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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인 고노의 별장이던 인천시민애(愛) 집의 석탑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7. 11. 01:11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는 야외전시장의 이름으로 많은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보물 2호인 보신각종도 그곳에 있는데, 그 종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석물로서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보물 190호),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보물 362호), 대경대사 현기탑비(보물 361호),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365호), 홍법국사탑(국보 102호)과 탑비(보물 399호) 외 여러 석탑 등 쟁쟁한 문화재가 즐비하다.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석물들의 대부분은 과거 경복궁 중앙박물관 시절의 야외전시장 것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인데, 뿌리를 찾자면 물론 고향은 다 다르다. 하지만 그 석물들이 고향을 떠나 오게 된 사연은 거의 비슷하니 191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 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를 장식하기 위한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서 옮겨져 왔다. 위 진경대사탑은 멀리 경남 창원에서 올라온 것으로 줄곧 비(碑)와 함께 전시되었으나 비는 훼손이 심해 지금은 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조선물산공진회 전경
    조선물산공진회 기념 엽서 속의 그림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

     

    그때 지은 지 불과 50년밖에 안 된 경복궁의 전각들이 무더기로 헐려나갔다. 흥선대원군이 애써 복원한 경복궁은 그렇게 다시 훼손되었고 일제는 그 자리에 행사탑과 행사용 건조물을 만들고 잔디밭을 조성했다. 그리고 훗날 이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신축돼  남산 조선총독부가 옮겨오게 되는데, 그때까지도 석물들은 귀향하지 못한 채 경복궁에 남아 있었고, 오히려 지광국사현묘탑(국보 101호)과 같은 미려한 석물들이 옮겨와 보태졌다. 해방 후에는 원공국사승묘탑이 이 자리로 옮겨왔다.

     

    * 원공국사승묘탑는 본래 원주 거돈사터에 있던  승탑으로 일제가 경복궁으로 옮겨 온 것을 조선상업은행 6대 주주였던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가 구입해 자신의 자택인 남창동 홍엽정(紅葉亭)에 갖다놨다. (홍엽정은 현 남대문 일신감리교회 자리로, 원래 이완용의 별장이었다가 와다에 매각되었다)

     

    와다는 1928년 죽었지만 승탑은 해방 후까지 그곳에 놓여다가 대한민국 보물 상황을 점검하던 미군정 문화재처에 의해 1948년 서울 성북동 개인 집에서 발견되었다. 와다 가족으로부터 남창동 집을 구입했던 이모라는 한국인이 집을 다시 팔며 승탑을 성북동 제 집으로 옮겨 갔던 것이데, 이를 미군이 경복궁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홍엽정에 있을 때의 원공국사승묘탑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의 원공국사승묘탑

     

    이중 지광국사현묘탑만이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지광국사현묘탑은 본래 원주 법천사터에 있었는데 1911년 일본인 도굴꾼 모리 무라타로(森村太郞)가 원주에서 이 승탑을 훔쳐와 본정통(명동) 무라카미 병원에 전시했다가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 그때 이것을 본 오사카의 부호 후지타 헤이타로가 거금을 주고 구입해 일본으로 옮겨갔는데, 1912년 말 총독 데라우치가 이를 알고 후지타를 협박해 다시 가져와 경복궁에 놓았다.

     

     

    1990년 경복궁 마당에 있을 때의 사진
    서울 명동 무라카미 병원에 있을 때의 사진

     

    지광국사현묘탑은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백미로 일제시대에도 동양무비(東洋無比)의 화려함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해방 후 6·25전쟁 때 폭격으로 1만2000조각으로 부서졌다. 그것이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가까스로 복원되었지만 파손의 위험에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오지 못하고 경복궁 잔디밭에 남았다가 2016년 문화재청이 첨단 기법으로 해체 복원에 성공하였다. 이 탑은 2024년 원래의 자리인 법천사터로 돌아갈 예정이다.  

     

     

    폭격으로 박살났을 때의 사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 앞 터가 승탑이 있던 자리이다.

     

    이와 같은 예는 군산에서도 발견된다. 알다시피 군산항은 일제의 미곡 반출이 성행했던 곳으로, 지금도 당시의 근대 건축물을 여럿 볼 수 있다. 그리고 군산시 개정면 발산 초등학교 뒷마당에서는 발산리 오층 석탑을 비롯한 다수의 석물 또한 찾아볼 수 있는데, 탑은 원래 완주군 고산면 삼거리 봉림사 터에 있던 것을 당대의 대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島谷八十八)가 소달구지를 이용해 자신의 농장 사무실이었던 지금의 발산 초등학교로 옮겨왔다. 기타 그자가 긁어모았다는 나머지 석물에 대한 출처는 불분명하다.  

