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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창(公娼) 신흥동 부도여곽과 숭의동 옐로하우스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7. 1. 20:20

     

    이번에는 배다리를 지나 신흥동 신흥시장 쪽으로 가보았다. 일본인이 만든 인천 옛 공창(公娼) 부도유곽(敷島遊郭, 시키시마 유가쿠)의 흔적을 찾아서이다. 배다리에서 신흥시장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다리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세인빌라 골목으로 들어가는 편이 가장 빠른데, 그 골목을 지나다 보면 아래와 같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와 조우하게 된다.  

     

     

     

    신흥시장은 1961년 인천시에서 선화동 1-49번지에 개설한 시장으로, 그전에는 이 일대에 일본인들이 개설한 공창(公娼) 개념의 윤락가가 있었다. 공창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단어이지만 흔히 사창가라 부르는 사창(私娼)의 개념은 익숙하다. 공창과 사창은 국가나 공공단체가 행하는 관리의 힘이 미치는가(보건 위생 세금 등)의 유무에 따라 구별이 되는 것이지만,* 공공연히 내놓고 장사하면 공창,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장사하면 사창이라 부르는 게 일반적 통념이다. 

     

    * 국가나 공공단체의 관리는 이미 공창을 인정했다는 것으로서 일본의 공창제도는 도쿠가와 막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쿠가와 막부는 1617년 도시 외곽에 유곽을 두고 그곳에서만 매춘이 가능하도록 제한하였으며, 수익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지금은 흔적이 모두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신흥시장 일대에는 유곽이 즐비했다. 1902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일본인 유곽은 부도루(敷島樓)가 대표적인 업소였던 까닭에 일대는 '부도정'(敷島町), 즉 '시키시마초'로 불렸다. 원래 일본인들의 유흥술집들은 앞서 말한 데라마찌(寺町)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부근에 있었는데, 이곳에 인천신사가 생기고 늘어난 주택가에 밀접함에 따라 한 블록 건너인 신흥동 쪽으로 옮겨와 자리하게 된 것이었다. (☞ '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던 인천신사/문화주택이 있던 긴담모퉁이와 리키타케 별장')

     

    시키시마초에는 부도루 외에 입선상반루, 환산루, 송산루, 일력루 등 총 9개의 요정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술을 마시려면 하룻밤에 적어도 쌀 한가마니 값은 치러야 했다. 여기서는 오직 돈으로만 대접받았고 일본인, 한국인의 차별도 없었다. 요정만 들어 선 것이 아니라 순수한 요릿집, 저렴한 방석집, 단지 매춘만을 목적으로 한 집창촌도 생겨났다. 요정의 여자는 게이샤(妓生)로 불렸고 집창촌 여성은 죠로(女郞)라 불렀다. 게이샤는 웃음과 술을 팔았고 죠로는 몸을 팔았다. 1903년 초창기에도 이곳의 유흥업소는 모두 합쳐 40곳, 종사자들은 130여 명에 이르렀다. 

     

     

    1991년의 신흥시장 사진 / 사진 속 신흥파출소 골목길에 과거 부도유곽이 있었다. (인천일보 사진)
    옛 부도유곽의 위치
    일제강점기의 부도유곽
    위의 사진보다 조금 늦은 시기로 보이는 부도유곽의 전경
    위는 신흥신장 일대의 사진으로 부도유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인천시립박물관 마당의 '부도 일력루 헌납비'
    설명문에는 일제강점기 시키시마초에 있던 일력루에 데라마찌 편조사가 시주를 한 기둥으로 되어 있다. 불교사찰인 편조사가 왜 요정에 '부도 일력루'의 이름을 새겨 시주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시 공창이나 사창을 경험하지 못했던 한국인에 있어 대낮에도 공공연히 매춘 행위가 벌어지는 부도유곽은 커다란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문화는 한국인의 정신을 피폐하게도 하였으니, 유곽의 한 여자를 두고 형제끼리 칼부림이 일었고 친구를 칼로 찌르기도 했다. 또한 부도유곽의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절도와 강도사건도 횡횡하였던 바, 인천은 앞서 '인천 용동 권번 골목 - 일제시대의 선물 투기열풍과 맞물렸던 해어화(解語花)의 영화(榮華)'에서 말한 미두장 투기와 더불어 미친 도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시키시마초에서는 누구든 돈만 있으면 원하는 여자와 놀 수 있으며 황제가 될 수 있었다.  1924년 4월 동아일보 기사에선 '지난달 부도정 유곽에 난봉꾼들이 뿌린 돈이 조선인 900여 명 3000여 원이고, 일본인 1000여 명 1만6000원이라'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쌀 중급미 한 가마니가 4원50전, 앞서 말한 인촌성냥공장 한국인 여공의 일당이 60전이던 시절이었다. 이 기사는 니키시마초가 얼마나 은성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관청에서는 유곽의 일본인 여자는 일주일에 두 번, 한국인은 일주일에 한 번 성병 검사를 실시했는데, 이는 한국인을 차별해서가 아니라 일본여자가 훨씬 손님을 맞는 횟수가 많았던 까닭이다. 

