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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제국 최대 이권을 주물렀던 선교사 알렌과 우각현 별장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6. 28. 07:34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말했듯 호러스 알렌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앞서 입국한(1884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개신교 한국 전래의 효시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는 인물이다. 당시는 조선이 외국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금하고 있던 때라 그는 공식적으로는 선교사가 아닌 미공사관의 직원 신분으로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고종도 그를 경계해 초대 미국공사 루시어트 푸트에게 알렌이 정말로 선교사가 아닌가를 물었을 정도였는데, 푸트는 "NO. 그는 정말로 공사관의 무급 의사(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입니다"라는 준비된 답변으로 고종을 안심시켰다.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하지만 알렌은 입국한 지 불과 1년도 안 돼 의심에서 벗어나 오히려 고종과 민왕후의 사랑을 담뿍 받는 존재가 되니, 그 배경이 된 사건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당시 개화파의 칼에 여러 곳을 찔리고 베어 사경을 헤매던 민왕후의 조카 민영익을 서양의사 알렌이 외과 수술로써 살려낸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후 그는 왕실의 신임 속에 선교의 자유 또한 보장받는데, 그로 인해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인천에 상륙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앞서 가톨릭 선교사들이 겪었던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침이 없이 무난한 선교의 과정을 밟게 된다.

     

     

    민영익을 치료하는 알렌 / 1904년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라프 신문에서 호레이스 알렌에 대한 기사를 실었을 때의 삽화이다. 제목이 'Horace N. Allen. The First Amerlcan in Korea' 이다.
    이후 알렌은 이렇게 바뀌었다. / 고종이 하사한 나귀를 타고 왕진 가는 모습으로, 2012년 공개된 컬러사진이다.
    알렌의 진단서 / 제중원 원장 알렌이 발행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진단서이다.

     

    뿐만 아니라 알렌은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 곧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뀜)을 설립하고 왕실의 주치의로도 활약하였다. 나아가 1887년 정3품 참찬관에 임명되어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일행을 미국까지 무사히 안내했는데, 그때 청나라 원세개가 제시한 영약삼단(另約三端)을 파기하고 독립국 사신의 체면을 유지시켜 준 것은 오로지 호러스 알렌의 덕이었다.

     

    당시 알렌이 홍콩에 가서 고종이 HSBC(홍콩 상하이 은행)에 은닉해 두었던 비자금의 일부를 찾아 경비로 쓴 이야기는 차후 기회가 나면 자세히 피력하기로 하겠다. 우선 간단히 말하자면, 고종이 조선백성들의 혈세로써 조성한 거액의 내탕전(內帑錢)이 HSBC에 예치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거액이었는지는 그 돈을 관리하던 민영익이 VIP로 통했고, 그가 홍콩 최고급 호텔인 빅토리아 호텔(지금의 페닌슐라 호텔)의 가장 큰 스위트 룸에서 장기 투숙 중이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알렌은 홍콩을 떠나며 민영익에게, 지나치니 좀 작은 방으로 옮기라고 권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고종이 비자금을 예치해두었던 HSBC의 현재 모습
    민영익이 묶었던 호텔의 현재 모습

     

    나라는 늘 가난했지만 매관매직과 내탕금의 돈놀이 등으로써 고종은 늘 돈이 많았다. 백성들의 세금은 당연히 탁지부(재정기획원)로 가야 했지만 토지·임야·염전·어장·광산 등의 안정적인 알짜배기 세금은 내탕금을 관리하는 내장원이 거둬들였다. 그러니 나라가 돈이 없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는데, 탁지부에서 관리들의 녹봉 줄 돈이 모자라면 내장원에서 꾸어 지급했다. 나중에 이자를 쳐 갚아야 함은 물론인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탁지부와 내장원의 우두머리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임금이 임명했을 터, 그가 어느 쪽을 중요시했는지는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차후에 다시 얘기되겠지만 알렌은 선교사로서의 초심을 상실하고 나중에는 정치가와 사업가로서 행세했다. 1890년에는 미국공사 대리로도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때 조선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여 운산금광채굴권과 경인철도부설권 등을 따냈고, 거액의  커미션을 받고 미국인 사업가에게 넘겼다. 그래서 동료인 마펫 선교사는 당시 알렌을  매섭게 비난하였다. 마펫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이제 알렌은 정치계로 나갔으니 한국선교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완벽히 말소시켜야 한다"고 청원했다. 알렌을 선교를 위해 온 사람으로 인정하지 말자는 주장이었는데, 실제로 동료 선교사들은 알렌을 그렇게 대했다.

