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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수서화12폭병풍-친일파 민영휘를 칭송하며 장수를 기원한 당대의 환쟁이와 글쟁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8. 9. 13:12

     

    민영휘의 본관은 여흥(驪興). 춘천부유수, 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한 민두호(閔斗鎬)의 아들이나 사실 이 같은 직함은 그 아들 민영휘 덕에 얻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민치서(閔致敍)인데, 현감 집안의 후손인 민영휘가 고위공무원으로 출세한 데는 여흥민씨라는 본관과 할아버지 민치서의 치(致) 자 항렬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민왕후(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이 바로 여흥민씨에 치 자 항렬이기 때문이다.

     

    민치록은 조선후기에 과천현감, 장악원첨정, 덕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녹읍을 받는 공무원이긴 했으나 미관말직이다. 당시는 별 볼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아울러 민치록과 민치서는 억지로 따지자면 친척이지만 사실 촌추를 따지기도 어려운 먼 사이여서 민영휘가 비빌만큼의 언덕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민왕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민영휘가 여흥민씨인 것, 그 하나만으로도 가신(家臣)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여겼다. 

     

    여섯 살 세 때 고종과 가례를 올림으로써 왕비가 된 민아무개는 경기도 여주군 섬락리의 한 농가( 현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하지만 민치록은 민아무개가 일곱 살 때 이미 사망을 하였던 바, 임금의 장인으로서의  영예를 누릴 수 없었고, 나머지 형제들(민치록은 1남 3녀를 두었다)도 모두 일찍 죽어 민아무개는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민아무개가 왕비로 책봉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됐다. 그녀가 왕비 물망에 오른 것은 흥선대원군의 아내 민씨의 추천 덕으로, 민씨는 같은 가문(여흥민씨)의 천애고아지만 총명한 소녀였던 민씨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시 천하 세도가였던 흥선대원군 역시 주저 없이 그 소녀를 간택했는데, 이유가 단순명료했다. 형제자매와 권세가 없는 집안의 여식이기 때문이었다.

     

     

    서울 운니동 운현궁 입구
    고종의 가례가 거행된 운현궁 노락당 마당 / 뒤에 보이는 건물은 일제가 흥선대원군의 손주 이준용에게 지어준 양관(洋館)이다.
    가례 직전에 찍은 민왕후 사진

     

    흥선대원군은 몰락한 왕가의 방계로서, 외척(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의 발호가 나라와 국정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익히 경험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 외척의 발호를 미연에 예방하고자 민아무개라는 소녀를 며느리로 삼은 것이나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독으로 작용했다. 왕비가 된 민아무개는 이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민씨, 특히 여흥민씨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관료로 기용했다. 

     

    그중에서도 선대에 치 자 항렬을 공유한 민영휘는 흡사 근친처럼 여겨졌으니, (따져보면 15촌 정도가 된다) 민왕후는 1877년 별시(別試) 병과(丙科)로 겨우 입격한 그를 고속승진시켜 고관대작으로 키웠다. 그 위세에 민영휘의 일가친척은 호가호위하며 재물을 쌓았으니,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민씨일가는 모두 도적이나 그중에서도) 조선 3 도적인즉, 서울도적 민영주, 관동(강원도)도적 민두호, 영남도적 민형식"이라고 했다.

     

    이 세 도적은 모두 민영휘의 일가로, 선산을 지키며 농사짓던 민두호는 아들 민영휘가 춘천 유수로 발령 냄으로써 가렴주구를 할 수 있는 방편이 마련되었고, 종제(從弟) 민영주는 민영휘가 고종에게 청탁을 넣어 과거에 부정 입격시켰다. 당시는 돈으로, 빽으로 얼마든지 과거합격증을 손에 넣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양자인 민형식도 같은 방법으로써 아무런 경험도 없는 서른 셋의 나이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모두 고종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임금의 빽이니 무언들 못했겠냐만은 그것이 맨입으로 되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아울러 고위공무원으로 발령이 나려면 또 돈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관찰사(도자사)는 얼마, 부사는 얼마 하는 식이다. 이 같은 본전 생각 때문인지 매관매직으로 부임하는 자는 예외 없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혹리(酷吏)로써 출현했다.

     

    민씨 일가는 그 대표적인 경우여서 일자무식 민두호는 춘천 유수로 있는 동안 돈을 쇠갈고리로 긁는 듯한다 하여 민철구(閔鐵鉤)라는 별명을 얻었다. 민영주는 이조참의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서울의 주요나루인  한강 · 서강 · 마포나루 등의 거상(巨商)들을 쥐어짰는데,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리를 틀고 거꾸로 매다는 등의 악형을 가했던 바, 별명이 '민 망나니'였다.

