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고려가 황제국임을 말해주는 하남 선법사 마애불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0. 22:46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비롯해 과거의 거의 모든 고려시대 사극에서 고려의 임금은 황제이다. 그래서 고려가 황제국이 맞느냐는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간헐적으로 논란이 재현된다. 이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하자면, '고려=황제국'이라는 것인데, 사실 그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초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참의자사'(僭擬之事)라는 궤변으로써 마침표를 찍은 바 있다.
     
    정도전은 국초에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저술하며 '참의지사'라는 말을 썼다. '참의지사'란 '실속도 없이 분수 넘치게 황제를 참칭한 일'이라는 뜻이니, 실속이 있었든 없었든, 분수에 맞든 맞지 않았든 간에 고려가 황제를 칭한 것은 사실인 것이다. 정도전의 이와 같은 단정적 사고는 흡사 지침(指針)처럼 내려와 15세기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니, 황제라는 단어는 물론 혹은 황제국으로 오인될 수 있는 사건은 일체 배제되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나아가 세종은 고려가 해동천자(황제)를 참칭하며 하늘에 제사 지낸 것을 노골적으로 꾸짖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 태일(太一)의 별 방위에 따라 제사 지내는 것은 실로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고려 때에 해동 천자(海東天子)라고 잠칭(僭稱)한 까닭으로, 중국에 조림(照臨)한 별을 망령되게 금년에는 어느 방위로 옮겼다고 이르고 곳곳에서 제사 지냈는데, 천하로서 본다면 우리나라는 하나의 나뭇잎과 같으니, 어찌 동·서·남·북을 나누어서 제사 지낼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 서방이라 하여 제사 지내면 우리나라에서도 서방이라 하여 황해도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 옳겠는가. 너희들은 그것을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22년 2월 23일)
     
    즉 세종은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는 《예기(禮記)》<왕제(王制)>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국초부터 알아선 긴 조선이었으니 우리나라의 사서(史書)에 황제라는 말은 언감생심은 물론이요 꿈에서조차 바라지 않았다. (혹시 꿈이라도 꾸었다면 놀라 깨어나 부들부들 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아는 말이지만 황제라는 말은 진시황이 가장 먼저 썼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왕 영정(嬴政)은 일반적인 왕보다 상위 개념의 호칭을 원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시원을 열었다는 세 명의 황(皇)과 다섯 명의 제(帝)를 칭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과 '제'를 취해 '황제'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이후 황제는 왕보다 위인 존재가 되었으니, 황제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큰 나라의 왕도 제후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같은 개념으로서 '태왕'(太王)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중국에 황제가 있다면 해동에는 태왕이 있었던 것이니, 이 태왕은 왕보다 상위 개념이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즉 광개토왕도 태왕의 호칭을 사용했으며, 신라 진흥왕도 태왕의 호칭을 썼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금석문으로 증명되는데, 실제로는 더 많은 임금이 태왕을 칭했을 것으로 여겨지나 당대의 역사서가 전혀 전해지지 않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만주 집안의 호태왕비
    국립중앙박물관의 국강상광대토지호태왕 호우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 게시 번역문 / 오른쪽 위 '진흥태왕'의 글자가 보인다.
    진흥왕순수비 황초령비의 탁본 / 오른쪽에 '흥태왕'과 '제왕건호'의 글자가 보인다. '제왕건호'는 황제가 연호를 세웠다는 뜻이다.

     

    중국과의 교류가 본격화된 고려에 이르러서는 태왕 대신 중국처럼 황제라는 호칭을 썼다. 대표적으로 광종은 황제의 존호를 사용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으나 존호가 기록된 책은 없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달가워하지 않았으니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여주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등에 '황제'(皇帝)라는 존호가 나오고, 서산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에서는 '옥황'(玉皇)으로 표현되며, 광종의 나이를 '제령'(帝齡), 얼굴을 '천안'(天顔)이라 불렀다. 연호는  광덕 (光德, 949~ 953년)과  준풍(峻豊, 960~ 963년)을 썼는데, 준풍은 962년 제작된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에서 발견됐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여주박물관의 비신
    서산 보원사 법인국사보승탑비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고려초에는 지금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지방의 호족들이 각각 독립 왕국처럼 행세했다. 이에 광종은 그들을 제압하며 대내적으로 상위 개념의 황제를 칭했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대외적으로도 여진이나 탐라 등을 제후국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고려에서는 황제라는 호칭을 부담 없이 사용하였으니 고려 궁중 음악 '풍입송(風立松)'의 서두에 나오는 '해동천자당금제 불보천부화래(海東天子當今帝 佛補天助敷化來)'라는 구절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풍입송'은 <시용향약보> 등에 전한다. 
     
