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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미도 다리와 애탕신사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20. 21:27

     

    인천 월미도는 지금은 승용차와 버스로, 혹은 도보로 아무 거리낌 없이 다닐 수 있어 이곳이 과거 섬이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월미도가 뭍과 연결된 해는 1922년으로 100년이 넘었고, 처음에 만들어졌던 약 1㎞, 2차선 규모의 둑길은 지금은 그 주변이 간척되어 넓은 육지가 되었으니 사실 이제는 섬이라고도 할 수 없다. 아래 사진과 지도를 보면 월미도 둑길의 어제와 오늘이 확연히 구분된다.
     

     

    1950년 7월 24일 미군이 촬영한 월미도와 인천항 항공사진 / 화살표가 1922년 일제가 만든 둑길이다.
    지금의 월미도와 인천항 지도

     

    그런데 본래의 월미도는 1882년 개항 전까지는 썰물 때면 모래톱을 걸어 뭍으로의 왕래가 가능한 곳이었다. 그러다 제물포가 개항장이 되면서 선박 입출항을 위한 준설을 했고 이에 바다가 깊어져 더 이상의 왕래가 불가능해졌는데, 그 무렵인 1904년 일제가 이곳에 다리를 놓았다. 일본이 이 목교를 서둘러 가설한 이유는 다가올 러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으로 그 근거는 1904년 2월 23일 한·일 양국 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였다.
     
    일제는  <한일의정서> 제4조의 조항, 즉 '일본이 요구하는 땅을 임의로 군사용지로 전용할 수 있다'는 권리조항을 근거로 월미도를 차지하고 주민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다가온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1904년 7월 26일 월미도와 인천역을 연결시키는 철도를 가설했던 바, 당시 월미도 남단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전쟁 물자를 신속히 만주로 보내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니까 월미도와 뭍을 연결하는 약 1㎞의 목교는 선로를 놓기 위한 다리였던 셈이다. 
     

     

    1904년 일제가 가설한 목교

     

    아울러 일제는 월미도에 석탄창고와 급수소, 무전 송신소 등을 설치해 전쟁에 대비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20년쯤이 지난 1922년, 다리와 철교를 아예 없애고 그곳에 2차선 규모의 둑길을 놓았다. 일제가 이 둑길을 만든 이유는 인천항 안으로 유입되는 토사를 막기 위함이었는데, 그러면서 월미도는 섬이 아닌 육지가 되었다. 즈음하여 월미도의 유원지화가 가속화된 것도 이때 월미도까지의 둑길이 생성된 까닭이었다. (☞ '인천 송도 신도시와 일본 순양함 마츠시마호')  

     
     

    1922년 월미도 둑길

     

    1920년대, 원산 명사십리와 부산 해운대 등의 유명 관광지를 밀어내고 전국 최고의 휴양지로 자리매김했던 월미도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며 다시 전쟁의 섬의 됐다. 일제는 월미도에 군함 저탄장(석탄창고)과 기름 저장탱크 등을 만들었고, 유락시설이 군사 목적으로 쓰이면서 월미도는 더 이상  휴양지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이 1945년 해방 때까지였는데, 이후 잠시 평화를 되찾았던 월미도는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됨과 함께 또 다시 전쟁의 한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대는 경제부흥을 위한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다. 우리의 귀에 익은 대한제분, 동일방직, 대한사료, 애경사, 대한제당 등은 과거 일제의 산업 기반 위에 세워진 공장들로서, 지금의 대한제분공장 앞에서 월미도에 이르는 1km 길이의 둑길은 최근 맥아더 길로 명명됐다.
     
    한국전쟁 당시 UN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곳이 바로 월미도의 '그린비치'와 현 대한제분공장 앞의 '레드비치'인 바, 그 연결로에 맥아더의 이름은 붙이는 것은 절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2시에 감행된 이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 길이 남을 전공으로서, 지금의 선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은, 당시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신생 코리아의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지켜달라는 부름에 응답하여 이 땅에 온 세계 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흘린 피로써 비롯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천상륙작전 레드비치와 그린비치상륙지점
    인천상륙작전 레드비치 상륙지점 / 보이는 건물은 대한제분 싸이로
    인천상륙작전 레드비치 상륙지점 표석
    표석 옆의 한국군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인천상륙작전 그린비치 상륙지점
    인천상륙작전 그린비치 상륙지점 표석
    월미도 그린비치 유엔군 인천상륙 기념표석
    인천 내항 8부두 연변의 도로 / 왼쪽의 인천상상플렛폼에는 과거 일제가 건설한 곡물창고가 있었다.
    대한제분 입구의 옛 동네
    대한제분 싸이로
    대한제분 싸이로 입구의 맥아더 길 표석
    맥아더 길의 세계 최대 벽화
    2018년 22명의 도장 도색 전문 인력이 투입되어 곡물저장고 외벽에 완성한 아파트 22층 높이 규모(높이 48m, 길이 168m, 폭 31.5m)의 벽화가 기네스 북에 세계 최대 벽화로 등재되었다. (조선일보 DB)
    맥아더 길의 대한제당 공장


    월미도는 면적 0.7㎢의 작은 섬이리지만 그야말로 근현대의 오욕이 점철된 곳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나 병자호란 때 기존의 강화도 길이 오랑캐에 가로 막히는 일이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이후 인천을 경유하는 길을 개척한 후 월미도에 행궁을 세우기도 하였고,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로즈 제독이 주둔했던 관계로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로즈 아일랜드로 불렸다.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 역시 월미도에 닻을 내렸다.
     
    월미도가 근대사의 오욕에 본격적으로 쓸려들어 간 것은 1875년 운요호 사건 때로, 일본 군함 운요호는 월미도 정박 후 강화도를 나아가 초지진을 포격했고, 1891년 일본의 요구에 의해 <월미도지소차입약서>를 체결하면서 월미도 외세 점유의 불이 당겨졌다. 대한제국 때인 1900년 월미도의 개간권을 허가받은 한국인 송정섭은 일본인 요시가와에게 개간권을 팔아 넘겼고, 요시가와는 월미도 주민을 내쫓았다.
     
    요시가와는 1904년 월미도에 있는 민가를 강제로 철거한 뒤 순환도로를 건설하고 일본산 벚나무를 심었는데, 즈음하여 일본인들의 월미도 거주가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1907년, 해발 105m의 월미산 정상에는 저들의 불의 신 가구쓰치(迦具土)를 봉안한 아타고(愛宕) 신사가 세워졌는데, 1929년에는 일본 거류민단 3천 명이 모은 1만5천 엔의 기금으로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아타고 신사는 일본에는 900여 개나 있는 전국구 신사이기도 하다.
     
    아타고 신사에는 1933년 4월 27일 만주사변 때 전몰한 병사의 충혼비가 세웠지며 민간신앙처에서 군국주의의 장소로 변질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파괴되었다. 신사의 돌계단은 한국전쟁  이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월미도는  한국전쟁 이후로는 줄곧 해군 제2함대가 주둔하여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지난 2001년 일반에 개방되었다.  
     
     

    옛 월미행궁 터에사 바라본 연안부두
    애탕신사가 위치했던 월미산
    인천 중구 북성동 1가 125 월미산 애탕신사
    왼쪽으로 만주사변 전몰병사 충혼비가 보인다.
    해군 2함대 사령부 주둔 기념물과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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