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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화기 송학동 홍예문과 그 길에 있던 건물들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0. 2. 20:53

     

    1876년 조선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부산과 원산항이 개항되었다. 그 조약문에 명시된「부산 외 2개 항구를 더 개방하고 일본인의 통상과 왕래를 허용한다」는 내용에 의거해서였다. 일본은 이때 부산 외에 두 항구로서 원산과 제물포를 강력히 희망했다. 원산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함이요, 제물포는 수도 한양을 옥죄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에 따라 1880년 원산이 개항되었다.

     

    하지만 인천은 1882년까지 개항되지 않고 있었다. 조선측이 개항하지 않는 이유는 인천항이 서울과 매우 가깝다는 이유였는데, 이것은 일본측이 인천을 개항장으로 요구하는 이유와 같았다. 조선에서는 같은 이유로써 인천 대신 남양(南陽)의 마산포(麻山浦)를 개항장으로 제시했고, 일본도 조선측의 완강함에 남양만을 선택하려 했으나 다시 생각을 바꿔 인천을 요구했다. 그리고 1883년 1월 1일 마침내 제물포항이 개항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밀땅을 보여주는 '개항문답'
    개항문답 안내문 / 인천시립박물관
    개항 전의 제물포 모습

     

    이후 1883~1884년 사이, 일본과 맺은 인천구 조계조약(仁川口租界條約)을 필두로 인천에는 외국인이 거류할 수 있는 조계지(租界地)가 만들어졌다. 이때 일본은 인천 개항시킨 나라답게 청국과 더불어 제물포항에 인접한 노른자 땅을 조계지로 얻었던 바, 항 이듬해인 1884년 9월 제물포에 상륙한 최초의 선교사 알렌은 "제물포에서는 일본인이 가장 우세해 좋은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일기에 적었다.

     

    이어 조선은 1882년 미국에 이어 영국, 독일, 청나라 등과도 수교 통상조약을 맺었고, 이들에게도 조계지가 주어졌다. 각국의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는 크게 '청국 조계', '일본 조계', '각국 조계'로 삼분되었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자리한 '각국 조계'가 약 14만 평으로 가장 컸다.(각국조계는 1914년까지 존속했다) 

     

     

    19세기말 인천 조계지의 정립
    위성사진으로 비교해 본 당대의 조계지 / 인천개항박물관 옆 안내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불가사의한 일이 있다. 일본은 조선과  인천구 조계조약(仁川口租界條約)을 가장 먼저 체결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지로 턱없이 작은 땅(대략 7000평)을 차지한 사실이다. 이후 일본은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늘자 궁여지책으로 조계지 앞바다를 매립하여 4000여 평의 땅을 마련하였다. 지금의 해안동 인천아트플렛폼 일대는 일본이 1898년 최초로 매립 사업을 벌인 곳이다. 

     

     

    해안동 일본 우선해운회사 건물 / 그 앞 시계탑 시계 안에는 '1883, 1902' 숫자가 적혀 있다. 1883년은 인천이 개항을 한 해이고, 1902년은 인천에 '해관 등대국'이 생긴 해이다.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들 / 왼쪽으로 일본 우선해운회사 건물과 인천아트플렛폼이 보인다. 해안동 매립 공사가 있기 전의 사진이다.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 조선을 기회의 땅으로 여긴 일본인들의 인천 진출이 더욱 늘었다. 일본은 조계지를 넓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주변은 다른 나라 조계지에 가로막힌 상태였고 매립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에 뒤늦게 온 일본인들은 신흥동으로 진출했고 더 늦은 자들은 조계지는 물론 신흥동보다도 더 땅값이 싼 만석동 쪽에 터전을 마련했다. 이에 일본 조계지와 만석동이 연결되는 길이 필요했겠으나 길을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 지역 사이에 거대한 응봉산 마루턱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석동의 일본인들은 조계지를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서북쪽의 해안길을 우회해야 했다. 

