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다리 우각로 문화역사기행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6. 30. 21:23
앞서 말한 우각리에 있던 알렌의 별장, 그리고 금곡리에 있던 성냥공장 조선인촌주식회사의 이야기를 했지만 개항 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인천의 배다리 동네는 내내 다운타운에서 밀려나 있었다. 당시 인천 다운타운의 첫번 째는 당연히 조계지 일대로, 관공서 외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은행, 호텔, 상점, 병원 등이 밀집해 있었고 일본인 주택가들도 형성되었다. 그리고 두번 째로는 축현역(동인천역)에서 가까운 데라마찌(寺町, 지금의 신포동, 신흥동, 율목동에 두루 걸쳤던 동네)가 다운타운으로 자리했다.
까닭에 그들에 밀린 한국인들이 데라마찌 외곽인 배다리와 우각로(쇠뿔고개길) 근방에 자리잡게 된 것인데, 사실 그곳은 두 곳 모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배다리는 때로는 바닷물이 밀려들어 주교(舟橋, 배다리)를 놓아 건너다녀야 했고,(그 일로 지명이 유래됐다) 우각로 일대는 비탈진 산동네였다. 아무튼 한국인들이 이곳에 몰려 살았고, 그리하여 이것저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된 배거리 사거리의 노천시장은 지금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곳 배다리와 우각로에서는 우리의 근대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를 테면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와,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이자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으로 꼽히는 영화초등학교,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 파견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쓰였던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 등이 그것인데, 위의 배다리 옛 사진에서 배경으로 보이는 건물들이다.
배다리와 우각로를 이야기할 때 이십세기 약방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이십세기약방은 1950년 5월 2일 고 이종현 씨가 개업한 배다리 최초의 약방으로, 건물은 1959년에 당시로선 보기드문 2층 슬라브 양옥으로 건립됐다. 6·25전쟁 이후로는 규모가 커져 인천과 주변지역에 약품을 공급하였고 그러면서도 배다리 서민들의 친절한 이웃으로 자리했으나 1990년대 폐업한 후 지금은 한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7년 개교한 창영초등학교는 1919년 3.1운동 때 인천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장소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오랜 역사만큼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던 바, 미술사학자 고유섭, 서울대 총장을 지낸 경제학자 신태환, 법무부장관 및 대법원장을 역임한 조진만, 그리고 살신성인의 대명사가 된 강재구 소령 등이 이 학교 출신으로, 그 명사들 중에는 메이저리거 유현진도 있다. 유현진은 창영초등학교 야구부 출신인데, 당시 못 사는 집 아이들이 운동을 한 것과 달리 현진이네는 잘 살았다. 현진이네 뿐 아니라 당시 창영동 사람들은 거의가 부자인 편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이 일대에는 1917년 조선인촌주식회사라는 성냥공장이 세워져 배다리와 우각로의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일본인이 세운 간장공장(고유의 조선간장과 비교해 왜간장이라 불렀다)과 도축장, 종두검사소가 있었다. 도축장은 지금의 동구청 자리에, 1933년 동경제대 전염병연구소 인천출장소로 이름을 바꾼 종두검사소는 도축장 바로 옆 인천동명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했는데, 도축장에서 천연두 치료에 사용할 두묘(痘苗: 송아지에 접종하여 만들어낸 백신 원액)를 채취했다.
우각로가 끝나고 배다리가 시작되는 곳에 1925년 황해도 평산 출신의 정미업자 최병두가 설립한 '인천주조장'(=인천양조장)이 있다. 인천주조장은 1927년부터 소성(邵城) 막거리를 생산하며 인천을 대표하는 술 브랜드가 되었으나 1970년대 부평구 청천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1996년까지 소성 막걸리가 시판되었지만 (인천주조장 것은) 지금은 사라졌고, 이후 배다리 인천양조장은 여러 형태의 문화공간으로 활용되다 지금은 비어 있는 상태이다. 인구의 감소와 함께 문화도 따라 쓸려나간 듯하다.
배다리 우각로 문화·역사여행은 배다리 사거리의 헌책방거리에서 끝난다.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헌책방거리로 불렸던 이곳은 배다리 우각로 일대에 살던 서민들이 보다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서 탄생한 곳이다. 자식들을 교육시켜 출세하게 만들려는 부모들의 노력이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들 부모와 학생들은 비싼 새 책을 살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찾게 된 것이 중고서적이었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도 신혼 초 이곳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는데, 책을 좋아하던 그에게는 딱 맞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절박한 무엇이 있었으니 당시 주안염전에서 근무하던 남편의 박봉으로는 생활이 근근했던 탓이었다. 어쨌든 그는 책을 많이 볼 수 있었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 이때의 경험이 <토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모델이 되었을 터이다. 선생은 본인의 입으로, 인천 배다리에서의 2년이 자신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금곡동 59번지에 있던 ㅁ자형 주안염전 한옥 사택이 그의 신혼집이었다.
한때 40~50개에 달했다는 헌책방은 지금은 대창서림, 집현전, 아벨서점, 한미서점, 삼성서림의 5개만 남았지만 그래도 옛 정취만은 물씬하다. 그래서 분위기를 원하는 영화 관계자에 로케되어 책방 거리 바로 맞은 편에 '수원왕갈비 통닭집'이 만들어졌다. 1천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다는 영화 '극한직업'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소문난 통닭집은 바로 없어졌고 지금은 다시 평소의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 신흥동에 남은 이토 히로부미의 흔적? (0) 2023.07.03 공창(公娼) 신흥동 부도여곽과 숭의동 옐로하우스 (2) 2023.07.01 그 유명한 인촌성냥공장과 인천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3) 2023.06.29 대한제국 최대 이권을 주물렀던 선교사 알렌과 우각현 별장 (0) 2023.06.28 종의 기원(VI) ㅡ 인천시립박물관의 중국 종과 강화 전등사종 (0) 2023.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