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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유명한 인촌성냥공장과 인천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6. 29. 19:48

     

    인천을 이야기할 때 성냥공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886년 인천에서 첫 생산된 러시아산 성냥은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서 머리에 붉은 인(燐)이 붙은 작은 나뭇가지를 곽(廓)에 대고 그으면 곧바로 불길이 일어났다. 얼마나 신기했을까? 말하자면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단숨에 근대 문명시대로 온 것이니 그 경이는 혁명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살펴보면 원시시대에서 곧바로 근대로 온 것은 아니고 '부시'의 시대를 거쳤다. '부시'는 돌에 그어 불꽃을 일으키는 철편(鐵片)으로 영어로는 파이어스틸(Firesteel), 또는 파이어스트라이커(Fire Striker)라고 부른다. 즉 이 '부시'와 돌이 부딪힐 때 일어나는 불꽃을 재빨리 검불이나 탄화 숯과 같은 물질(Tinder)에 옮겨 붙게 해 불씨를 만드는 것으로써 청동기시대 이후로는 부싯돌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 재료를 한자로는 수석(燧石)이라 쓴다.   

     

    ※ 이름이 '부싯'돌'이라서 그런지 흔히들 돌멩이 두 개를 부딪쳐서 불똥을 만든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아무리 손에 꼭 맞는 돌멩이를 찾았다고 해도 평범한 돌끼리 부딪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을 붙일 수 없다. 인간이 돌멩이를 순간적으로 부딪치는 정도로는 발화점까지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나무위키>

     

    그보다 더 오래된 시기에는 나무와 나무막대를 비벼서 나온 불똥을 불쏘시개에 옮겨 불씨를 생성하는 방법을 썼다. 가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소개되는 이 마찰열의 방법은 정말로 몇 시간씩 걸리는 오랜 직업이긴 하지만 불이 붙기는 붙는다. 하지만 어렵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 척(톰 행크스)이 불을 얻는 처절했던 과정이 기억에 남아 있다. 무인도에 표류한 척이 나무의 마찰력으로 불을 만들어 보려 오랜 시간 노력하다 손에 상처를 입고 비명과 함께 절규하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2014년 발굴된 2천 년 전의 광주직할시 신창동 유적에서 과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발화구가 거의 원형 그대로 출토돼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이 발화구는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있던 인천 금곡동에 세워진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에는 이보다 편하게 불을 만들던 두 종류의 부시가 진열돼 있다. 

     

     

    신창동 출토 발화구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에 전시된 부싯깃 세트

     

    말이 나와 하는 얘기인데, 전에 인천 성냥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인천 최초의 성냥공장이라는 금곡동 인촌성냥공장의 사진을 찾아봤고,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인촌성냥공장 생산 '조선(朝鮮)' 성냥의 사진도 찍었었다. 그런데 그때도 금곡동에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최근에 알게 돼 방문하게 되었는데, 정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근대로 간 경험을 하였다. 대강 찍어오긴 했지만 시간여행 속의  물건과 설명은 아래와 같다.

     

     

    금곡리 성냥공장 조선인촌주식회사
    성냥마을박물관에 재현된 조선인촌주식회사 현판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조선' 성냥갑과 안내문
    성냥마을박물관에 전시된 그간의 성냥들 / 맨 아래 오른쪽의 8각형 UN성냥은 나도 쓴 경험이 있다. 아마도 많은 분이 그러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성냥산업과 대표 공장들
    우리나라의 성냥 역사는 개화승 이동인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성냥과 양초는 이사 선물이었다. 불 같이 번창하라는 뜻이니, 요즘의 '술술 풀리는 화장지'의 원조격이다.
    배다리와 함께 한 성냥공업
    성냥제조의 마지막 공정인 포장작업
    성냥갑 접기 부업은 배다리 인근 가정 곳곳에서 행해졌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피잣집 포장지 접는 일의 원조 같은 일이다.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재현된 성낙곽 접기 부업 모습
    이런 전시물도 있다 / 오른쪽 석유곤로와 주전자는 익숙한 분이 많겠지만 왼쪽의 석유등잔을 기억하는 세대는 없을 듯.
    금곡로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 / 2016년까지 있던 동인천 우체국을 활용했다.
    성냥마을박물관 바로 뒤의 두손빌딩 / 이곳에 인촌성냥공장이 있었다.
    근방의 배다리 거리 / 과거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주교(舟橋)를 만들어 왕래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하에 성냥공장이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천의 성냥공장은 제물포항의 개항과 더불어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하지만 러시아계 공장은 오래 존속하지 못하였다. 같은 보고서에서는 그 이유를 일본 공장들이 세워져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일본 성냥공장의 대표적인 것이 1917년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가 금곡리 2천여 평 땅에 세운 조선인촌(朝鮮燐寸)주식회사였다. 그는 인천미두거래소 이사장, 인천상업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인물로 돈 버는 데는 귀신을 능가하는 재주를 가진 자였다. 그는 미두거래소에 이어 1917년 10월 4일 인천에 성냥공장을 세웠고 신의주와 일본 나고야에도 같은 이름의 성냥회사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생산한 '조선' 성냥(위 사진)은 곧 러시아산, 독일산, 그 밖의 일본산 성냥들을 누르고 조선 소비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히트상품이 됐다. 인촌공장에서 만든 조선 성냥은 문자 그대로 도깨비불이었다. 성냥 머리에 붙은 작고 붉은 인(燐)을 그으면 바로 불이 일어났던 것인데 편리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 이 바로 '도깨비불 인' 자였다. 그리고 손이 많이 가는 제조 공정의 특성상 대규모 고용이 요구되었던 바, 1917년 금곡리 공장에 취업한 450명 노동자 중 350명이 조선인 여성으로 채워졌다.