     

    그러자 일본은 1905년 특단의 방법을 생각해 냈다. 공병대를 동원하여 길을 내기로 한 것이었다. 이  2차선 도로는 언덕을 뚫어 만든 홍예문의 아래를 통과했는데, 완공까지는 의외로 오랜 시간이 걸려 1908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화강암 암벽이 공사를 방해했기 때문이니 최초의 공사비 1만2000원이 어림없게 된 일본은 조선정부를 압박해 1만6800원이라는 거금의 보조금을 뜯어냈고, 공사 책임자였던 마키노(牧野) 공병 대령은 바위에 구멍을 내 박은 TNT를 수없이 터뜨려댔다. 아울러 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바위를 쪼아야 했는데, 지금도 문 앞 벽에는 당시 쪼아댄 암석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홍예문 안쪽에서본 홍예문로의 어제와 오늘
    홍예문 바깥 길의 어제와 오늘
    홍예문 안내 표석

     

    무지개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높이 13m, 폭 7m, 통과 길이 13m 규모로 지어졌고, 일정한 크기로 다듬은 네모난 화강석이 쌓아 올려졌으며, 옆면은 마름모꼴로 다듬은 화강석을 왜식 쌓기로 처리했다. 그리고 안쪽은 중국인 조적공을 고용해 붉은 벽돌을 아치형태로 쌓아 마무리했다. 일본인들은 이 문을 혈문(穴門, 아나몽)이라고 불렀는데, 단순히 구멍을 냈다는 의미가 아니라 혈을 뚫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하는 바, 여러 가지로 의미 깊은 난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인에게는 여러 가지 아픔이 담긴 공사였으나 한국인과 중국인 인부 50여 명이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있었다.  

     

     

    쌓는 방법이 각각 다른 문과 옆 벽
    붉은 벽돌로 처리된 내부 아치

     

    말한 대로 이 자리는 응봉산과 연결되는 능선이 있던 곳으로, 까닭에 응봉산 자유공원에 내려오다 홍예문 위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그 뷰가 보통이 아니다. 그리고 항구로 향한 그 길에는 신동공사(紳董公社, Municipal office)와 일본인 시민회관인 인천 공회당, 인천세무소, 인천 거류민병원, 인천경찰서 등의 관공서가 있었다. 신동공사는 과거 인천 각국조계지의 행정 및 민사를 관할하던 자치 행정기구였으나 1914년 조계지 제도가 없어지며 따라 사라지고 건물은 인천부립 병원장의 사택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신동공사 자리에는 1934년 5월 인천세무소가 들어섰다가 1949년 우각로에 신설된 세무소로 옮겨갔고, 그 자리는 현재 공터가 되어 주자창으로 쓰이고 있다. 기타 송학동 홍예문로에는 모스 저택을 비롯한 여러 외국인들의 별장과 저택이 즐비했는데, 일부는 당시의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신기하다. 이를 테면 홍예문 계단 오른쪽에 있는 카페 잔피와 히스토리는 조선 식산은행 임원이던 일본인 집으로 내부까지 거의 온전하다. 

     

     

    홍예문 위에서 본 풍경
    신동공사 건물(화살표)과 인천 공회당
    신동공사가 있던 주차장
    인천 거류민병원의 1907년 사진
    인천 거류민병원이 있던 인성여고 운동장
    카페 잔피
    카페 잔피와 히스토리아를 만날 수 있는 계단
    인천개항박물관의 모스 저택 안내문
    모스 저택이 있던 인성여중
    인천경찰서 / 일본영사관(현 중구청) 내에 있다가 1923년 송학로에 건물을 신축하며 옮겨왔다.
    공회당 아래의 인천경찰서 (화살표)
    위 사진의 현재 모습
    아래 쪽에서 올려본 사진 / 오른쪽 인성여고 다목적관 자리에 인천경찰서가 있었다.
    홍예문로를 오르면 볼 수 있는 연안부두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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