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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계사 대웅전과 대웅전 불상의 비밀 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2. 14. 22:43

     
    앞서 '무학대사와 회암사 3대 화상(和尙)'에서도 언급했거니와, 무릇 종교의 흥망을 좌우하는 것은 그 교리의 합리성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종교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다. 신의 신통력은 더더욱 아닐 터이다. 종교는 오직 권력을 등에 업으면 흥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쇠하는 것이니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 세상의 모든 종교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인용한 글에서 언급된 동국제일 가람 회암사의 예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러함에도 내가 틈틈이 사찰을 찾음은 신앙보다는 역사와 미학을 추구함이니, 이는 오래된 가톨릭 성당이나 성공회 교회를 찾아 발품을 파는 이유와도 같다. 반면 교회는 별로 찾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역사성도 없거니와 건축미도 빼어나지 못하다. 주관적 견해로는 그  몇몇 교회는 한 손의 손가락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개신교회 수는 약 8만 개로 편의점보다 3배가 많다 하는데, 그럼에도 빼어난 건축물이 많지 않음은 성전 완공의 조급성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너무 거창한 비유 같기는 하지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가족 교회)는 1882년 첫 삽을 떴음에도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건물은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본래 공사는 프란세스크 데 파울라 비야르(Francesc de Paula Villar)라는 건축가에게 맡겨졌다가 1883년 말 유명한 가우디가 이어받아 43년을 짓다 죽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 추진 위원회는 가우디의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건축이 지연돼 완공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 한다.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금도 건설 중인 '성가족 교회' / 안에는 성당 공사 인부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도 있다.
    1906년 건립된 대한성공회 강화 온수리 교회 / 뒤의 로마네스크 건물은 2004년 세워졌다.
    1934년 설립된 대한성공회 평택 안중교회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공회 안중교회 제단과 성수대
    성공회 서울주교좌 건물
    안도 다다오가 오사카에 지은 '빛의 교회'
    이와 같은 기막힌 구상을 국내에서 본 적이 없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혜화동 재능교육센터(JCC)
    교회는 아니지만 안도의 특질이 두드러지는 건물이다.

     
    오늘 말하려 하는 종교 건축물은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조계사 본사이다. 이 건물은 예스러워 보이지만 그리 오래된 건축물은 아니며 불교건축물도 아니다. 연혁을 모르고 처음 보았을 때는 궁궐 건축의 이미지도 느껴졌다. 그래서 언뜻, 동국대학교 내의 정각원처럼 옛 궁궐에서 옮겨 왔나 하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였는데.... (참고로 동국대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 정각원은 광해군 때 지은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으로, 일제강점기 남산 기슭의 일본사찰 조계사의 법당으로 쓰이다가 1976년 동국대학교로 이축됐다) 
     
    알아보니 수송동 조계사 대웅전은 1925년 전북 정읍에 신흥 민족종교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十一殿)으로 지어졌다가 이후 경매에 나온 것을 구입해 서울로 옮겨온 것이었다. 이 건물에서 궁궐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1920년대 창덕궁 대조전 재건 공사를 총지휘한 도편수 최원식이 설계·감독한 까닭이다. 그는 십일전 건축에 있어 국내 최대건물인 경복궁 근정전을 참고해 비슷하게 지었으나 오히려 더 화려하게 꾸몄으니, 공포를 외부 5출목, 내부 7출목으로 하여 근정전보다 각 2출목씩 을 더 내밀었다. 
     
    또  십일전 기와를 청기와로 이어 화려함을 더했으나 그 화려함에 눈길을 빼앗긴 조선총독부가 먼저 기와를 벗겨가는 바람에 종로까지는 오지 못했다. 총독부는 이 청기와를 신무문 밖 총독 관저에 사용했는데, 해방 이후 윤보선 대통령이 이 관저를 '푸른 기와의 집', 즉 청와대(靑瓦臺)로 부르며 지금껏 그렇게 불려진다. 사실 십일전은 도교적 색채에 맞춰 지어져 불교 사찰로 전용되기는 맞지 않은 구석이 있으나 어찌 됐든 우리의 전통 형식으로 지어진 것은 분명하다. 
     