     

     

    외교관 알렌 / 1905년 미국공사 알렌의 초청으로 대한제국 각국 공사들이 미국공사관에 모여 회의를 한 후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에서부터 청국 공사원, 잘데른 독일 공사, 플랑시 프랑스 공사, 알렌 미국 공사 등이다.

     

    1902년은 대흉년이 든 해였다. 흉년은 이후로도 2~3년간 지속됐는데, 실록에는 그때 장릉(인종의 릉) 소나무 껍대기가 모두 벗겨졌다고 했다. 배고픈 백성들이 능묘의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은 것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길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고도 했고, 능묘를 지키는 초병조차 백성들을 막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어디 장릉뿐이었겠는가? 그런데도 고종은 내탕금을 풀지 않았으니, 고종으로부터 훈위 1등의 태극 대수장 훈장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간(1905년) 알렌마저 귀국하며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가련한 한국 국민이도다. 내 일찌기 지구 9만 리를 돌았고 4000년 세계 역사의 전후를 모두 훑었지만 한국의 황제 같은 사람은 처음이로다."  

     

     

    선글라스로 멋을 부린 고종 (2012년 제중원 창립 127주년 때 공개된 사진)

     

    다시 얘기를 처음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그래도 알렌이 영약삼단(另約三端)을 파기시킨 것은 커다란 공이었다. 만일 알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외교에서도 내내 청나라에 질질 끌려 다녔을 터, 앞서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영약삼단'에서 말한 그 내용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겠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정식으로 수교를 했으나, 이듬해 루시어트 푸트가 주미공사로 부임한 것과 달리 조선은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1884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격변의 세월을 맞은 탓도 있었지만, 더 정확히는 그때마다 청나라에 도움을 청함으로써 스스로 국격(國格)과 위의(威儀)를 떨어뜨리고 내정간섭의 빌미를 자초한 조선 스스로의 탓이었다.

     

    고종은 1887년 7월 8일 비로소 협판 내무부사 박정양을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했으나, 당시 '주차조선교섭통상의'란 직함으로 온갖 간섭과 횡포를 일삼던 원세계의 반대로 출발하지 못했다. 조선의 외교사절 파견을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미국은 청나라 이홍장에게 이를 강력히 비난했고 청나라는 어쩔 수 없이 공사 파견을 허락했다. 그냥은 아니었고 영약삼단(另約三端)이라는 조건을 달아서였다. 영약(另約)은 '별도의 약속'이라는 뜻이고, 삼단(三端)은 '세 가지 단서'라는 뜻이었다. 그 세 가지 단서의 약속이란,

     

    첫째, 조선 사절이 주재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중국공사관으로 가서 온 이유를 중국공사에게 고하고, 중국사신의 동행 하에 미국 외무성을 방문한다. 

     

    둘째, 각종 행사나 외교모임 등의 자리에서 조선공사는 중국공사 밑에 자리하고 중국사신을 따른다.

     

    셋째, 조선공사는 미국 당국과의 교섭 사항이 있을 경우, 중국사신과 사전에 은밀히 상의하여 결정한 후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당시의 주미공사 관리 /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 이완용, 주미공사 박정양, 이하영, 이채연이며 뒷줄은 무관 이종하, 화가 강진희, 종사관 이헌용 등이다.

     

    박정양은 이 세가지 약속을 수락하고 태평양을 건너 1888년 1월 9일 워싱턴DC에 도착했다.(1887년 11월 12일에 출발해 인천, 나가사키, 홍콩을 경유했고 다시 요코하마를 거쳐 호놀룰루를 지나 1888년 1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이른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려 청국공사관을 방문하려는데, 동행했던 알렌이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이었다. 그 덕에 박정양 일행은 직접 미국무성으로 가서 국무장관 베야드를 접견할 수 있었고, 이어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봉정했다.*

     

    * 이에 열받은 원세개가 고종을 윽박질러 박정양을 소환했으나 박정양은 일본에 머무르며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영약삼단은 유야무야 되었다.

