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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남북전쟁과 고려의 대원전쟁(對元戰爭) & 목화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3. 18:11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미합중국에서 벌어진 내전인 이른바 남북전쟁은 겉으로는 노예해방이라는 기치가 걸렸지만 실상인즉 남과 북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다. 그 전쟁의 발단은 1787년 지금의 오하이오주와 그 일대의 지역이 노예제도를 폐지한 데서 비롯됐다. 이에 미국 북부 대다수의 지역이 동조한 반면, 남부의 전 지역은 노예제를 고수했고, 결국은 미합중국에서의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1861년 4월, 남부연합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섬터 요새의 내부
    섬터 요새 포격을 그린 유명한 그림

     

    남부연합이 전쟁까지 일으킨 이유인즉, 남부는 농업이 주요 산업기반이라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저 광활한 카튼 필드(cotton field)의 목화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없으면 경작이 아예 불가능했다. 반면 공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북부는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므로 해방된 노예의 충당을 원했다. 그런데 당시의 미합중국 대통령은 북부연합에 속한 켄터키주 출신의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던 바, 노예 해방을 선언했고, 그로 인해 미국 최고의 인도주의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런데 겉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링컨은 노예제도 옹호자였다. 다만 그는 남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북부의 지지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남북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에 2021년 5월, 미국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으로 인한 인종차별 반대의 물결이 거셌을 때 워싱톤 D.C.와 보스턴에 세워진 링컨의 동상 역시 시빗거리가 되었다. 그것이 마치 흑인에게 시혜를 베푸는 듯한 모양새로 제작된 까닭이니, 본래 노예제도 옹호자였던 링컨의 이중성이 새삼 조명되기도 했다.
     

     

    워싱톤 D.C.와 보스톤의 링컨 동상
    페인트 테러를 당한 샌프란시스코의 링컨 동상
    남부연합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E. 리 장군의 동상은 당연히 피해를 입었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마거릿 미첼이 쓴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서는 전쟁이 휩쓸고 간 남부 조지아주의 황량한 타라(Tara) 농장을 라스트 신으로 잡았는데, 이때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분)의 유명한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거야"가 나온다. (원래의 영어 대사는 '내일은 또 다른 날'이라는 의미의 'Tomorrow is Another Day'였지만) 그 타라 농장이 바로 흑인 노예들이 씨 뿌리고 목화를 따던 카튼 필드였다.
     
     

    바로 그 대사!
    라스트 신 / 1939년 제작된 영화다.
    그 남부의 목화농장

     

    우리나라에서는 1363년(공민왕 12년) 왕권을 둘러싼 내전의 조짐이 있었다. 고려 공민왕은 100년간의 원나라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반원(反元) 자주정책을 추진했다. 중국대륙에서 명나라가 일어나며 원(元)의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이용해 벌인 일이었다. 공민왕은 우선 원나라의 공녀로 갔다가 혜종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 1315~1369)의 국내 세력부터 제거했는데, 대표적인 악당이 기황후의 오빠 덕성부원군 기철(奇轍)과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봉(高龍鳳)이었다. 
     
    고용봉은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에 노비로 끌려갔다가 스스로 거세를 해 환관이 된 출세지향형의 악당이었다. 그는 이후 소원대로 출세를 하였고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져 고려로 금의환향하는데, 이때 충혜왕이 늦게 마중 나왔다 하여 즉석에서 구타를 할 정도로 빌런이었다. 그는 그 정도에 멈추지 않았으니 충혜왕을 끌어내려 원나라로 유배 보내는 등의 전횡을 일삼다 공민왕에 의해 암살되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우뚝한 경천사 10층석탑에는 고용봉을 비롯한 당시 빌런들의 이름이 오롯이 새개져 있다. 
     
    그리고 다음의 축원문이 새겨져 있다. 
     
    대 화엄사찰인 경천사(敬天寺)에서 황제폐하와 황후마마의 만세(萬歲) 장수를 축원드리오니..... 부디 현세(現世)에는 만복과 장수를 누리시고 내세(來世)는 성불하소서. 
     
    大華嚴敬天祝延皇帝陛下壽萬歲皇后皇□□ 秋文虎協心奉□□調雨順國泰民安佛日增輝 法輪常輪□□現獲福壽當生□□覺岸至正八 年戊子三月 日大施主重大匡晋寧府院君姜融大施主院使高龍鳳大化主省空施主法山人六怡□□普及於一切我等與衆生皆共成佛道. 
     
