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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똥값에 팔아넘긴 노다지 운산금광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13. 00:25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는 1889년 주미 대리공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이하영이 기차 모형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철도에 대해 설명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왔다. 이에 고종이 철도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이때부터 철도 도입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의 학설은 2019년 2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2등 서기관이었던 월남(月南) 이상재의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私往復隨錄)>이라는 문서가 발견되며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이상재는 이 문서에 1888년 탈능돈(달링턴)이라는 미국인 사업가가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내기 위해 조선정부에 제시한 내용을 보고서 형식으로 자세히 수록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달링턴이 제시한 계약서 초안인 '철도약장(鐵道約章)'이 함께 수록돼 있는데, 결과적으로 달링턴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요구한' 15년 면세' 조항에 대해 고종이 '과하다'는 이유로써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인천개항박물관의 잘못된 안내문
    하지만 경인철도에서 처음 운행한 미국 브루크스사가 제작한 모갈 기관차 모형은 세밀하고 정확히 제작되었다.

     
    이것을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미국무역회사스상사(Morse Co.)의 제임스 모스가 획득하려 하였다. 모스는 미국 공사관 참찬관 시절부터 알고지낸 외무협판 이완용과 철도창조조약을 체결하고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내려 노력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하지만 1986년 마침내 그 일을 성사시키는데, 그 배후에는 왕과 왕비의 절대적 신임 속에 외교 고문으로도 활약하던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있었다.
     
    사실 경인철도부설권은 일본이 내내 침을 흘리던 이권이었다. 그래서 거의 성사 직전까지 같으나 1896년 아관파천 50일 만인 3월 29일 전격적으로 모스에게 넘어갔다. 오직 알렌의 힘이었다. 알다시피 알렌은 1884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앞서 조선 땅에 왔던 의료 선교사로, 그해 12월 4일 벌어진 갑신정변의 현장에서 칼에 맞아 빈사상태가 된 왕비의 조카 민영익을 외과수술로 살려낸 바 있었다. 이후 알렌은 그 실력을 인정받아 왕실의 주치의가 되었고, 개인 병원인 광혜원을 열었으며, 외교 고문자격으로 한국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1890년에는 미국정부로부터 공석이 된 미국공사 대리로도 임명되었다. 
     
    모스는 1897년 3월 22일 오전 9시 경인가도상의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도원역 부근)에서 기공식과 함께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약 1년 뒤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1898년 5월 10일 공사의 권리가 170만 2452원 75전(당시 1백만 달러)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양도된다. 일본은 경인철도부설권을 재취득하기 위하여 조선이 정치적으로 위기라는 거짓 소문을 꾸준히 미국 재계에 흘렸고, 본국으로부터 자금 조달에 실패한 모스는 결국 경인철도부설권을 이양하고 말았다.
     
     

    제임스 모오스(James R. Morse)
    1897년 3월 우각현(지금의 도원역 부근) 기공식 / 정부 고위 관리들 및 모스, 알렌, 타운센드, 콜브란 등의 얼굴이 보인다.
    도원역의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표석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안내문
    그 옆을 지나는 경인선 선로
    당시의 경인선 운행 열차

     
    알렌은 이에 앞서 1895년 5월 조선의 최대 이권인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따내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금이 많이 난다는 것은 상업을 위해 이 땅에 온 외국인에게는 상식과 같은 일이었는데, 조선 관료로부터 평안도 운산금광이 조선의 최대 금맥이라는 정보를 알게 된 알렌은 그곳의 채굴권을 따내는 로비를 벌였고 마침내 성공했다. 그는 곧바로 요코하마의 모스에게 편지를 띄웠다. 
     
    "농상공부에서 관할하던 운산금광을 (왕이 관할하는) 궁내부로 옮기는 데 성공했소.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민영익의 고모인) 왕비가 도와줘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소"라는 기쁨 넘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계약 사항이 마음에 들면 '예스'라고 전보를 쳐달라"고 했다. (알렌의 일기가 정리된 '알렌문서 MF361') 조선에서 금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은 모스도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던 바, 편지를 받은 모스는 곧바로 '예스'를 통고했다.
     
    이어 아예 한국으로 건너와 인천에 둥지를 틀었다. 미국의 전문가를 불러 조사를 해본 결과 매장량이 상당할 것이라는 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모스는 알렌에게 거대한 이권에 대한 합당한 커미션을 지불한 후(두 차례에 걸쳐) 인천 송학동에 운산금광을 운영할 '아메리카무역 동양합동 광업회사'를 열었다. 그리고 재정 책임자로서 미국인 데이비드 데쉴러를 불러들였다. (모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운산금광이 아시아 최대 매장량을 가진 금광이요, 미국 캘리포니아 금광과 맞먹는 세계 굴지의 금광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 즈음하여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펫은 미 선교본부에 "이제 알렌은 딴 길로 갔으니 한국선교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완벽히 말소시켜야 한다"고 청원했다. 알렌을 선교를 위해 온 사람으로 인정하지 말자는 주장이었는데, 실제로 동료 선교사들은 알렌을 그렇게 대했다. (☞ '대한제국 최대 이권을 주물렀던 선교사 알렌과 우각현 별장')
     
