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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관거리에서 내몰린 중국인과 의선당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8. 15. 00:57

     

    우리에게는 분명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했던 일본인의 상술에 대해 부러워하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한때  서점가에서는 아래 마쓰시다 고노스케(파나소닉 창업자) 류의 일본판 경영서적들이 범람을 했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지만 구한말에는 다분히 그와 같지 않았으니, 앞서도 말한 혼마 규스케의 <조선 잡기>에는 다음과 같은 놀랍고도 흥미로운 내용이 쓰여 있다. 

     

    * 혼마 규스케(本間九介, 1869~1919)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으로 '정한론(征韓論)' 쪽의 인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반도와 대륙진출을 교두보를 찾기 위한 일환으로써 1893년 조선에 건너와 전국을 돌며 견문하고 정탐했으며, 그에 대한 것을 일본 <이륙신보(二六新報)>에 연재했다. <조선잡기>는 그 기사들을 모아 간행한 책이다.

     

     

    '오사카의 장사꾼에서 경영의 신으로. 마쓰시다 고노스케'
    '일본이 낳은 경영의 신 마쓰시다 고노스케'
    최근 일본에서 재간행된 <조선잡기>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팔도 가는 곳마다 있는 시장에서, 지나인(중국인)을 보지 않는 지역이 없다. 삼삼오오 열을 지어서 시내를 누비는 자가 기백명일 것이다. 그들이 파는 물건은 하나 같이 바늘, 못, 당지(중국 종이), 당실(중국 실), 부싯돌, 성냥, 담뱃대 등이고, 적은 자본을 가진 자는 금건(金巾, 옥양목) 등을 파는 자도 있다. 한인과 섞여서 시장에 점포를 펴고 형편이 없는 것을 먹고 싼 옷을 입고 근검해서, 드디어 크게 벌어서 귀국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쓸데없이 뜻밖의 이익을 얻으려고 욕심내서, 이러한 노동을 조롱하고 지나인을 천하게 본다. 한 재산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파산해서 빈손으로 귀국하는 자가 많다. 아아, 지나인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이상의 내용은 '일본인=상업적 동물', "중국상인=사기꾼"이라는 대중적 인식과는 궤를 달리 한다. 그리고 당시는 원세개의 지원을 받는 청국 상인들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인 만큼 횡포도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상인들은 속된 말로 쪽도 못썼으니, 목이 좋은 곳은 어김없이 가게를 빼앗겼다. 그것은 일본상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항의하면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던 바, 아예 짐을 싸 본국으로 가는 일본상인들도 속출했다. 그 무렵 서울에 거주했던 일본인 혼마 규스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지금 경성에서 일본인과 지나인의 세력 강약을 싸움을 예로 들어 말하면, 우리 일본인은 늘 패할 것이다. 이는 지나인이 쪽수가 많은 데다 일본인을 적대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성에서 우리나라는 도저히 지나인에게 이길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남대문 근처에 노점을 펴고 잡화를 팔려고 하면, 근방에 있는 지나 잡화상들은 바로 장사 원수로 생각하고 사소한 일에도 싸움을 걸고 우르르 몰려와 방해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작년 남대문 안에 아직 순사파출소가 없었을 때에는 여기에 개점한 두세 명의 우리나라 상인은 매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유가 있다고 해도 완력을 가지고 할 때는 도저히 그들에게 대적할 수 없다. 지나의 행정청에 일의 사정을 호소해서 무법 지나인을 단속할 것을 청해도 일본어가 통하는 순사가 와서 따로 자세히 듣는 것도 아니고, "당신은 일본인이니 일본영사관에 가는 것이 좋다"고 면박을 줄 뿐이다. 

     

    일본 경찰서에 도착하면 "그 상대를 잡아오라"고 하므로 분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우리 정부의 보호가 미치지 않음을 원망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다만 지나인에게 제압될 뿐 아니라 한인으로부터도 모욕받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남대문의 아침시장에서 노점을 내면 그 앞에 사는 한인에게 매일 아침 항상 약간의 사례금을 내야 한다. 그러나 지나인들은 어디에 노점을 내건 한 푼도 징수당하는 일이 없다. 이것은 일청 양국 사람이 경성에서 갖는 세력의 강약을 알 수 있는 예증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인에게 모욕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징후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류지인 진고개(명동)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이 크게 강해서 물품을 매매하러 오는 한인들은 항상 경어를 사용한다. 생각건대 한인은 제어하기 쉬운 동물로서 가히 물을 필요도 없지만, 지나인의 세력이 우리나라 사람을 능가하여 한인에게조차 경멸을 초래함은 우리나라의 국권에 있어 쪽팔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력을 떨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상 혼마 규스케의 언급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당시의 상황도 오롯이 이해할 수 있거니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조선인의 습성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혼마는 중국인은 크게 경계하지만 한인은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혼마는 한인은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는 족속이라며 뒤로 밀어놓았지만, 일본인이 중국상인들을 이기고 세력을 떨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일본은 드디어 그 이듬해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일본은 1894~1895년 벌어진 청일전쟁을 통해 그간 10년 동안 조선 땅에서 청국에 밀렸던 설움을 일시에 씻어냈을 뿐 아니라 청나라 세력을 아예 한반도 밖으로 완전히 몰아냈다. 덕분에 조선은 5000년 간의 청국의 속방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으니, 전후 청국이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명문화되었다. 그 조약문의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청나라는 뜻밖에도 허약했다. 그간 청나라는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겉으로는 서구열강에 필적할만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낡은 제도와 부정부패에 대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내내 위아래 손발이 맞지 않던 청국은 결국 일본에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이었으니, 풍도해전에서 청국 제독 방백겸은 개전하자마자 받은 일본함대의 집중 포격에 백기를 내걸고 도주했다.