     

    그 알렌이 1896년 인천 우각현(쇠뿔고개)에 별장을 지었다. 지상 2층의 본관(202.2㎡)과 단층의 부속 건물 두 채로 이루어진 서양식 건물로 근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1897년 개통된 경인선 우각리역이 있었다. 역사(驛舍)도 없이 오로지 알렌의 편의만을 고려해 만든 역이었다. 우각리에 철로가 놓인 것도 실은 희한한 일이었다.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과 주안역을 그저 직선으로 연결하면 되었는데 굳이 선로를 휘면서까지 우각리역을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이곳에 사람도 별로 살지 않았다.(어쩌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알렌이 한국을 떠나고, 이후 제임스 모스로부터 사업권을 인수받은 일제는 곧바로 선로를 직선으로 바꿔버렸던 바, 지금의 선로는 그때 변경된 것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알렌이 인천에 별장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경인선 부설과 연결시킬 여지는 충분하다. 경인철도부설권은 아관파천 후 친미세력이 대거 등용된 뒤, 알렌이 조선정부로부터 따낸 또 하나의 역작이었기 때문이다.

     

    알렌은 이곳 별장에 머무르며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불러들이는 등 힘을 과시해 보이기도 했는데, 곧 근방에 왕의 궁전도 지어져 천도(遷都)하리라는 알렌의 말이 그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이 최근 인천행궁 건설계획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허세 부리기를 좋아했던 고종은 러일전쟁이 목전에 이른 1903년 평양에 풍경궁이라는 대규모 궁궐을 착공했고, 민왕후가 임오군란 때 도피했던 장호원에도 별궁을 지었다. 이를 걱정하는 신하들에게는, 내 돈(내탕금)으로 짓는 것이니 심려 말라며 오히려 당당했다.*

     

    * 풍경궁 공사에는 조선의 1902년 세출액 758만 원을 상회하는 800만 원의 거금이 쓰였는데, 정작 고종이 낸 돈은 내탕금 100만 냥(20만원)이었고 나머지는 평안도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했다. 매천 황현은 "백성 재산 3분의 1을 적몰해 관아에 바치므로 유민(流民)이 서로 줄을 이어 천리길이 소란하였다"고 했고,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평양에 머물던 작가 잭 런던은 이 상황을 자신의 책 <조선사람 엿보기-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에 낱낱이 기록했다. 고종은 그와 같은 평안도민을 위해 "평안도에 대해서는 2년간 세금 3분의 1을 감액하라"는 은혜 넘친 특별명령을 내렸다. 이 궁은 이후 일본군의 주둔지로 쓰였다. 

     

     

    잭 런던이 찍은 풍경궁 공사 광경
    알렌과 그의 부인 프랜시스

     

    이와 같은 고종에 물든 것인지 알렌도 궁전 같은 별장을 지었는데, 본래 조선 사람을 멸시하던 그는 별장 안으로는 하인 외의 한국인을 들이지 않았다. 1837년 11월 3일 운산금광회사에 운영권을 넘겨주며 "한국인은 합법적 채찍형(Judicious Whipping)으로 다스림이 옳다. 한국인은 그게 있어야 알아듣지, 아니면 모른다"는 말을 한 그였다. 그래서인지 알렌의 별장 내부에 대해서는 특별히 전하는 게 없다. (최근 구 교회건물이 철거되며  알렌 별장의 기초에 대한 문화재적 조사를 기대했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소식을 들은 게 없다)

     

    알렌의 별장은 1956년까지 존속하다 박태선 장로가 새로이 인천전도관이란 이름의 거대한 교회 건물을 지으며 사라졌다. 박태선은 그가 만든 '신앙촌'이란 기독교 계열의 신흥종교와, 그가 했다는 "예수는 개새끼"라는 설교, 그리고 그 아들 박동명이 일으킨 이른바 '박동명 사건'으로 친숙한 사람이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만든 기독교 종파를 천부교(天父敎)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하늘에서 인간의 육신으로 내려온 천부(天父) 감람나무 하나님이라 칭했다.

     

    박태선의 천부교는 한때 신도수가 1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고 대규모 식품·의류공장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래서 천부교는 '시온그룹'이란 이름으로 세인에게 더 알려졌는데, 거기서 생산한 '신앙촌 간장'은 주부들 사이에서 맛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 히트상품이 되었다. 자체 학교도 운영하였으니, 대학교 때 만난 어느 친구가 시온고등학교 출신이라고 해 좀 놀란 적이 있다. 천부교는 그 정도로 왕성했던 종교단체였지만 1990년 박태선이 사망하며 교세가 꺾였다. 그는 살아생전 교주인 자신이 축복한 생명물을 마시면 병이 낫고 죽지 않으며, 시체에 생명수를 뿌리면 시체가 썩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효과가 미치지 않았다.  

