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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신흥동에 남은 이토 히로부미의 흔적?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7. 3. 17:48
옛 부도여곽의 입구가 보이는 신흥시장 사거리에서 서쪽(바닷가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옛 남인천역, 즉 수인역이 있던 곳이다. 그 수인역에서 대해서는 이미 '수인선 협궤열차 추억 여행 I'에서 탈탈 털어 더 이상 설명할 것은 없고, 다만 앞서 싣지 못했던 남인천역의 사진을 올려본다.
수인사거리에서 한 블록을 이동해 다시 신흥동으로 와 보았다. 앞서 '인천 동본원사와 서본원사 & 신흥동 정미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흥동은 과거 가토(加藤) 정미소외 리키다케(力武) 정미소를 비롯한 대형 정미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창출된 넉넉한 주머니를 노린 수명루(水明樓)와 명월루(明月樓) 같은 고급 요정이 들어섰으니, 특히 수명루는 '인천 제일루'라 불릴 정도로 풍광 빼어난 곳에 자리한 최고급 요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당시는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던 인천신사/문화주택이 있던 긴담모퉁이와 리키타케 별장'에서 말한 것처럼 데라마찌(寺町)에 인천신사가 세워질 무렵이기도 했으니, 그 무렵의 신흥동은 종교시설물인 신사와 절,(동본원사, 서본원사, 묘각사, 인천사, 화엄사, 편조사, 명조사) 그리고 요정이 뒤엉킨 요상한 형태의 동네였다. 일본인들은 신사와 공원(인천항 공원에 비견해 동공원이라 불렀다)이 있는 쪽을 데라마찌와 구별해 미야마찌(宮町)이라 부르긴 했으되, 그와 같은 이질적 시설물들이 분리해 존재해야 된다는 개념은 특별히 없는 듯했다.
요정 수명루는 인천신사 바로 옆에 있었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어쨌든 수명루는 전망 좋은 자리에 위치했다. 앞서도 말했듯 당시는 지금 인천여자상업학교 교사가 서 있는 절벽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1892년 당시 시인이자 조선신보사 기자였던 아오야마 고헤이(靑山好惠)는 "제물포의 빼어난 풍경은 일본(동)공원에 있고, 일본(동)공원의 기묘함은 수명루에 모여 있다"고 찬미한 내용이 '인천사정(仁川事情)'이라는 글 속에 전한다.
수명루는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후 야사카루(八阪樓)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즈음하여 명월루를 통합하여 규모를 키웠다. 야사카루는 대형 연회장을 갖추고 있었던 바, 인천에 입항하는 일본 함대의 환영연회를 독점하였으며,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즐겨 찾았다는 얘기가 있다. 야사카루는 일제강점기에 주인이 바뀌며 동음이의의 야사카루(한자로 矢阪樓로서 발음이 같다)로 재개업하였는데, 미야마찌의 대부분의 술집들이 길 건너 시키시마초(敷島町)로 옮겨갈 때도 원조 요정답게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해방될 때까지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번에 다시 신흥동을 돌아보다 당시의 유물로써 짐작되는 (그러나 확신은 할 수 없는) 것들을 찾았던 바, 사진과 함께 나름대로의 해석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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