     

    보천교 십일전(十一殿)
    조계사 대웅전 / 이축 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 지금의 조계사 자리는 1910년 한일합방에 비분강개해 순국 자살한 충정공 민영환이 살던 집이었다. 그 집은 조부 판돈녕부사 민치구의 저택을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가 더욱 크게 지은 것으로 지금의 조계사와 수송공원에 걸쳐 있었으며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의 저택, 순조의 사위 동녕위가 살던 동녕위궁(東寧尉宮),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및 궁중 의료기관인 전의감과 골목을 사이로 접했다. 여기서 불편한 진실을 말하자면 충정공 민영환과 달리 아비 민겸호는 대표적 탐관오리였던 바, 임오군란 때 훈련도감 군인들에 붙잡혀 맞아 죽었으나, 그 아들은 우국충정의 애국자로서 마침내 순국하기까지 했다. 

    민영환이 죽은 후 수송동 집은 매물로 나왔다. 그러자 1894년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서울 한양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돼 사대문 안 출입이 자유로워진 승려들이 도성 내 사찰 건립 부지로서 민영환의 집을 매입했다. 북한산 승려들이 주축이 된 건립 주체들은 일찌기 도성 내 사찰건립 계획을 세우고 불교도의 성금으로써 옛 원각사 자리의 매입을 시도했으나, 이미 그곳은 미국인 브라운이 설계한 공원(탑골공원)의 부지로 내정돼 있었던 바, 민영환의 집과 동녕위궁을 매입해 1910년 각황사(覺皇寺)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한일합방 후 각황사는 조선불교를 지배하려는 일본 불교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니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가 원종 고문이라는 최고위 자리에 올랐다. 이에 한용운 등의 승려가 민족불교 중흥을 외치며 각황사 옆에 태고사(太古寺)*라는 절을 세워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삼고자 했는데, 이때 마침 전북 정읍의 보천교 십일전이 경매 물건으로 나왔던 바,(1938년) 이를 구입해 태고사로 이축한 것이 조계사(曹溪寺)** 대웅전이다.
     
    대웅전 현판은 구례 화엄사 대웅전 편액을 전사(轉寫)해 걸었다. 화엄사 대웅전 편액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8남인 의창군 이광(李珖)이 썼다고 한다.  
     
    * 고려 승려 태고(太古)  보우선사(普愚禪師, 1301~1382)의 이름을 따왔다.
     
    ** 1954년 불교정화운동 차원에서 이름을 새롭게 하고자 했는데, 이때 중국 남선종의 본향 광동성 소주 남화사(南华寺) 조계성지(曹溪聖地)의 이름을 따왔다. 남화사 앞을 흐르는 하천이 조계(曹溪)이다.  
     

    1938년 십일전을 옮겨올 때의 사진
    조계사 대웅전 현판
    종로 조계사 앞 민영환 집터 표석 / 표석에 써 있는 대로 집은 지금의 조계사 경내에 위치했었다.
    집터에 세워진 충정공 민영환 상
    민영환 집터에서 본 우정총국 / 전의감 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2002년 조계사 대웅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상량문을 보면 조선의 불교는 여전히 일본불교와 총독부의 지배하에 놓여 있음을 말해준다. 상량문에는 1938년 조계사 대웅전 이축·재건립 때 모금된 10만 402원 72전(현재 가치로 100억원이 넘는다)의 내역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는데, 여기에 동참한 성불사, 보현사, 유점사, 귀주사, 석왕사 등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북한 유명 사찰의 성금 내역도 적혀 있었고, 아울러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외친 '심전개발'(心田開發)을 기념하기 위해 총본산 대웅전을 지었노라는 내용도 기록돼 있었다.

     

    '심전개발'은 피폐된 조선의 농촌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농촌진흥운동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지원한다는 뜻으로, 총독부는 조선불교계에도 이 같은 무브먼트의 지원을 강요했다. 조선의 농촌경제를 부흥시키겠다니 뜻이야 나쁠 것이 없었지만, 기실 '심전개발'은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려는 식민지 이데올로기 정책의 일환이었던 바, 앞서 '일제시대의 기독교, 그리고 신사참배'에서 말한 당시의 기독교처럼 조선의 불교 역시 일제에 협조적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증언해 준다.  

     

     
    발견된 상량문

    신사 축제일을 이용해 '심전개발'을 선전했다는 1936년 10월 15일자 매일신보 기사

     조계사 여래좌상은 15세기 제작된 티베트계 목조불

     

    조계사 여래좌상은 15세기 제작된 티베트계 목조불

    기억에만 의지해 말한다면 조계사 대웅전은 2004년 대대적인 내부수리를 했다. 앞서 I편에서 말한 대로 이 건물은 불교 건축물이 아니라 보천교라는 신흥종교의 본당 십일전(十一殿)이었다. 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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