    조선의 사대부의자들이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던지, 아니면 문외한이었던지 위의 구절, 즉 '해동천자이신 황제는 부처가 돕고 하늘이 도와 널리 교화를 펴시다'는 내용이 남아 있게 된 것인데, 뒤늦게 이를 발견한 후대인들이 이를 海東天子當今帝/ 佛/ 補天助敷化來로 끊어 읽지 않고 海東天子當今帝佛 / 補天助敷化來로 읽으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불(帝佛)'이란 단어는 참으로 느닷없고 밑도 끝도 없다. 이처럼 후대의 인간들에게는 고려가 황제를 칭했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경을 칠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송나라가 약해서인지 구이팔만(九夷八蠻, 세상의 모든 오랑캐)이 모두 황제를 칭했던지라 고려가 황제를 칭한 것이 달리 특출난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다.  1271년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세운 원(元)제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고려는 물론 거란, 여진, 베트남 등 주변의 모든 나라가 황제를 칭했다. 뿐만 아니라 여진(금나라)의 세력이 강했을 때는 거꾸로 송(宋)이 금나라로부터 황제 책봉을 받은 적도 있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서 황제국의 흔적을 찾으려면 하남시 춘궁동  광주향교 부근에 있는 선법사에 가면 된다. 태고종 사찰인 선법사은 지금은 극락보전과 삼성각과 요사채만 있는 작은 절이지만 고려시대에는 꽤 규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려시대 때의 절 이름은 알 수 없으며 절 터에서 발견된 석등의 일부가 현재 하남역사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이 절 마당의 서쪽 바위에 오늘 말하려는 글자가 새겨진 마애불이 있다. 정식 명칭은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이다. 마애불은 서산 마애산존불처럼 바위가 약간 기울어진 덕분인지 보존상태가 훌륭하다. 크기는 약 1.3m 정도로 마애불로서는 작은 편이나 매우 정교하며, 좌대를 갖춘 흔치 않은 디자인을 하고 있다.  이 불상이 마애약사여래좌상으로 명명된 이유는 왼손에는 둥근 약합을 들고 있기 때문이니, 예전에는 아픈 사람들이 불상을 찾아 쾌유를 빌었을 것이다.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제981호)

     

    마애불 바로 옆에 제작연도가 새겨진 명문이 있다.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은 그래서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데, 太平二年丁丑七月二十九日에 제작됐다. 여기서 태평(太平)은 송나라 태종 때의 연호 '태평흥국'(太平興國)을 의미하며 태평  2년 정축년은 서기 977년, 고려 경종 2년이다. 즉 977년 7월 29일에 제작되었다는 것인데, 사실 불상은 그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명문이 다시 古石不在如賜乙重修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는데 "옛 석불이 있던 것을 고쳐 만들었다"가 되는데, 석불을 고쳐 만들었다는 것도 우습고, 또 주변에 옛날 마애불이나 혹은 고쳐만든 흔적 또한 전혀 보이지 않기에 불상보다는 옛 석불이 있던 절을 중수했다고 해석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在如賜乙'은 '있었시늘’, 즉 '있던 것을'에 해당하는 이두문이다) 
     

    이어 명문은 (절을) 중수한 이유를 밝히고 있으니 爲今上皇帝萬歲願, 즉 현 황제의 만세를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황제는 경종으로 4대 황제 광종에 이어 임금이 되었는데, 그때도 역시 황제라는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혹자는 이 글을 새긴 주인공이 이 지역의 호족으로서 황제를 위해 (진심 혹은 아부하기 위해) 중창불사를 열었을 것이라 해석하는데 매우 수긍이 간다. 

     

    그런데 이 놈은 연호는 왜 송나라의 것을 갖다 썼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경종은 독자적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경종은 아버지 광종과 달리 새가슴이었다는 예기다.  

     
     

    조금 멀리서 찍은 마애불
    가까이서 찍음
    불상 옆의 각자
    밑에서 올려 찍음
    안내문
    마애불 옆 작은 폭포
    극락보전
    삼성각
    극락보전 내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
    불상과 탱화는 최근작이나 수작(秀作)이다.
    선법사 입구
    덕풍천
    덕풍교
    광주향교 삼문
    광주향교 명륜당
    향교 앞 수령 500년의 보호수 은행나무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