     

    해방 후에도 이름만 선화동(仙花洞)으로 바뀌었을 뿐 부도유곽은 여전히 성업했다. 이에 미군정은 이를 없애기로 결정하고 1948년 2월 공창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지금부터 부도유곽의 영업은 법에 어긋나니 단속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경기도 보건후생국은 부도유곽 여성들에게 재생의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 희망자 180명에게 진로 조사를 했는데, 공장취업 40명, 화류계 잔류 32명, 종교계 출가 12명, 본인 집으로의 귀가 12명, 미정 23명 등의 결과가 나왔다.

     

    더불어 보건후생국은 이들에게 성병 등의 건강검진을 하였고 성병에 감염된 여성 80명을 도립병원 인천화류병 치료소에 1개월간 강제로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다. 당국은 이들을 위해 입원비 38만9500원(식대 포함)과 교화비 명목의 월비(月費) 22만4000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나아가 위원회를 설립하여 실질적인 도움의 길을 열었으니 대상 여성에게 가정주부로 갱생할 수 있는 단기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였고, 음식점 등으로의 취업도 알선하였던 바, 당시의 행정으로는 괄목할만한 노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도유곽 집창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울 미아리 집창촌이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을 보면 제도적 계도의 한계를 실감케 한다) 이에 5.16 후 박정희 군사정권이 집권하고부터는 기존의 퇴폐 분위기 일신의 일환으로 유곽을 강제 철거하고 시장을 개설했는데, 그렇다고 일대가 정화된 것도 아니었으니, 1960~70년대까지 신흥시장 일대는 젓가락을 두드리는 니나노집부터 1종 유흥주점까지 밀집된 거대한 환락가가 번성했다.

     

    다만 일대의 집창촌은 지속적인 단속에 쫓겨 독갑다리, 학익동, 숭의동 쪽으로 옮겨갔다. 숭의동으로 밀려간 사람들은 그곳의 낡은 집을 사 매춘굴로 꾸몄는데, 마침 월미도 미군부대의 창고를 칠하다 남은 메이드 인 USA 옐로우 페인트의 재고가 넘쳐나 환경미화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후 그 동네는 옐로하우스로 불리며 서울 영등포와 미아리, 부산 완월동과 더불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옐로하우스는 이후로도 60년이 지난 2020년에 이르러서야  폐쇄되었다. 

     

     

    60년대 초의 숭의동 엘로하우스 풍경
    신흥시장에서 숭의동으로 가는 대로변에서 본 멀지 않은 과거
    옛 옐로하우스 동네에 남아 있는 구시대의 유산
    "폐쇄 예정 말뿐 성매매 단속도 없어 만취한 외국인 무리까지 가세, 거리 북적" / 옐로하우스에 대한 2016.07.11 <기호일보>의 기사
    "인천의 마지막 성매매지역 옐로하우스 연내 폐쇄"라는 제목의 사진 / <한겨레신문> 2018.03.20
    인천 성매매 집장촌인 일명 옐로우하우스가 철거를 완료하면서 60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 일대는 본격적인 아파트 건설 사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 <헤럴드경제> 2020.06.04 기사
    옐로하우스는 이제는 정말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옛 옐로하우스 자리에는 지상 47층 아파트 748 세대와 오피스텔 264 세대 등 총 1012 세대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건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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