    여기서 황제폐하는 원나라 혜종 토곤 테무르이며 황후마마는 기황후이다. 즉 이 탑은 원나라 황제와 기황후에게 아첨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원나라의 최고 석공들을 초빙해 개성 경천사에 세운 세계적인 걸작이었다. 
     
     

    국보 제86호 경천사 10층석탑
    위 글자가 탑신 건물 창방에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이러한 고용봉과 기철을 제거한 공민왕에 대해 기황후의 리액션이 없을 수 없었다. 그녀는 황제 혜종을 부추켜 즉각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 왕혜(王譓, 몽골 이름은 왕타스 테무르)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 왕혜는 충선왕의 서자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에게서 태어난 친원파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즈음 중국에서는 한족 부흥을 기치로 내건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그들이 먼저 고려를 침공해 개경을 함락시켰다. 1361년 11월의 일이었다. 이에 공민왕은 경북 안동으로 피란을 가게 되는데, 사정이 이렇듯 급해지자 생각을 바꾸어 우선은 원나라와 친하고자 관계회복을 위한 사신단을 파견했다. 
     
     

    안동 영호루
    그 무렵의 공민왕이 쓴 안동 영호루 현판 / CL아카이브 사진

     
    1362년 공민왕이 파견한 사신단  중에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인 문익점(文益漸, 1331~1398)이 있었다. 하지만 계획은 공민왕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으니 기황후는 그들이 대도(大都)에 도착하자 대뜸 공민왕과 덕흥군 중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겁박해 물었고, 이에 겁에 질린 대부분의 사신단은 덕흥군 왕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공수도 덕흥군을 선택하였던 바, 그의 부관이었던 문익점도 따라 덕흥군 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자 기황후는 그들 사신단을 필두로 한 친원파 내각을 꾸렸다. 그리고 그해 11월 덕흥군 왕혜는 원나라의 1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하지만 이들 원나라 군사는 압록강 근처에서  최영과  이성계에게 크게 패배해 돌아가게 되고, 원나나라는 딱이 필요 없게 된 고려 사신단을 돌려보내게 된다. 이때 문익점도 사신단과 함께 돌아왔는데, 다행히도 극형은 면하고 삭탈관직된 후 고향인  경상도 진주목 강성군(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런데 당시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온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목화씨이다. 그리고 흔히 붓두껍에 목화씨를 넣어 몰래 들여왔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맞지 않다. 당시 원나라의 반출 금지 품목은 전쟁과 관련된 지도와 화약일 뿐 목화씨는 금지 품목이 아니었다. 상식선으로 볼 때도 그 작은 목화씨의 반출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뿐더러 그러할 이유 또한 없었다. 
     
    다만 당시 고려에 면화가 정말로 재배되지 않았나 하는 것은 의문이다. 기후가 영 맞지 않는다면 모르겠거니와 중국에서 재배되는 면화가 고려라고 재배되지 않았을 리 없다. (1999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의 면직물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를 한 것은 뭔가 다른 특질이  있었기 때문일 터, 필시 큰 목화솜을 얻을 수 있는 인도산 면화였을 가능성이 크다. 몽골 군대가 서진하며 서역으로부터 유입한 신품종 목화였을 수도 있다. 
     
    문익점은 가져온 씨앗을 심어 목화솜을 얻으려 했지만 그가 심은 것은 끝내 개화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은 개화했고, 이로부터 다시 씨를 받아 다량의 목화재배에 성공했다. 1365년, 공민왕 14년 때의 일이다. 이후 백성들은 무명천을 얻을 수 있었으며, 따뜻한 솜이불을 덮고 솜으로 누빈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기존의 삼베옷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가히 혁명적인 일로서, 문익점의 애국·애족적 사고에서 비롯된 목화씨의 유입은 두고두고 칭송되어야 마땅하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목화로 887의 목면 시배(始培) 사적비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부의 광활한 목화밭과 함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상하는 것처럼 목화를 볼 때 문익점의 애국심과 저 강한 원나라와 싸워 이겼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목화솜을 볼 수가 없으며 아래의 솜틀집이나 솜 트는 기계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무리라 여겨진다. 참고 삼아 말하자면, 목화솜은 오래 사용하면 저들끼리 들러붙어 뭉쳐 불편하고 보온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솜틀집에 가서 바로 잡아줘야 하는데, 솜틀집에 갔다 온 이불은 그렇게 안락하고 편안할 수 없었다.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추억의 솜틀집
    솜트는 기계 /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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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