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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물포해전,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과 러시아영사관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7. 7. 01:18

     

    구한말 러시아는 기실 일본보다 더 간절히 인천의 패권을 원했다. 1898년 중국의 여순(旅順)과 대련(租借)을 조차한 마당이었으니 인천을 손에 넣는다면 서해의 반을 먹은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팔미도에 진을 쳤다. 러시아 함대가 인천항에 직접 들이대지 못한 것은 1861년 일본의 쓰시마섬(對馬島)을 점령했다가 영국의 간섭을 부른 탓이었으니,* 이에 대한 반면교사로서 인천항에 직접 배를 대지 않고 팔미도 근방에서 얼쩡거렸던 것이다. 
     
    * 러시아의 쓰시마 점령에 대해 잠시 피력하자면, 1861년 2월 3일 러시아 군함 포사드니크호(號)가 대마도 번주(藩主) 소 요시요리(宗義和)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선체 수리를 이유로 무단 상륙을 감행했다. 그리고 제멋대로 막사를 지어 장기 주둔에 들어갔는데 일본 막부는 러시아 정부에 항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 중이던 영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영국 동양함대 군함 2척이 쓰시마로 출동해 무력시위에 나서자 8월 15일 비로소 퇴거하였다.  

     
     

    대련이 러시아 조차지일 때의 풍경 / 대련은 중국 요동반도 남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로 1898년에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조차해 달리니(Dalnii)라 이름 지었다.
    대련에 남은 당시의 러시아풍 건물
    여순과 대련의 위치 / 1904년 러일전쟁은 일본함대의 여순항 공격으로 시작되는데, 그에 앞서 제물포해전이 서막을 연다.
    러일전쟁 전 러시아가 조차했던 요동반도 남단 지역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힘을 기른 일본은 제국주의 특급열차의 막차를 탔다. 그리고 자신도 서구 열강들을 흉내 낸 패권주의를 실현하기 시작하였으니 1894~1895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0년 후 초강대국 러시아와 맞짱을 떴다. 그리하여 1904~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세기의 대전은 1904년 2월 8일 저녁, 10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일본군 연합함대가 여순항의 러시아 전함 레트비잔과 방호순양함 팔라다를 공격함으로써 막이 올랐다.
     

    1. 제물포 해전의 시작 

     
    그런데 그에 앞서 1904년 2월 8일 정오 무렵, 인천 앞바다 팔미도 해상에서 서전이 펼쳐졌다. 여순항으로 가던 일본 연합함대 군함 중 아사마호(淺間號)를 비롯한 5척의 배가 전열을 벗어나 팔미도의 러시아 함선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었다. 여순항 공격에 앞서 배후의 적을 제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아사마호와 나니와호를 비롯한 일본 군함은 팔미도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호(號)와 포함(砲艦) 코레이츠호를 포위하고 기습 포격을 가했다.
     
    선전포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러시아 해군은 큰 혼란에 빠졌으나 전열을 정비해 반격에 나섰다. 곧 바랴그호, 코레이츠호에서도 포격이 시작되어 팔미도 바다에서는 양군 간의 일대 교전이 벌어졌다. 

     
     

            제물포 해전의 개전 상황

    기습공격을 당한 바랴그호와 코레이츠호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호

    일본 전함 아사마(淺間)호
    나니와(浪速)호

     

    2. 교전 상황

     

    일본함대에 포위되어 집중포화를 맞은 바랴그호의 루든예프 함장은 일단 팔미도를 벗어나 공해로 진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바다 가운데로 나섰으나 나니와함의 우라와 제독은 아사마함에게 추격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곧 아사마함에서 발사한 포탄이 바랴그호에 명중하며 자동항해장치를 박살냈다. 이에 바랴그호는 수동조정에 매달리게 되어 기동력이 저하됐고, 가뜩이나 부족했던 포사격 인원이 줄며 제대로 된 반격에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자 바랴그호를 뒤따르던 포함 코레이츠호가 지원 포격에 나섰던 바, 2문의 203mm 대포, 1문의 52mm포, 4문의 37mm포가 불을 뿜었다. 훗날 일본해군은 인천충해전(仁川沖海戰, 일본이 제물포해전을 부르는 말)에서 적의 포탄에 일발도 맞지 않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측 기록은 다르니, 바랴그호는 전사자 34명(중상자 중 치료과정에 사망한 12명 포함), 경상자 105명, 중상자 91명 등 총 229명의 인명피해를 당했고, 일본함대는 전사자 30명, 부상자 200명 등 총 23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당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하지만 반격하던 코레이츠호도 곧 뒤따라온 일본 함선들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고, 즈음하여 아사마 호에서 쏜 포탄이 루든예프 함장의 지휘부가 있는 바랴그호의 돛대 쪽을 강타하며 싸움의 추가 급속히 기울었다. 이때 함장 옆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나팔수와 고수(鼓手)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루든예프는 치명상을 입어 사실상 지휘가 불가능해진 것인데, 비슷한 시각 코레이츠호에도 포탄이 명중되었다. 이상의 사실은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해군 파스칼함의 세네스 함장의 회고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공해상으로 나가는 바랴그호와 뒤따르는 코레이츠호
    공격당하는 바랴그호
    포탄에 맞은 코레이츠호(왼쪽) / 가운데 바랴그호는 이미 기울었다.