     

     

    천부교 교주 박태선(1917~1990)

     

    * 박동명 사건은 박태선의 아들 박동명(당시 31살)이 여자 연예인들과의 떼놀음으로써 1970년대 연예계를 뒤흔들었던 대형스캔들이다. 당시 굴지의 합판회사 태광산업의 젊은 오너였던 그는 캐딜락과 무스탕 등 외제차를 여러 대 굴리며(당시는 국산차를 타는 것도 사치로 치부되던 시절이고 무스탕은 국내에 그의 차 1대가 전부였다) 여러 명의 여자 연예인들과 사교하였는데, 미국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을 드나들며 유흥을 즐긴 것으로 알려졌고, 1975년 결국은 외화밀반출 혐의로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 등에서 플레이보이지(誌) 바니걸들과도 놀았고 하루에 1천 달러 이상을 썼다. 당시 과장급 회사원 1년 치 연봉을 하루에 날린 셈이다. 그는 한번 쇼핑에 500불 이상을 소비하여 현지 백화점 직원들에게도 소문났던 동양인 졸부였다. 당연히 많은 현찰이 필요했을 터, 8만 달러의 현찰 뭉치를 들고 입국하다 미국세관에서 동양인 갱단의 일원으로 오인받아 붙잡혔다. 이런 돈다발은 갱단의 마약거래에서나 필요한 것이었다. 

     

     

    바니걸과 함께 찍은 사진

     

    미국 경찰은 이를 한국에 알렸고 경찰은 그의 저택을 급습했는데, 그 자리에 같이 있던 21살의 여배우 강경희가 포착되며 더욱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후 경찰에 확보한 박동명의 수첩에 올라 있었다는 이른바 '박동명 리스트' 속의 유명 여배우와 여자 연예인 80여 명이 누구누구였다더라는 이른바 '카더라' 통신이 횡횡하였으며, 그 바람에 죄 없이 피해를 본 연예인들도 속출했다.

     

     

    법정에서의 박동명

     

    박동명은 법정에서 내내 쓰러질 듯한 아픈 모습으로 일관해, 세인들에게 '정말로 어디가 아픈 모양'이라는 동점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모두가 쇼였다는 것이 후세 재벌들의 법정 행태로써 밝혀졌다. 아무튼 그는 나쁜 방면에는 선구자였으니 빵빵한 변호사들을 고용해 형(刑) 다운 형을 받지 않은 것도 그러했다. 그리고 박동명이 쓰고 다닌 돈들의 대부분은 천부교 교회 사람들이 낸 십일조였다는 것이 수사 결과 밝혀졌음에도 정작 교인들은 무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도 요즘의 세태와 같았다. 

     

    ※ 고종, 알렌에서부터 박태선, 박동명까지 숨 가쁘게 적었다. 2편에서는 조금 느긋하게 이야기를 잇기로 하겠다. 

     

     

    알렌 별장과 우각 옆을 지나는 기차 / 우각역은 지금의 송림동 박문로터리 근방에 있었다. 사진은 1901년 미국여행가 버튼이 찍은 것이다.
    알렌 별장
    별장 주변에 민가가 거의 없다.
    인천전도관으로 쓰일 때의 모습 (인천in 사진)
    이후 건물은 한국예루살렘교회라는 또 다른 신흥종교단체의 예배당으로 사용되며 마을에 민폐를 끼치다 2005년 이후 폐허로 남았다.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한 철거가 진행 중이다. / 보이는 건물은 주변의 아파트이다.
    근방 도원역 있는 곳에 경인선 최초 기공지 표석이 서 있다. / 우각현이 기공지가 된 것도 물론 알렌 효과이다.
    <콩나물신문>에서 빌려온 지도 / 위의 철도가 구 노선이고, 아래 철도가 일제가 만든 신 노선이다.
    근방의 경인선 전철 선로와 도원역
    노다지(no-touch)라는 말이 파생된 운산금광회사가 있던 인성초등학교 / 평안도 운산금광은 대한제국 최대 이권으로서 40년간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이 채굴되어 1,500만 달러의 수익을 미국인이 챙겨갔다. 운산금광회사인 ' 동양합동 광업회사가 인천 송학동에 있었던 것도 알렌과의 유대 때문이었다.
    법정에서 쓰러질 듯한 모습의 박동명
    꼬리에 꼬리를 무는 풍문 ㅡ 지출 메모 곳곳에는 '처녀 물품대'라고 적혀 있었고, 이버지 종교에는 환멸을 느낀다고 언급했다. 자신은 그 아버지의 돈으로 호화생활을 즐겼음에도.
    생긴 건 야비한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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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