 개연성도 희박하다.

     

    그 개연성을 찾자면 오히려 동구 송현동 소재 해발 56.8m의 송림산이 유력하다. 이 낮은 산은 구한말 수돗물 공급시설인 배수지가 설치되어 흔히 수도국산이라 불리기도 하고 만수산(萬壽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체 181,500㎡ 규모로 적지 않다. 그래서 고대도시의 수도로써 어울릴 듯하지만, 이 일대는 우물을 파도 짠물이 나오는 까닭에 사실 정착지로서는 적당치 않다. 

     

     

    송림산 오르는 예쁜 길
    송림산의 잘 가꾸어진 하늘생태정원

     

    일대는 개울물을 길어오려고 해도 여의치 않았다. 최대 10m에 이르는 인천 바닷물의 간조(썰물)와 만조(밀물) 때의 수위차는 바닷물을 개울 깊숙이 역류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맑은 식수를 얻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 문제는 1882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거류민들이 몰려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개항 전 제물포 일대의 작은 마을이 전부이던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내외국인 숫자가 급증했다. 개항장 초기에 집계된 인구는 16,463명(내국인 9,900명, 일본인 4,200명, 청국인 2,300명, 서양인 63명)으로 이들은 모두 식수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중 일본인들은 1906년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자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인천의 수돗물 공급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 결과로 1906년 11월 노량진 수원지와 인천까지의 수도관 매립 공사가 시작됐다. 즉 서울에 공급 예정이던 노량진 배수지의 한강물을 인천에도 공급하기로 한 것이었다. 서울의 수돗물 공급 시설공사는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 재정경제부) 산하의 수도국이 1905년 8월 영국인이 설립한 조선수도회사(Korea Waterworks Company)에 의뢰해 건설한 한강 뚝섬에 수원지 조성 공사가 그 시초인데, 통감부는 이때 뚝섬 수원지와 함께 설치된 노량진 수원지의 배관을 인천까지 연결하도록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한제국은 1906년 노량진에서 인천까지의 상수도관 매립 공사를 시작했지만, 워낙에 돈이 없었던 까닭에 공사가 금방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흥업(日本興業)이라는 회사에게 대한제국정부의 관세 수입을 담보로 1천만 원을 탁지부에 대출하게 했다. 그리하여 1908년 정수를 마친 한강물이 직경 20인치(50.8cm)의 주철관 32.62㎞를 타고 인천 송림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주관은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했지만 그저 돈만 대었을 뿐 모든 것은 일본인 기술진에 의해 진행된 공사였다.  

     

     

    1907년경 뚝섬 상수도 송수관 매립공사 모습
    1908년경 뚝섬 배수지 모습
    무거워 보이는 물장수의 어깨가 당시의 물사정을 말해준다.

     

    표고 56.8m의 송림산 꼭대기에는 부지면적 3만6780㎡의 땅에 면적 5000㎥, 깊이 4.38m의 저수조 3개가 건설되고, 수돗물을 공급·차단하고 유압을 조정하는 제수변실이 세워졌다. 제수변실은 철근을 쓰지 않은 콘크리트로 원통형 몸체를 만들고 일본식과 서양식이 섞인 의양풍 문과 창문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돔식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입구에는 그리스풍 페디먼트(삼각박공)를 얹었는데, 제수변실 상단 '양백윤만'(萬, 백성에게 시원함을 주고 만물을 윤택하게 함)의 현판은 친일파 유맹(劉猛)이 썼다.  

     

     

    1908년 완공 후의 모습 / 문과 계단, 오른쪽 원통형의 제수변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송현배수지 입구의 콘크리트 문설주 / 쇠창살도 1908년 준공 당시의 것이다.
    제수변실 오르는 계단
    배수지의 핵심 제수변실
    '양백윤만' 현판

     

    이상의 시설은 1910년에야 마무리됐다. 수돗물 개통식은 1910년 10월 30일에 있었으며 그해 12월 1일을 기해 역사적인 급수가 시작됐다. 원래 서울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노량진 수원지였지만 서울보다 인천 쪽의 배관 공사가 빨랐던 까닭에 인천 사람들은 서울시민보다 먼저 노량진 정수장의 물을 맛보게 되었다. 

     

    수도꼭지를 틀면 정수가 된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니 그야말로 신천지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혜택은 일본인에게만 돌아갔다. 수도 설치 비용이 워낙 비쌌고, 매월 12톤 공급의 상수도 기본요금이 또한 2원(당시 쌀 1말 가격)으로 비싸 조선인은 수도꼭지를 달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들여다보자면 과정은 내내 비극적이었으니 송현배수지의 준공을 불과 서너 달 앞두고 경술국치(1910년 9 월 28일)가 있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이 거금을 투자해 이룩한 수도관 공사에 대한 통수식은 조선총독부의 영광으로 돌아갔고, 송현동 배수지의 수돗물 또한 중구 일대의 일본인 거주구역 주민에게만 집중적으로 공급되었다. 물론 수도꼭지를 단 조선인은 혜택을 보았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대다수의 조선인은 중구 일대의 일본인 물 장사에게 물값을 내고 상수도 물을 사 먹거나, 기존처럼 웃터골(옛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이나 북성골(현 차이나타운 입구)·배다리·용동우물 등에 의존해야 했다. 송현배수지의 건설은 인천의 열악한 물사정을 해결한 역사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정작 조선인은 별 혜택을 받지 못한 아픈 역사를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송현배수지는 지금도 동구와 중구 일부 지역에 생활용수를 공급 중인데, 다만 제수변실은 1994년 이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2003년 11월 인천시 등록문화재 23호로 지정되었다.

     

     

    제수변실 문과 창문과 지붕의 형태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안내문
    인천상수도 급수 개통지 표석
    그래도 송현동 배수지가 확장된 인천의 수돗물 공급원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물맛 좋고 수량 많기로 유명했다는 용동 큰우물이 다시 보여진다. / 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나 그 터가 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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