     

     

    발산 초등학교 뒷마당의 발산리 오층 석탑
    기타 석물들

     

    개항장이었던 인천에 이 같은 예가 없을 리 없다. 대표적인 장소가 '인천시민애(愛) 집'으로, 해방 후 인천시장의 관사로 사용됐던 곳이다. 바로 길 건너로는 1901년 조계지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세워진 제물포구락부가 있다. '인천시민애 집'이 있는 언덕은 1901년 일본인 사업가 고노 다케노스케(洞野竹之助)가 별장을 세우며 주거지로서의 첫 입지가 마련됐다.

     

    당시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림같은 집으로서 이름이 높았던 이 집은 광복 후에는 서구식 레스토랑 '동양장'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술과 무희의 춤이 제공되는 고급 사교장 '송학장'으로 쓰였다. 이후 인천시가 1966년 이 집을 사들여 새로 지어 2001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사용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을 거쳐 지금은 '인천시민애 집'이라는 이름의 문화공간 겸 시민 휴식처가 되었다. (인천관사 당시는 총 17명의 시장이 거쳐갔다) 

     

     

    1930년대 고노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
    2023년 비슷한 위치에서 찍은 사진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 / 1966년에 옛 고노 별장의 기초 위에 한옥을 올렸다.

     

    본인 고노 다케노스케는 1895년 평양에서 무역과 잡화상 운영을 하다가 관서지방의 동학농민혁명을 피해 1896년 인천에 와서 포목·석유·밀가루 등을 취급하는 잡화상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그리하여 1901년 각국 조계지 중 독일인 거류지했던 이곳을 매입하여 별장을 지었는데,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일본 봉건시대 귀족의 저택을 모델로 집을 지었고 정원도 그와 유사하게 꾸몄다.

     

    고노는 사업의 범위를 넓혀 인천월미도유원주식회사(仁川月尾島遊園株式會社)를 건립해 그 회사의 사장도 겸임했다. 1920년대 시작한 인천 월미도 관광단지 조성 사업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인천행 특별 임시열차를 운행할 정도로 빅 히트를 쳤는데, 바닷가 지하 암반층에서 끌어올린 지하수를 끓여 목욕물로 사용한 해수탕 아사유(潮湯, 조탕)가 특히 인기였다. 이에 조선 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도 아사유를 방문할 정도였는데, 이때 우가키 총독이 고노의 저택에 머물렀다는 기사가 1934년 동아일보에 실렸다.

     

     

    당시의 월미도 유원지와 유원지 내의 풀장
    아사유의 내·외관
    아사유에서 바다를 보는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위 엽서 속의 사진을 보면 고노의 별장은 우리나라 팔작지붕 형태의 삼각합각 지붕을 가진 이리모야 양식의 2층 저택으로, 귀족집의 전형인 긴 화랑의 마루를 설치하고 유리를 둘렀다. 그리고 마당에는 역시 귀족집의 식목(植木)인 금송(金松)과 낙엽 철쭉을 일본에서 공수해 와 심었는데 장식석물로는 석등과 망주석, 그리고 오늘 말하려는 석탑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 석탑은 송학장 시절에 지금은 없어진 인천공보관으로 옮겨졌다가(1966년) 현재는 인천시립박물관 마당에 있다.(1990년 이전) 우선 남아 있는 고노 별장의 옛 모습과 석탑 보자면 다음과 같다. 

     

     

    고노 별장 대문의 기둥 / 지금도 '인천시민애 집'의 대문으로 쓰인다.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기둥
    저택으로 오르는 길
    계단 아래 정원
    정원 아래의 또 다른 문 기둥
    안쪽에서 본 모습
    고노 별장에 있던 석탑/ 지금은 인천시립박물관 마당에 있다.
    석탑 안내문

     

    고노의 집 마당에 있었다는 이 석탑은 전체적인 모양과 비례로 보아 2층 기단에 올려진 3층의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될 뿐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유물이다. 문화재는 고향을 알아야 가치가 실리는 법이나 그저 치장에만 급급했던 졸부가 그와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을 리 없다. (일설에는 충청남도 보령의 한 사찰 가져왔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언제 변형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모양도 옛  모습이 아니다. 지금 인천에서 고향이 확실한 석탑은 아래의 괴상한 형태의 삼층석탑이 유일하다. 그에 비해서 고노 다케노스케 별장의 석탑은 온전한 편이다. 그래서 고노가 훔쳐온 그 석탑을 보노라면 더욱 슬퍼진다.

     

     

    봉일사지 삼층석탑 / 봉일사는 계양산 남쪽에 있던 사찰이다. 인천지역의 원 위치에 남아있는 유일한 탑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나 모습은 영 아니다. 엇비슷하게라도 복원하면 좋으련만....
    '인천시민애(愛) 집' 주변 풍경을 담아보았다.
    길 건너의 제물포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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