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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칩 & 동빙고와 서빙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7. 00:25

     
    지난 5일이 경칩(驚蟄)이었다. 경칩은 겨우내 땅속에 숨어 자던 개구리가 놀라 잠을 깬다는 뜻이다. 즉 경칩은 봄이 왔다는 자연의 알람이니, 우수(雨水)·경칩이면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속담도 생겨났다. 이것을 보면 예전에는 확실히 지금보다 추웠던 것 같다. 지금은 웬만해서는 한강이 결빙된 광경을 보기 힘든데 그것은 위도가 북쪽인 대동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구의 온난화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듯하니 내 어릴 적만 해도 겨울철에는 늘 한강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리고 우수 ·경칩이 오기 전, 한강에서는 막바지 채빙(採氷)작업이 벌어졌다. 사빙고(私氷庫)를 운영하던 얼음업자들이 한강의 얼음을 채취해 빙고(氷庫)에 얼음덩이를 재 놓는 장빙(藏氷)을 서둘렀 것이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광경이 되었다. 1880년에 발명된 제빙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지금은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어 얼음을 구하는 일은 그야말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강에서의 얼음채취 작업은 아래 1→2→3→4의 순번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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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것이 필수였을 것인데, 얼음이 귀한 시기이니 그러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보다는 언제 생겨날지 알 수 없는 왕이나 왕비의 죽음에 대비했음이 맞는 말일 것이다. 왕이 붕어했을 경우 시신은 빈전에 약 5개월 동안 보관되며 그동안 장지 등이 마련된다. 계절을 막론하고 5개월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기간 동안 관(棺)에는 얼음이 지속적으로 채워지며 부패를 막았고, 얼음 녹은 물은 배수시설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조선시대 얼음 채취는 음력 12월과 1월 중 지금은 사라진 한강변의 저자도 근처에서 행해졌다. 동호대교에서 옥수동 방면으로 있던 큰 섬이다. 이곳 한강에서 떼어낸 얼음의 표준 크기는 길이 45cm, 너비 30cm, 두께 21cm로 무게는 약 5관(18.75kg)이었다. 이 5관 한 덩이를 1정(丁)이라는 단위로 불렀는데, 조선후기 서울 4개 빙고에 저장한 얼음이 대략 20만 정 정도로 무게로는 3,750톤이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얼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경복궁 태원전 / 왕과 왕비의 시신이 보관되는 곳으로 30경비단 자리에 복원되었다. 30경비단은 영화 '서울의 봄'에서처럼 신군부의 12.12쿠데타 모의가 있었던 곳이다.
    태원전 회랑

     
    저자도에서 채취된 얼음은 부근의 동빙고(東氷庫)와 용산 둔지산 부근의 서빙고(西氷庫), 그리고 궁궐 내 2곳의 내빙고(內氷庫)에 보관됐다. 국초(國初)인 1396년에 만들어진 서빙고는 동빙고의 2배, 내빙고의 3배에 이르는 크기였다 하는데, 동빙고와 서빙고는 남아 있는 유구가 전혀 없어 그 형태를 알 수 없고, 내빙고는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 빙고(氷庫)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빙고에 보관된 얼음은 여름에 이르면 대개 3분의 2 정도는 녹았던 바, 나머지 3분의 1이 사용되었다. 
     
     

    동빙고 터와 사한단 터 표석이 있는 옥수 현대아파트 입구
    동빙고 터 표석 /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옥수동 일대를 사냥터로 삼으며 동빙고동으로 옮겼다가 훗날 되돌려졌다.
    사한단 터 표석 / 조선시대 빙고의 얼음을 저장할 때와 꺼낼 때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기한제(祈寒祭)를 지낸 곳이다. 1908년 철폐되었다.
    용산미군기지 서빙고 장교숙소 5단지 입구 서빙고 터 표석
    운현궁 후원의 빙고와 우물

     
    빙고의 얼음은 비단 장례에만 쓰이지 않았으니 한여름에는 종친과 문무백관, 환자, 때로는 죄수들에게까지 얼음이 지급됐다. 말하자면 납량(納凉) 특집이다. 여름철 임금의 하사품인 얼음은 지급에 관한 규정이 <경국대전>에 기록돼 있을 정도로 특별한 물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얼음은 왕의 종친, 문무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 관료에게 반드시 일정량이 배급되어야 했다.
     
    받는 사람이야 좋았겠지만 한겨울에 얼음을 채취하는 사람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일은 두뭇개(현재 성동구 옥수동)와 저자도에 살던 사람들의 부역 대신 맡아했는데, 이를 장빙역(藏氷役)이라고 했다. 일년 중 가장 추운 날, 찬바람 속 얼음 위에 서서 문자 그대로 얼음장 같은 물에 손발을 적시며 얼음덩이를 자르고 떼어낸 후 그것을 빙고까지 나르는 일은 고역 중에서도 최고 고역이었을 터,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다. 얼어 죽느니 차라리 도망가자는 심사였을 듯하다. 
     
    그래서 <세종실록>에는 장빙꾼(藏氷裙)을 위로하기 위해 술 830병, 생선 1,650마리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는 그나마 지켜지지 않았을 듯하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로서 생선과 고기 등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사빙(私氷)이 늘어 장빙꾼은 오히려 겨울철 부업으로 자리했다 하는데, 어릴 적 동네 얼음가게에서  톱으로 썬 얼음을 팔던 상인들이 장빙꾼의 후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강의 얼음이 아닌 제빙공장의 얼음을 썼다) 
     
     

    일제강점기 소개된 조선의 풍속 '채빙' /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풍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추억의 엠블럼 / 페이스북 사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제빙공장의 얼음을 얼음가게가 사서 옮기는 광경이다. 리어카 앞에 포니 승용차가 보인다.
    아직도 성업 중인 성남의 가게 / 얼음과 석유를 함께 파는 것도 그 시절과 똑같다.
    인천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전시된 추억의 여름 용품 / 빙수기계 생각 나세요? ^^

     
    석빙고는 현재 경주, 대구(현풍), 청도, 안동, 창녕 등에 남아 있다. 아래 석빙고는 경주 월성에 있는 것으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사람은 누구나 보았을 유적이다. 하지만 신라 시대 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조선 영조 14년(1738년) 경주부윤 조명겸이 기존의 목(木)빙고를 현재의 자리에 옮겨 세운 것이며, 아치형 석축으로 높이 5.4m, 너비 6m, 길이 14m의 얼음 보관소를 만들었다. 당시 남천(南川)에서 채취된 얼음을 이곳에 보관한 후 짚으로 입구를 막아 기온변화를 차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의 그것은 물론 아니나 신라시대에도 빙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니  <삼국사기>에는 서기 505년, 지증왕 6년에 빙고전(氷庫典)이란 관청이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의 역사책인 <신당서>에는 '신라에서는 여름에 음식을 얼음 위에 둔다'는 기록도 전한다.   
     
     

    경주 석빙고 / 보물 제66호
    이맛돌에 1738년 기존의 빙고를 현재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는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의 글씨가 새겨 있다.
    반지하의 구조에 돌을 아치형으로 쌓았으며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배수로로 물이 빠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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