     

    계속적인 포격을 받은 바랴그호는 결국 함정 곳곳에 구멍이 나며 침수하기 시작했다. 전투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루든예프 함장은 후퇴를 명령했다. 루든예프 훗날 사령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후퇴 결정은 함정의 파손 부분을 급히 보수하고 부상자 대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으며, 16시까지 다시 출항해 해전을 계속할 각오였다"고 밝혔다. 바랴그호와 코레이츠호가 퇴각한 시각은 오후 12시 45분, 전투개시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바랴그호와 코레이츠호가 소월미도를 지나 중립항인 제물포 내항으로 들어서자, 외국 함대의 개입을 우려한 일본함대는 포격을 중단하고 배를 멈춰 세웠다. 일본측 해전기록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랴그
    함의 갑판은 피바다였으며 사방에 시체와 사지가 찢어져 널려 있고 함정은 어느 곳 한 군데도 파손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포탄을 맞은 곳마다 불에 타 있었으며 철판은 구멍이 나고 환풍기는 부서져 있었다. 선실과 침대는 화기로 뜨거웠고 포탄을 맞은 함교는 벌집이 되어 매달려 있었다. 후미에서는 하염없이 연기가 피어올랐고 함정은 점점 왼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일본측에서 말한 상황
    재기불능 상태의 바랴그호

     

    3. 제물포 해전의 종전 상황

     

    더 이상 전투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든예프 함장은 장교들과의 협의하에 배를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에 전함 자체를 비롯한 일체의 전리품을 주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다. 루든예프 함장은 이를 제물포항에 정박 중인 다른 외국 군함에게 알렸고, 외국 군함의 지휘관들은 러시아군 부상자와 생존자들을 자신들의 함정에 승선시켜 구조하기 위해  보트를 내려 바랴크호와 코레이츠호로 접근해왔다.
     
    이때 제물포항에 있던 영국 함선의 함장 베일리 대령은 주위에 정박 중인 외국함에 파편이 튈 것을 염려해 급수용판을 열어 자침시키는 방안을 권했고, 이를 따른 바랴그호는 수십 명의 전사자들과 함께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약 40분 후 최신예 순양함 바랴크호는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코레이츠호는 바랴그호만큼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일본 군함에 둘러싸여 제물포항을 빠져나가기는 힘들었다. 이에 코레이호 역시 일본에 배를 넘겨주지 않기 위한 자폭을 선택했다. 외국 선박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약간 먼 곳으로 나간 코레이츠호는 배의 폭탄을 한데 모아 자폭했다. 그리고 이때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여객선 순가리호도 사주(社主)인 동청철도 제물포 지사장과의 합의하에 불을 질러 자침시켰다. 

     
    "러시아 군함은 11시45분부터 30분 동안 집중포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고, 제물포 항으로 퇴각한 후 '황색 난쟁이'에게 선체를 넘겨주기를 거부하고 자폭 침몰했다." <오페라의 유령>의 작가 가스통 르루가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물포 해전을 목격하고 쓴 글이다.  
     
    침몰한 러시아 군함 바랴그호와 코레이츠호는 이후 일본에 의해 인양되어 수리 후 연습함으로 사용되었고, 코레이츠호는 민간인에게 무상으로 불하되어 조각조각 고철로 판매되었는데, 이 가운데 몇 가지가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자폭하는 코레이츠호
    불타는 코레이츠호
    자침된 순가리호
    인천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러시아 수병들
    러시아 수병들이 치료받았던 중구 내동 성공회 병원
    병원 건물의 명판에 "1904년 이 자리에서 진료를 받았던 순양함 '바랴그 호'와 포함 '코레에츠 호' 러시아 선원들을 추념하며 감사드리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2004년 2월 11일"이라는 내용의 글이 러시아어, 한글,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작년 4월 우크라이나 전쟁 중 흑해에서 모스크바호가 침몰되는 이 사진이 공개되며 러일전쟁이 소환되기도 했다.
    자침해 가라앉은 바랴그호를
    일본이 인양해 요코스카항의 구경거리로 삼았다. 배에 어마어마하게 탔음에도 보트로부터 구경꾼이 계속 오르고 있다.
    일본이 전리품으로 거둔 바랴그호의 포탄
    '러시아함 바랴그호 전리품'이라고 새겼다.
    러일전쟁 승리 기념잔 / 이상 인천시립박물관
    바랴그호 포탄으로 만든 승리기념탑 / 신흥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최근 인천시립박물관 마당으로 옮겨왔다.
    바랴크호의 군함기(軍艦旗) / 침몰한 바랴그호에서 노획된 깃발이 인천시립빅물관에 보관돼 있다 2010년 러시아에 임대되었다.(257X200cm)
    인천시립박물관의 근대역사실에서는 제물포해전의 전황이 실시간 영상처럼 상영되고 있다.

