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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신흥동에 남은 이토 히로부미의 흔적?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7. 3. 17:48

     

    옛 부도여곽의 입구가 보이는 신흥시장 사거리에서 서쪽(바닷가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옛 남인천역, 즉 수인역이 있던 곳이다. 그 수인역에서 대해서는 이미 '수인선 협궤열차 추억 여행 I'에서 탈탈 털어 더 이상 설명할 것은 없고, 다만 앞서 싣지 못했던 남인천역의 사진을 올려본다.

     

     

    신흥사거리 신흥시장 입구
    신흥시장 입구, 옛 부도여곽이 있던 곳
    옛 부도여곽의 위치 (인천일보 자료)
    수인역에 들어오는 협궤열차 기관차 / 1953년 돈 로스가 찍은 사진이다.
    수인사거리 / 옛 수인역은 사라지고 수인사거리라는 지명만 남았다.
    옛 수인역 부근의 곡물창고
    수인곡물시장 입구 옛 수인역이 있던 곳 / 오른쪽 공사현장 내
    옛 수인역 주변의 곡물 노점상 / 광복 후 신흥동이란 이름을 얻은 수인역 주변은 이름처럼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고 마을이 형성돼 북적였다. 수원, 군자, 소래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이 키운 닭이며 각종 곡식을 이고 지고 하며 좌판을 벌여 역전에 큰 장이 섰다. 수인곡물시장의 시작이다. (오마이뉴스의 사진과 글)
    근방의 유명한 수인복집 / CJ공장 굴뚝이 보인다.
    CJ 제일제당 인천1공장
    부근 한전건물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

     

    수인사거리에서 한 블록을 이동해 다시 신흥동으로 와 보았다. 앞서  '인천 동본원사와 서본원사 & 신흥동 정미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흥동은 과거 가토(加藤) 정미소외 리키다케(力武) 정미소를 비롯한 대형 정미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창출된 넉넉한 주머니를 노린 수명루(水明樓)와 명월루(明月樓) 같은 고급 요정이 들어섰으니, 특히 수명루는 '인천 제일루'라 불릴 정도로 풍광 빼어난 곳에 자리한 최고급 요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리키다케 정미소 굴뚝
    가토정미소가 있었던 경남아너스빌 아파트단지
    카토정미소의 쌀포대

     

    또 당시는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던 인천신사/문화주택이 있던 긴담모퉁이와 리키타케 별장'에서 말한 것처럼 데라마찌(寺町)에 인천신사가 세워질 무렵이기도 했으니, 그 무렵의 신흥동은 종교시설물인 신사와 절,(동본원사, 서본원사, 묘각사, 인천사, 화엄사, 편조사, 명조사) 그리고 요정이 뒤엉킨 요상한 형태의 동네였다. 일본인들은 신사와 공원(인천항 공원에 비견해 동공원이라 불렀다)이 있는 쪽을 데라마찌와 구별해 미야마찌(宮町)이라 부르긴 했으되, 그와 같은 이질적 시설물들이 분리해 존재해야 된다는 개념은 특별히 없는 듯했다. 

     

     

    인천 동공원 내의 인천신사 입구
    인천신사
    인천신사가 있던 인천여자상업학교 교사
    인천여자상업학교 내의 인천신사 흔적
    송도중학교 부지에 자리했던 정토종 인천사의 1907년 사진
    인천사, 혹은 서본원사 것으로 보이는 송도중학교 내의 흔적
    화엄사(현 해광사) 입구 계단의 기둥돌 / 좌우 기둥돌 중 좌측의 것만 묻힌 채로 발견되었다.

     

    요정 수명루는 인천신사 바로 옆에 있었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어쨌든 수명루는 전망 좋은 자리에 위치했다. 앞서도 말했듯 당시는 지금 인천여자상업학교 교사가 서 있는 절벽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1892년 당시 시인이자 조선신보사 기자였던 아오야마 고헤이(靑山好惠)는 "제물포의 빼어난 풍경은 일본(동)공원에 있고, 일본(동)공원의 기묘함은 수명루에 모여 있다"고 찬미한 내용이  '인천사정(仁川事情)'이라는 글 속에 전한다.

     

    수명루는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후 야사카루(八阪樓)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즈음하여 명월루를 통합하여 규모를 키웠다. 야사카루 대형 연회장을 갖추고 있었던 바, 인천에 입항하는 일본 함대의 환영연회를 독점하였으며,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즐겨 찾았다는 얘기가 있다. 야사카루는 일제강점기에 주인이 바뀌며 동음이의의 야사카루(한자로 矢阪樓로서 발음이 같다)로 재개업하였는데, 미야마찌의 대부분의 술집들이 길 건너 시키시마초(敷島町)로 옮겨갈 때도 원조 요정답게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해방될 때까지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번에 다시 신흥동을 돌아보다 당시의 유물로써 짐작되는 (그러나 확신은 할 수 없는) 것들을 찾았던 바, 사진과 함께 나름대로의 해석을 올려본다. 

     

     

    당시의 신흥동 미야마찌 도오리 / 대단히 번화하다.
    청일전쟁 당시 인천항에 상륙한 일본군
    제물량로 98번가 부근의 '지계담(地界譚)' 표석
    '지계담'은 경계를 표시하는 표석이다. 譚은 談과 동자(同字)로서 바둑에서의 흑과 백과 같은 명백한 경계를 뜻한다. 글자의 운용으로 볼 때 당시 근방에서 대규모 양배추 밭을 운영하던 화상(華商) 동순태가 야금야금 지경을 침범하는 일본들을 겨냥해 세운 경계석으로 보인다.
    제물량로 108번가 부근의 처마 빗물받이 돌
    '十月'이라고 거꾸로 쓰여 있는 글을 볼 수 있다. 인근 사찰의 기념물이었던 돌이 요정 등 고급저택의 처마 빗물받이 돌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날짜가 새겨진 돌은 인근 해광사 입구 기둥에서도 확인된다.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사진 / 개인적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고 여자를 좋아해 한국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다.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 (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는 호색한다운 자작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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