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9.15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동상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11. 00:17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29일 서울이 무력하게 함락되었다. 남침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탓이니, "전쟁이나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먹겠다"던 국방장관 신성모는 일찌감치 도망가 대전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마 저녁은 대구나 부산에서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참으로 문제적 인간이었으니, 북한의 김일성이 완벽한 남침 준비를 갖추는 동안 전쟁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이 위와 같은 큰소리만을 쳐냈는데, 3.8선이 뚫렸을 때는 더 가관이었다. 영국에서 공부했던 그는 일요일에는 전화를 안 받는 고급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알다시피 남침은 일요일 새벽부터 시작되었음에도 국방부 장관은 아침부터 내내 연락 두절이었으니 그 부하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탔을까?

     

    뒤늦게 나타난 신성모는 한강다리 폭파를 명령했고, 150만 서울시민은 피난도 못 가고 적의 치하에 들어갔다. 아울러 한강 이북에 주둔하던 국군 7개 사단 역시 고립되었으니, 다리 폭파 직후인 7월 초,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쟁 발발 당시 9만 8천 명이었던 국군이 5만 4천 명으로 줄었다. 개전 1주일 동안 4만 4천 명의 군인이 희생된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 / 신성모는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38선을 돌파해 북진중이다"라는 등의 허위방송으로 국민들을 기만했고, 북한군이 서울 창동까지 들어온 상황에서도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해주까지 진격했다는 등의 거짓 발표를 해댔다.

     

    중요할 때 우리의 지휘부들은 늘 이랬으니, 5.16이 발발해 쿠데타 군이 한강다리를 넘어올 때까지 국방장관 현석호는 전혀 알지 못했고, 12.12사태 때 전두환의 쿠데타 세력이 육본과 국방부에 쳐들어가  총질을 해댈 때, 국방장관 노재현은 무서워 3일을 도망쳐 다니다 쿠데타 세력에 피체되었다. 

     

    범위를 넓히자면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도 비슷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倭)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죽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경찰청장 윤희근은 서울에 없었다. 그는 당일 제천 월악산에 등산을 갔다가 캠핑장에서 지인들과 술 한잔 후 취침했고 새벽 12시 너머까지 전화와 문자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재난 지휘의 총책임자가 술에 취해 자는 동안 젊은 156명의 고귀한 생명이 압사로 목숨을 잃었다. 급한 상황에서의 연락 두절처럼 사람을 애타게 만드는 것은 없다. 아무튼 우리 민족은 늘 이렇듯 위기 상황에서 운이 없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면, 인민군이 남침을 개시한 불과 사흘 만에 한강 이북의 서울이 적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다만 천만 다행히도 국군 6사단을 비롯한 국군 잔여 세력이 한강 도하에 성공해 한강방어선을 구축했다. 지휘관이었던 광복군 출신의 김홍일 소장은 놀랍게도 인민군의 도하를 6일이나 저지시켰고(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2일까지) 덕분에 일본에 있던 미군의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날아와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갈 수 있었다.

     

     

    당시 폭파됐던 한강철교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 표지
    북한군이 수리 후 도강을 시도했던 한강철교
    한강방어선 흑석동 전투지 표지
    6월 29일 수원비행장 도착한 맥아더 원수가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뉴욕헤럴드트리뷴의 기자로서 6.25전쟁 개전 이틀 뒤인 27일 미 군용기편으로 서울에 들어온 하긴스는 한국에 도착한 맥아더를 밀착취재해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겠다"는 특종을 낚았다. 전쟁 초기 대부분의 사진은 그녀가 찍은 것이다.

     

    맥아더는 이때 이미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을 전망하였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화급함을 알려 신속히 참전결정을 이끌어냈고, UN도 안보리 상임이사국 소련의 불참 속에 한국전 참전이 결정되어 1950년 7월 1일 총 16개국 34만 1000명에 이르는 병력이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다. 맥아더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들 UN군의 상륙지점을 인천으로 결정하였다. 

     

    9월 15일 새벽 2시,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 확보였다. 미 해군이 함포사격을 가하는 동안 UN군 사령관 맥아더는 맥킨리호 함정 갑판 위에서 포격 상황과 한미 해병연대의 월미도 상륙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미군 함정 맥킨리호에서 인천 해안의 공격 상황을 지켜보는 맥아더 장군과 참모들
    그린비치 상륙을 시도하는 미해병대 / 포격을 받은 월미도가 포연에 휩싸여 있다.

    로페즈 중위가 레드비치 방파제를 돌파하는 모습
    여유스럽게 파안대소를 터뜨리는 맥아더 장군과 참모들
    UN군의 상륙지점
    월미도 그린비치 상륙지점 표석
    월미도 레드비치 상륙지점 표석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원만히 진행되었다. 맥아더는 작전 제1단계로 월미도 상륙을 시도였는데, 월미도 그린비치는 조선인민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던 400명의 인민군은 상륙작전 이틀 전부터 퍼부은 함포 사격과 네이팜 탄 폭격에 이미 혼이 나갔던 바, 9월 15일 유엔군이 상륙했을 때는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대의 앞에 무너진 소의일까? 이때 유엔군의 무차별 폭격에 주민 600명이 사상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큰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니, 레드비치(인천시 만석동 일대) 상륙에 앞장섰던 미해병대의 발도메로로페즈 중위가 떨어진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폭사한 것이 피해의 전부일 정도로 상륙작전은 무난히 완수됐다.  