     

    싸울 의사가 없으니 공격하지 말아 달라는 비굴한 통사정으로, 일본 함선 요시노·나니와·아키스시마호에서 퍼부운 서구 무기 속사포 공격에 곧바로 상대가 되지 않음을 인지하고 도주한 것이었다. 그가 탄 제원(濟遠)호는 프로이센에서 건조된 쾌속 순양함이었던 바,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빠른 속력으로 도주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이 배에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속사포를 장착하고 싶었으나 서태후가 이화원을 짓기 위한 비용으로 해군에 지급할  2천만 냥을 전용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반면 일본은 모든 전함에 속사포를 달았으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청일전쟁은 풍도해전으로 막이 올랐으나 앞으로의 향배를 말해주기 충분했다. 청나라는 이후 연전연패를 하다 이듬해 항복했고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이후 청나라 상인은 조선에서 빠른 속도로 내몰렸고 이후로는 일본상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청나라 북양함대
    풍도해전을 그린 일본 석판화 / 인천시립박물관
    시모노세키 조약을 그린 일본 석판화 / 인천시립박물관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34에 있는 의선당(義善堂)은 1893년 중국인 황합경 스님이 화엄사란 이름으로 문을 연 사당이라고 전한다. 화교의 원조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청군의 보급책으로 따라들어온 65명 민간인들을 효시로 보고 있으므로 의선당은 그들 중국인을 위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데, 이후 의선당은 화교들의 신앙 중심지이자 친목·상부상조를 도모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화상(華商)이 성세(盛世)였을 때는 규모도 상당하였으라 여겨진다 

     

    의선당이 처음 자리했던 곳은 이곳 차이나타운이 아니라 화도진 근방이었다는 말도 있으나, 2017년 7월 도로공사 중 현재의 의선당 부근에서 '인천의선당지기(仁川義善堂地基)'라고 새겨진 폭 20㎝ 두께 15㎝ 길이 60㎝의 비석이 발견되며 현재 의선당의 역사성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돌에 연도가 표시돼 있지는 않다) 하긴 이 장소는 그 전에는 중국 무당파 팔괘장을 주특기로 하는 쿵후도장으로 쓰인 적도 있었다. 70년대 쿵후가 한창 인기를 끌었을 무렵이다. 

     

    출발은 사찰에 기원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의선당은 불교 사찰은 아니며, 건물 자체도 도교사원 양식을 하고 있다. 안에는 관음보살상이 봉안돼 있기는 하나 이름조차 낯선 도교의 신들이 더 많다. 필시 무속에서 비롯됐을 관우상도 보인다. 학술적으로는 이러한 건축물을 배신선당(拜神善堂)이라 부른다고 한다. 의선당은 그리 크지 않으며 정청이라는 중심 사당과 좌우 2동의 부속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당에 석탑도 하나 보인다. 

     

    한때 화교들의 비밀결사인 재가리회(在家裡會)의 중심장소였다가 1934년 내부고발자로 인해 일경(日警, 일본경찰)에 해체된 적도 있는 이 장소는 어찌 됐든 인천 화교들의 마음의 고향 같은 곳으로, 현재 건물은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2006년 5월에 대대적으로 개보수되었다. 하지만 의선당에 모신 토상(土像)들은 그전부터 전해오던 것이며 청나라 말기 중국 종교미술 양식이 잘 표현돼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인천 차이나타운 패루
    송월동 쪽 패루로 차이나타운 제2패루로도 불린다.
    중화요리점 '연경'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의선당 입구
    의선당
    경로청과 석탑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
    의선당 내부
    의선당 입구의 안내문
    의선당 부근 골목의 적산가옥
    생활하고 있는 곳임.
    의선당 맞은편의 유신빌라
    유신빌라 옆 계단의 용 부조
    용 부조 계단 위의 민짜 계단
    계단 부근에서 만날 수 있는 보기 드문 중국인 교회
    내가 아는 한 공화춘 다음으로 오래된 중화요리점 '풍미'
    호객 행위를 늘 열심히 하시는 사장님이 인상적인 곳이다.
    중국 졸정원을 흉내내 지었다는 휴식 공간 '한중원'
    '한중원' 안내문
    화상(華商) 의생성이 사용했던 건물 (왼쪽)
    화상(華商) 쌍성태가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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