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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류백제, 경인운하 & 인천 용현동 트릭아트 계곡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7. 4. 17:49

     

    인천광역시 미추홀구(彌鄒忽區)는 남구(南區)에서 변경된 이름이다. 2018년 7월부로 바뀌어진 이름으로, 뉴스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대번에 '참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사안일과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대표되는 공직사회에서 그래도 누군가는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기분 좋은 느낌도 받았다. 오랜 행정구역의 명칭을 변경하는 일이니 나름 반대도 많았을 텐데 멋지게 개명을 이루어낸 것이다.  

    미추홀구로의 개명은 물어보나 마나 그 역사성에 기인했다. 미추홀구는 문헌에 나타나는 인천 최초의 지명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시조 온조왕 즉위년조에 따르면, 고구려 추모왕이 유리를 태자로 세우자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유리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많은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후 한강변에 이르러 이주민은 두 패로 나눠지니 비류는 한패를 끌고 바닷가 마을인 미추홀로 갔다.

     

     

    피겨로 재현된 비류 온조 일행의 이주 광경 / 한성백제박물관

     

    하지만 비류는 곧 패착을 깨닫는다. 미추홀은 습기가 많고 물이 매우 짜 사람 살기가 힘든 땅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류는 다시 하남(河南) 위례성으로 돌아갔는데, 가서 보니 동생 온조가 도읍을 정하고 백성과 편히 살고 있었다. 비류는 자신의 판단 미스로 백성들을 힘들게 만든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살하고, 신하와 백성은 하남 위례성에서 다시 합쳐지니 온조는 백성들이 돌아옴을 기뻐하여 나라의 이름을 보다 큰 의미의 백제로 고쳤다.

     

    <삼국사기> 속 비류가 정착을 시도했던 미추홀은 지금의 인주(仁州)라는 기록이 있어 미추홀이 곧 인천임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후 미추홀은 매소홀(買召忽)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남하의 영향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백제 때의 지명인 미추홀과 고구려 때의 지명인 매소홀은 같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 해석하는데, '미'와 '매'를 물(水)로, '홀'을 고을(邑)로 풀이하여 바다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아무튼 미추홀이나 매소홀이 지금의 인천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매소홀'과 '매소홀수'명 기와편 / 인천시립박물관

     

     <삼국사기> 이하 역사적으로 해석되는 미추홀의 물은 '짠 물' 곧 바닷물이다. 인천은 바다를 끼고 있는 천혜의 도시이지만 다른 대도시들과 달리 큰 하천이 없다. 부평 삼산4지구부터 계양 귤현보까지의 굴포천이 인천의 하천 중에서 가장 큰 물줄기이나 20㎞정도에 불과한 작은 하천이다. 그래서 이것이 늘 아쉬우니, 만일 주변에 이렇다 할 하천이 있었다면 한강 수계와 연결되는 경인운하가 진작에 만들어졌을 터이고 인천의 발전은 보다 빨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되면 조운로가 변경되어 멀리 강화도 수로를 경유해 올라왔다 다시 한강 수계로 나아가야 하는 수고와 불편함이 사라졌을 터, 필시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그와 같은 운하의 필요성은 진작부터 요구되었으니, 고려시대 최충헌의 아들 최이는 물살 급한 강화 손돌목을 피해 한강 수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천시 서구 가좌동 부근 해안에서 원통현(원통이 고개)과 굴포천을 거쳐 한강과 연결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건설을 시도했지만, 원통현 400m 구간의 암석층을 뚫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조선 중종  때  김안로가 다시 경인운하의 건설을 시도했으나 곧바로 계양산 한남정맥 구간의 암반에 가로막혀 실패로 끝났다. 이에 결국 경인운하는 21세기 들어서야 완공되었으니, 개인적으로는 이 경인운하의 대역사(大役事)를 수에즈 운하 건설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저 고대 이집트왕국의  람세스 2세(재위 BC 1279~1213)가 거듭해서 실패한 수에즈 운하는 정확히 3000년이 지난 1869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기술진에 의해 개통되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와 달리 대역사 끝에 완공한 경인운하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2012년 5월 25일 이명박 정부에 의해 완공된 경인운하는 늦어도 너무 늦었던 바, 운하가 개통되었을 때는 다른 대체 교통수단이 충분했던지라 물동량이 기대에 크게 미달했다.(예상 물동량의 10%에도 못 미침) 그리하여 사실상 운하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단지 운하변에 편도 18.2㎞ 길이로 조성된 자전거길만이 자전거라이더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 길은 '(2조원을 들여 만든)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전거도로'라고도 불린다. 