     

     

    인천상륙작전의 한 구석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일거에 역전됐다. 서울은 곧 탈환됐고 낙동강까지 이르렀던 인민군은 혹사라도 퇴로가 끊길까, 꽁지가 빠지게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을 쫓아 북진한 국군과 UN군은 10월 19일 평양마저 점령했다. 하지만 바로 그날 중공군이 참전을 결정했다. 개마고원 북쪽의 강계까지 도망간 김일성은 괜히 전쟁을 일으켰다는 막급한 후회 속에 소련과 중국에 마구 구조 요청을 때려댔고, 그 요청에 모택동이 화답한 것이었다. 스탈린의 압박도 있었지만, 어쩌면 참전한 미군이 중국 본토까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내린 결정이었다. 

     

     

    평양시민의 국군과 UN군 환영사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이 현실화되었고, 이에 그는 더 이상의 중공군 참전을 막기 위한  만주 폭격을 계획했지만 제3차대전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트루먼에 의해 좌절되었다. 결국 UN군은 다시 서울을 내어주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2개월 후 맥아더가 다시 전열을 회복해 북진하자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UN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제한전을 수행하라는 상부 명령을 거역한 죄였다.

     

    한국전쟁은 결국 1953년 7월 27일, 옛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선에서 종식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UN군 사령관 맥아더를 기려 1957년, 인천 상륙작전 개시일인 9월 15일에 맞춰 인천 만국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을 세운 뒤에 만국공원은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를 지켜준 이가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라는 뜻이었을 터였다. 아무튼 그의 동상은 그 자리에 50년 가까이 서 있었다. 

     

    그런데 2005년 9월 11일, 인천상륙작전 55주년을 나흘 앞둔 어느 날,  자유공원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전국 민중연대, 통일연대, 한총련)가 몰려와 폭력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했다. 이날의 시위는 제법 규모가 커서 시위대와 경찰 모두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로도 간헐적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2018년 7월에는 어떤 기독교 교회 목사가 동상 위로 올라가 불을 지르는 일도 일어났다.

     

    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주장인즉, "맥아더는 민족통일을 방해하고 분단을 고착화시킨 원흉이므로 철거가 마땅하다"는 것으로서, 이에 대한 공영방송의 TV토론에서 "우리끼리 잘 살려는 통일 과업을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절단낸 악질 훼방꾼"이라고 맥아더 장군을 성토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적화통일 열망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도 김정일 일인독재와 북한동포의 빈곤이 좋게 보이지 않았는지 요즘은 철거 시위가 사라졌다. 

     

     

    맥아더 동상 철거를 열망하는 사람들
    수난 당하는 맥아더 장군 동상

     

    다만 맥아더 장군 동상 뒤편에 새겨진 인천상륙작전 부조는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다. 바로 위 부조 작품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모습을 담은 것이 아니라 1944년 필리핀 레이테섬 상륙작전 장면을 새긴 것으로, 이 지적이 나온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인천시에서도 다른 작품으로 대체하겠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확인차 가보았으나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저 동상 앞 광장의 노을만이 핏빛으로 처연했다.

     

     

    장군의 동상
    동상 뒤의 부조

     

    ▼ <브리타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필리핀 레이테만에 상륙하는 맥아더의 사진은 다음과 같다.

     

    Douglas MacArthur at the Battle of Leyte Gulf

     

    ▼ 아래 것이 진짜 인천상륙작전 사진으로,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에 실린 사진과 설명은 다음과 같다.

     

    Senior U.S. commanders inspect the Inchon port area, 16 September 1950. This appears to be in the Red Beach area, with the northern end of Wolmi-Do island in the background. Those present in the front row are (from left to right): Vice Admiral Arthur D. Struble, USN, Commander, Joint Task Force Seven;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Commander in Chief, Far East Command and Major General Oliver P. Smith, USMC, Commanding General, First Marine Division. Official U.S. Navy Photograph, now in the collections of the National Archives. (80-G-421944)
    General Douglas MacArthur, center, accompanied by Vice Adm. Arthur Struble, left, and Marine Maj. Gen. Oliver P. Smith, right, and other staff members go ashore in the Inchon area for an inspection of the front lines, September 17, 1950 in South Korea. / AP 통신
    동상 옆의 또 다른 부조
    자유공원에서 본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
    자유공원 동상 앞 광장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군 전함 미주리호 위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는 맥아더 원수 / 그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순간이다. 하지만 그는 1953년 트루만에 의해 해임된 후 고독한 말년을 보내다 1964년 워싱턴 D. C.에서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수봉산 6.25 참전 인천지구 전적비
    수봉산 UN 참전 기념탑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