    * 알렌은 선교사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동양합동광업회사에 편지를 보내 '조선인 노동자를 적법한 채찍형(judicious whipping)으로 처벌하는 것이 좋다. 조선인은 그것이 있어야 말을 듣지, 없으면 모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송학동 아메리카무역 동양합동광업회사 건물 (●)
    아메리카무역 동양합동광업회사가 있던 인성초등학교 / 데쉴러는 이곳에서 다시 동서개발회사(The East-West Development Company)를 차린 후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추진해 성사시킨다.
    인성초등학교 축대 / 데쉴러의 동서개발회사는 그의 이름을 따 대시라(大是羅)양행이라고도 불렸다.
    데이비드 데쉴러(David W. Deshler, ?~1927)

     
    모스는 이곳에서 1896년부터 1899년까지 약 4년동안 77명의 서양인 직원과 2,000 여 명의 광부들을 고용해 운산금광의 금을 캐갔다. 당시 금맥이 발견되어 첫 금을 채취했을 때  서양인 직원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노터치'(no-touch)로서, 이후 한국사람들이 금은보석을 노다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말은 유명하다.
     
    여러 가지 사업으로 바빴던 모스는 약 4년 후 경영권을 다른 미국인에게 넘겼지만 이후로도 금은 계속해서 생산되었으니 1915년까지 18년 동안 4,950만원(현재 시세로 약 4조원)의 생산액을 기록했는데, 대한제국이 1907년까지 일본에게 진 빚 1,300만원의 4배가 넘는 돈이었다. 그런데 당시 고종이 알렌에게 넘긴 운산광산 채굴권 금액은 고작 20만원이었다.
     
    미국이 1896년 일본에게 운산금광을 넘기고 완전 철수한 1938년까지 채굴한 금광석은 900만 톤으로, 그들이 벌어 간 돈은 1,500만 달러가 넘었다. (여러 집계가 조금씩 다른데 그중 최소 금액을 적었다) 고종은 그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자신의 재산으로 삼은 후(궁내부 산하에 두고) 단돈 20만원에 팔았고, 1900년 1월 1일에는 일시불 1만2천불을 받는 조건으로 기존 25년이던 채굴기간을 40년으로 연장시켜 주었다. 
     
    운산의 성공을 본 일본은 평안도뿐 아니라 전국을 헤집어 금광을 개발했다. 그리하여 화강암이 많은 조선 땅은 어디를 파도 금이 나온다는 소리를 하였는데, 실제로도 그러하여 1920년대 말 평안북도 구성에서 금맥을 발견한 최창학은 전국 최고 갑부가 되었고, 1967년 8월 22일 갱도 매몰 사고로  굴 안에 갇혔던 김창선 씨가 보름 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된 청양 구봉금광은 1970년대 폐광되었음에도 지금도 생산성이 있다는 분석에 광업 재개의 청원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아직도 금의 나라인 듯 여겨지는데, 다만 운산금광과 대유동금광으로 유명했던 피난덕산(避難德山)의 금맥은 북한이 하도 금광석을 긁어대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1811년 홍경래가 난을 일으킬 때 광부들을 모집한다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던 곳이고,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미군 폭격기에 놀라 대피했던 곳이며, 1950년 12월 조·중연합지휘부가 설치됐던 역사가 숨어 있기도 한 곳이다. 
     
     

    대유동 갱도 앞의 김일성과 팽덕회(왼쪽)
    1950년 12월 대유동 갱도에 조·중연합지휘부가 설치됐다.

     

    모스는 1896년경 지금의 인성여중 자리에 집을 지었고, 데쉴러는 지금의 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아메리카무역 동양합동 광업회사'에 연접해 집을 지어 살았다. 따라서 이 두 집은 위아래로 서로 붙어 있는 셈이나 다름없었는데, 이중 높은 축대 위에 벽돌로 지은 흰색 2층 양관의 모스 저택은 등나무를 비롯한 여러 수목과 어우러져 특히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모스 저택은 이후 경성일보 인천지국을 운영하던 일본인 이마이가 살다 광복 후에는 거물정치인 곽상훈(해방 후 민의원 의장을 지냈고 훗날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이 사용했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됐다. 지금은 인성여중이 그전의 축대를 모두 밀어내고 들어서 옛 모습을 살필 길 없다.  

     

     

    송학동 홍예문로에 있던 모스 저택 (●)
    모스의 저택의 측면 사진
    모스 저택이 있던 곳 / 지금의 인성여중 자리
    인천개항박물관의 모스 저택 안내문
    맞은편의 옹진군선거관리위원회
    홍예문과 홍예문로
    주변 건물 / 가운데 차 지나가는 길이 홍예문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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