     

    그 자건거도로의 정식 명칭은'아라바람길'이고, 경인운하의 정식 명칭은 '아라뱃길'이다. 아라가 무슨 뜻인가 했더니 바다의 순수한 우리말이란다. 이에 항의가 쏟아졌다. 바다 자체가 순수한 우리말인데 아라는 또 뭐냐는 것으로 근거를 따져 물었다. 그러자 아리랑의 구절인 '아라리요'에서 따온 말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지명 자체도 요지경인 경인 아라뱃길이 아닐 수 없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이 아라뱃길 구간에서는 수많은 변사체가 발견되어 '아라괴담'까지 만들어졌는데, 최근 발견은 2022년 8월의 남성 시신으로, 이후 아라뱃길은 MBC 심야괴담회라는 프로그램에 오르기도 했다.  

     

     

    과거의 조운로와 경인운하 개요
    2012년 개통된 아라뱃길
    아래뱃길 풍경 / 인천관광공사 사진

     

    하천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우선 수원지가 있어야 한다. 여러 수원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실개천을 이루고 이런 실개천들이 합쳐져 강다운 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천에서는 이러다 할 수원지가 없으며 따라서 계곡으로 불릴 만한 곳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인 2020년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 멋들어진 도심 계곡이 만들어졌다. 용현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수봉남로12번길 일대 골목에 트릭아트 등으로서 ‘골목 계곡길’을 조성한 것이다. 일단 그림을 보자면 아래와 같다. 

     

     

    계곡이 시작되는 용현동 수봉남로 길 / 계곡길 그림보다 먼저 통일된 지붕의 스카이라인이 눈에 와 닿는다.
    계곡의 하류물은 아직은 잔잔하다.
    계곡 위로 올라갈수록 물살이 급해지다,
    이쯤에서는 아예 쏟아져 내린다.
    사실은 이렇게 봐야 제격이다. (미디어인천신문 사진)
    이곳 주민께서는 반대를 하셨는지 바로 위 골목에서는 계곡이 사라졌다. 위 수봉산 입구까지 그림이 연결되었으면 좋았을 법했다.
    그러면 저 계단에서 폭포수가 떨어져 내렸을 텐데.....

     
    1개월 동안 주민 참여 속에 만들어진 골목 계곡길은 마을 골목 특성화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했고 골목바닥 트릭아트, 담장 디자인벽화와 화단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바닥은 그림이고 화단은 진짜인데, 어느 것이 실사고 허구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경사가 있는 골목 바닥은 미끄럼 방지 시공을 하고 트릭아트 형식으로 계곡을 조성해 실제 계곡에 와 있는 듯한 시원한 느낌을 살렸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러하다. 비 오는 날 오면 이 계곡길은 더욱 실감 날 것 같으니, 미끄러짐과 빠짐을 걱정해야 하고 담벼락에 그려진 수목들은 강한 피톤치드 향을 뿜을 것만 같다.

     

     

    그릴이 사라진 아쉬움에 올라온 골목을 내려다본다.
    그래도 지붕의 스카이라인은 여전히 뇌쇄적이다.
    수봉산 위에는 실향민을 위한 망배단이 건립되었고 주변은 길고양이들의 천국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침입자의 발길에 깨어 째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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