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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국영사관과 최초 해관을 찾아서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7. 5. 23:55
앞서도 말했거니와 1882년 우리나라와 미국 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장소가 확인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2013년의 일이다. 그전에는 선교사 존스 목사의 서술 기록을 근거로 병영(兵營)인 화도진을 유력한 장소로 여겨 19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전권대사로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이 1886년 아펜젤러 목사에게 서술한 장소, 즉 해관(세관) 관리관 사택 부근에 천막을 치고 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는 바로 그 장소가 쓰여 있는 지도가 2013년 발견됨으로써 그 새로운 장소에 표석이 세워지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오류가 시정된 것은 매우 잘 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개항기의 많은 장소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데, 의외로 초기 해관마저 엉뚱한 곳에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것도 오류라고 생각해 초기 해관의 위치를 찾아 나섰지만, 중도에 오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표석에 쓰여 있는 내용에 '이전'이라는 단어가 쓰였기 때문인데, 다만 내용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표석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83년 6월 16일 이곳에서 우리나라 관세업무가 처음 시작되었다. 조선 정부는 독일인 묄렌도르프(P.G. von Mὃllendorff)를 고용하여 관세업무를 총괄, 인천해관에는 스트리플링(A. B. Stripling)이 부임했다. 인천역 부근에 있던 임시 부두에 가건물을 짓고 업무를 시작, 항구 시설물이 준공되자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내친 발걸음이라 계속 걸었다. 이왕 나섰으니 뭔가 결론을 내리고 싶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883년 6월 우리나라 관세업무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알려진 아래 사진 속 해관의 위치를 찾아야 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영국영사관 건물부터 찾아야 할 듯싶었다. 이 사진을 포함해 최초 인천 해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몇 장의 사진에 함께 찍혀 있는 건물이 영국영사관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그 건물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찾기에 용이했다.
그전에 지금 표석이 설치돼 있는 해관 위치가 왜 잘못된 것인지 사진을 통해 살펴보자. 아래 사진은 1887년 이후 촬영된 해관의 사진으로 가장 꼭대기에 있는 건물이 영국영사관이다. 그리고 맨 아래 지게를 진 사람 외 여러 명의 모습이 보이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배의 물건을 하역하는 광경임을 알 수 있다. 즉 당시에는 바닷물이 해관 바로 앞까지 들어왔던 것으로, 이 사진은 배 안에서 육지를 찍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 사진을 보면 묄렌도로프가 세운 그 첫 해관의 위치는 표석의 위치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애초의 생각대로 1883년 세워진 영국영사관 건물을 찾아 발길을 옮겨보았다. 그 출발점은 우리가 열차로 인천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상봉하게 되는 인천역 광장으로 잡았다. 그곳 광장에는 아래와 같은 돌과 동판의 표지판이 눈에 확 띌 정도로 큼직하게 노면에 설치돼 있다. 돌에는 「1883 개항장 근대역사문화회랑」이라고 쓰여 있고, 화살표로 「차이나타운」과 「영국영사관 터」를 알리고 있다. 과연 화살표 방향으로 가면 옛 영국영사관 터를 만날 수 있을까?
인천역 바로 옆 월미 바다열차 탑승장을 지나 그 왼쪽, 옛 러시아영사관이 있던 길을 따라 걸어가 보았다. (러시아영사관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설명할 예정이다) 중구 선린동 56-2에 위치했던 옛 러시아대사관 자리에 들어선 29층 초고층 오피스텔은 현재 '파격분양' 중이다. (경관 보존을 위해 고층건물을 안 올리기로 한 것 같은데 결국은 공염불로 끝나고 말았다) 그곳을 지나면 줄 지어선 오래된 그물가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물가게가 끝나는 곳에 기념탑 교회가 위치한다.
앞서 '알렌보다 먼저 상륙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념탑 교회는 1885년에 입국한 언드우드와 아펜젤러보다도, 그리고 1884년 9월에 입국한 호러스 알렌보다도 먼저 들어온 미국감리교회 선교사 로버트 맥클레이의 인천 상륙을 기려 세운 교회로서, 교회 내부에는 인천 교회사를 연구하던 박철호 목사가 2008년 발견한 개항 초기의 (일대가 매립되기 전의) 바위가 있다. 발견 당시 이 바위는 민가 안에 있었는데 박철호 목사는 일대의 지형이 항구 옛 사진의 모습과 일치함을 인지하고 민가를 매입해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 일대를 사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는 이곳은 해망산이 있던 곳으로, 영국영사관과 해관의 위치를 짐작케 해 준다. 현재 아무 표식도 없지만 영국영사관은 올림포스 호텔 자리에 있었다. (올림포스 호텔은 2020년 영업을 중지해 지금은 비어 있으며 부지 출입이 불가능하다) 아래의 사진은 해망산 위에 영국영사관이 있었음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아래의 사진은 영국영사관이 기존의 자리에 새로 건립됐을 때의 모습으로, 위치는 예전의 자리보다 높은 곳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응봉산 꼭대기에는 존스턴 별장이 있으며 (영국상인 제임스 존스턴의 여름별장으로 1903년 착공되어 1905년 완공되었다) 해관 건물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적어도 1907년 이후의 것이다.*
* 해관은 1907년 전후 한중문화관 앞바다 쪽으로 옮겨 2층 목조건물을 지어 사용하다가 이후 1911년과 1926년, 다시 두 번을 이관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청사 건물은 1926년 3월 인천항 제1부두 쪽으로 이전한 후의 것으로 인천항의 랜드마크로서 유명했으나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다. (맨 아래 사진)
이상을 종합해보면 최초의 세관 건물의 위치는 기념탑 교회 오른 쪽에 있는 기운로프와 동방식당이 있는 자리가 되겠고, 좌측에 있는 건재상 이구상사는 검사소가 있던 장소가 되겠다. 기운로프와 동방식당 건물 바로 맞은편에는 한국기독교단체에서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역사적인 첫발을 디디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상륙을 기념해 세운 모뉴먼트가 있다. 조형된 인물은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 닷지까지 세 사람이다. 필시 그 세 사람도 해관에서 입국신고를 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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