     

     

    인촌공장에서 일하는 조선 여공의 모습

     

    조선인촌주식회사는 1930년대 후반에는 공장 직공 800명, 부업 종사자가 2천80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저임금의 환경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공들은 성냥 대가리에 인 1만 개를 붙여야 60전을 받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하루 14시간을 꼬박 일해야 했다. 일본인 관리자의 가혹한 작업 지시, 민족 차별의 언행도 뒤따랐다. 참다못한 조선인 여공들은 1932년 노동절 아침에 준비했던 격문을 인촌공장에 붙였다. 그리고 36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이후 작업이 재개되었으나 일본인 관리자의 보복성 인사에 대항해 9일 후 다시 임금인상 50%와 일본인 관리자 교체를 요구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관청에서 나섰다. 인근 공업지대로의 파업 확산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경찰은 시위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배후 조종자라는 구실로써 10여 명의 조선 여공들을 잡아가 혹독한 체형을 가했다. 이에 파업은 동력을 잃고 말았으나 인천 노동쟁의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게 되었다.

     

     

    성냥노동자들의 파업에 관한 자세한 전시물은 없으나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에 전시된 이 책자들은 당시의 일을 대변하고 있다.

     

    더불어 어려웠던 일은, 병의 발생이 필수인 환경에서 일해야만 되는 극악한 작업 환경이었다. 당시 성냥 재료는 독극물의 일종인 황린(黃燐)으로 발화점이 낮아 불이 잘 일지 않았다.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 붙어야 했기에 중독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에 황린은 1921년 법으로 사용이 금지되고, 인화점이 높은 적린(赤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중독성이 약할 뿐 인체에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상영된 영화 <에놀라 홈즈 2>는 19세기 영국 성냥공장에서 있었던 똑같은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성냥 제조공장인 'Bryant and May'로, 이 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여공과 아동은린 중독에 의한 턱뼈 괴사(Phossy jaw)와 같은 공통된 질병을 앓게 된다. 그러자 영국의 언론인이자 사회주의자인 애니 베전트(Annie Besant)가 이를 기사화해 송고했고, 이에 14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해 시민들의 지지 속에 파업을 승리로 이끈다는 스토리다.

     

     

    Bryant and May에서 만든 성냥
    Bryant and May 성냥공장
    Bryant and May 성냥공장의 여성과 아동 근로자들

     

    황린의 유해성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인을 나무 끝에 바르는 두약 공정과 건조실에서 황린의 독성에 노출되는데, 일반적으로 3~5년 정도 후에는 치은염(gingivitis), 치조정(alveolar crest)의 분리, 하악골 또는 상악골의 골 괴사로 인한 고통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아가 치아, 혹은 상·하악골에 구멍이 뚫리거나(fistula) 고름이 동반된 염증(abscess)을 발생시키기도 하며, 호흡기를 침범해 각혈을 유발하고(Phossy lung) 골수(Phossy marrow) 또는 뇌(Phossy brain)에 침범하여 사망에 이르게도 만든다.

     

    이를 대체할 적린이 1848년 독일에서 개발되었지만 황린은 유럽에서 1908년까지 사용되었고 조선에서는 1921년까지 쓰였다. 문제는 인촌주식회사가 설립될 당시에는 세계 성냥산업은 적린을 사용하는 이른바 안전성냥(safety match)이 대세였음에도 인촌주식회사는 값싼 황린을 공급받아 성냥을 제조하였다는 것으로, 그 1차적 피해는 공장의 근로자들이 입었고 2차로는 성냥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에는 애니 베전트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수의  가해자들이 있었으니 1960~1980년대에 주로 군대에서 불려진, 혹은 밑바닥 사회에서 불려진 '인천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코미디언 남보원이 처음 불렸다고 하는 (<나무위키>) 그 저질 유행가는 인천성냥공장 여공들에 대해 심각한 성적 모욕을 가하고 있음은 물론이요, 그 모두를 공장에서 몰래 성냥을 훔쳐 은밀한 곳에 숨겨 나오는 도둑으로 취급하고 있다. 

     

     

    광복 후의 성냥공장 풍경 / 조선일보 DB
    1960~1970년대의 대한성냥공장 성냥 / 인천시립박물관

     

    그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들이 대체 국민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모욕을 당해야 되는지, 그리고 '동백 아가씨'를 왜색 가요로 제재했던 당국자들은 그 노래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공적 금지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결국은 그들도 함께 즐긴 가해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노래는 지금도 유튜브 영상 등에 올라 있는데, 즐거운 표정으로 노래 부르는 이 사람이 과연 제 정신인가 의심스럽다.

     

    이와 같은 사회적 폭력은 늘 경제적·신분적 약자에 대해 가학적이었던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을 반영한다. 일제말기 백정들이 자신들도 평민처럼 대우해 달라는 형평사(衡平社)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백정들은 갑오개혁에 의해 법률상으로 천인 신분에서 해방되었지만 사회는 여전히 그들을 천인으로 대접했던 바, 이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탄압한 것은 양반이 아니라 평민들이었다. 그것도 잘 사는 평민이 아니라 겨우 천민을 벗어난 수준의 평민들이 주류를 이루었음은 많은 점은 시사해 준다.

     

    한때 공돌이·공순이로 불려던 1960~1980년의 공장근로자들은 따지고 보면 산업 현장의 최일선에서 뛴 진정한 산업역꾼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일등공신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공돌이·공순이의 비칭을 사용한 것은 고용주나 관리자가 아닌, 부모의 덕에 겨우 그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던 젊은이들이었다. (그때는 정말로 너나 나나 다 못 살 때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상은 지금도 변함없으니,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가해자를 보자면, 있는 자가 아니라 없는 자보다는 아주 조금을 더 가진 그 주위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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