     

    인천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

     

    러시아 해군의 영웅적인 패배와 자폭은 이후 러시아에서 애국심의 상징이 되었다. 인천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 조성된 순양함 바랴그호 추모비 앞에서는 제물포 해전에서 희생된 러시아 수병의 넋을 기리고자 1993년부터 매년 2월 9일 추모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순양함 바랴그호 추모비
    바랴그호 추모비 주변
    바랴그호 추모비 안내문
    2019년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가 바랴그호 추모비에 헌화한 후 묵념하고 있다.
    2013년 방한한 푸틴 대통령은 1박2일의 짧은 일정에도 추모비를 찾아 헌화했다.
    인천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 조형물
    안내문 / 2010년 한.러 우호교류 협정 체결 후 인천-상트페테르부르크 두 도시의 자매결연이 맺어지고 광장이 형성됐다.

     

    인천 러시아영사관

     

    개항기 제물포에서는 일본과 러시아 외에도 청나라,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경쟁을 벌였다. 그중 영사관을 설치한 나라는 일본, 청국, 영국, 러시아의 네 나라였는데, 러시아 인천영사관은 지금의 중구 선린동 56-1에 1903년 2층짜리 건물로 건축되었다. 이 건물에 대해서는 '구한말 격랑의 한 가운데 섰던 사바틴과 그의 건축물'에서 일차 언급한 바 있다.  
     

     

    사바틴 특유의 페디먼트 장식이 유독 많이 등장했던 러시아 인천영사관 건물은 1974년 소리소문 없이 철거되었다.

     
    러시아는 경성 영사관 내에 부영사관을 병설하고 인천, 평양, 진남포 등을 관할케 했는데 1902년 10월 31일 자로 부영사관을 인천에 이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제물포 해전에서 러시아가 패한 뒤 인천주재 러시아 영사는 1904년 2월 12일 본국으로 귀환하였고, 이후 영사관 건물에는 만주 동청철도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일본 육군병참부, 운수부, 체신국 인천출장소(1912년 4월 1일) 등의 장소로 쓰였다. 

     
     

    제물포 해전이 끝난 후 인천에 사는 러시아인들이 본국으로의 퇴거를 위해 러시아영사관 앞에 모였다. 영사관 앞으로 이들을 태우기 위해 온 듯한 배가 보인다.

     

    해방 후 이 건물은 우리나라 해군과 인천해사출장소로 사용하다가 1974년에 철거되었고, 다음에는 3층짜리 공장건물이 오래 들어섰다가 1990년대에 철거되었다. 이후 이 건물 터를 역사적 기념물로 보호하자는 시민단체의 주장이 있었고 인천시도 이에 동조하는 듯했으나, 이후 다시 건물을 올리기도 결정되며 오락가락한 행정이 비판을 받았다. 러시아 인천영사관 자리에는 결국 대형 오피스텔이 건축되어 현재 분양 중이다.
     
    러시아 인천영사관 건물이 사라진 지 거의 100년이 돼 가는 마당에 이제 와서 특별히 애석하다거나, 복원하자거나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인천에 몇 곳 남지 않은 Water View의 전망이 또 하나 사라지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은 금할 수 없다. 인천은 해양도시임에도, 그리고 인천시가 해양국제도시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다를 볼 수 있는 장소는 별로 없다. 이와 같은 고층건물들이 곳곳에서 Ocean View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와 같은 방해꾼이 하나 더 는 셈이다.  
     

     

    러시아 인천영사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
    지금은 그 자리에 오피스텔이 들어섰다.
    개항장 거리의 숨겨진 역사 /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불호텔(뒤쪽 건물)과 일본우선(郵船)주식회사는 러일전쟁 때 크게 협조했다. 특히 제물포 개항과 동시에 인천지점을 설치한 운수회사 일본우선(郵船)은 1988년 신측한 이 건물을 통째로 일본군병참사령부로 쓰게 하는 편의를 제공했는데 그 댓가로 전후 조선 연안 해운의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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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