     

    그중에서도 민형식은 정도가 가장 심했으니 통제사로 부임한 1년 사이 삼도의 부자들을 불문곡직 잡아들여 고신하며 재산을 갈취했다. 그래서 별명이 '악귀'(惡鬼), 혹은 '미친 호랑이'라는 뜻의 민광호(閔狂虎)였는데, 당시 국가 세입 480만 냥의 15%에 해당하는 70만 냥을 치부했을 정도의 큰 도둑이었다.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민영휘(閔泳徽,  1852~1935) 초상
    <조선귀족열전>에 실린 민영휘의 사진 / 본명은 민영준(閔泳駿)이나 1901년 국사범으로 처형된 김영준과 발음이 같다 하여 개명했다.

     

    그러나 이 세 도적도 민영휘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 수조 원 대의 재산을 긁어모은 그는 식민지 조선의 최고 갑부로 등극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친일파 귀족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자본가로의 변신에 성공한 케이스로서 거대 은행(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 및 한일은행)과 공장(조선견직회사 등) 부동산(농지만 5만석)을 소유했으며, 한편으로는 사학재단(휘문고보)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평안감사 시절, 이미 치부(致富)에 재능을 보였던 바, 평안감사 시절(1889~1890) 고종·민왕후 부부에게 작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바쳤다. 이것을 받은 고종은 전 관찰사인 남정철을 꾸짖었다. "(그동안 총애했건만) 남정철은 참으로 큰 도둑놈이었구먼. 관서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혼자서 독식을 했단 말이냐? 반면 민영준(민영휘의 원명)은 더없는 충신이로다."

     

    위 이야기의 출전은 <매천야록>으로, 황현은 '바로 이때부터 남정철에 대한 총애는 쇠퇴하고 민영준은 날로 중용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같은 처세로써 민영휘는 평안감사 기간 동안 안심하고 치부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이미 민영휘의 가렴주구에 대한 기사를 내고 그의 탐학을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꼽으며 '망국대부'라 지칭했다.

     

    <대한매일신보>가 밝힌 그의 재산은 '평안감사 시절부터 착복하고 황실 내탕금을 활용해 모은 돈이 4천만원,(현재 시세로 약 1조 500억원) 중국 상해 회풍(홍콩상하이)은행에는 그보다 많은 수천만원의 돈이 적립되어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이완용의 재산은 3백만원이었다고 하며 민영휘의 재산은 이완용의 20배인 6천만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민영휘는 돈 모으는 데 있어서는 진실로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일례로서, 평안감사로 부임한 민영휘는 가장 먼저 도내 부호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재산 정도를 파악했다. 이후 그들을 차례로 불러들여 군수와 같은 자리를 제시했다. 대가는 상대방의 전재산이었는데, 그는 이 같은 제의를 하며 지방관이 되면 그 이상의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지방관이 된 자도 있었으나 혹간 거절하는 자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이미 윗선에 청탁을 넣었으므로 입장이 곤란하게 됐다, 무마하는 데 돈이 필여하다"며 위약금 조의 돈을 요구했다. 민영휘의 힘을 두려워한 상대방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놓아야 했다.

     

     

    남산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된 민영휘 집의 안채
    남산 한옥마을에 원형대로 재현된 민영휘 집의 사랑채
    민영휘 집의 별채

     

    민영휘의 활약은 이에 그치지 않았으니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으며, 동학군의 봉기 때도 다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때 청나라의 출병에 따라 일본군대도 들어옴으로써 이 땅은 전쟁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승자인 일본에게 나라가 넘어가게 만들었다.

     

    민영휘는 이렇듯 친중파였으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재빨리 친일파로 돌아섰다.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퇴위를 압박해 성사시켰으며, 시종원경(侍從院卿, 지금의 대통령 비서관) 등을 지내며 여러 친일단체에 가담하여 협력하고, 이완용이 만든 한일합방추진단체인 정우회(政友會)의 총재로서 합방의 선두에 섰다. 

     

    그는 총리를 꿈꿔 자신이 탈 화려한 사륜거를 미리 제작해 두기도 했으나 망국으로 나라가 넘어가자 재계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그간 치부한 막대한 재산과 한일합병의 공로로써 받은 거액의 은사금을 바탕으로 은행과 회사 등을 만들어 부를 증식하며 1935년 84세로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했다.

     

     

    춘천시 동면 장학리의 민영휘 묘가 2022년 새삼 매스컴을 탔다.
    그의 무덤 관리를 위해 지은 가옥이 끝내 지방문화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 YTN 사진

     

    그의 망팔(望八, 71세)을 기념해 그린 '축수서화12폭병풍'이 얼마 전  간송미술관 재개관기념전시회에서 최초로 선보였다. 이 그림은 그동안 낱폭으로 보관돼 왔으나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원래 하나의 작품이었다는 점이 확인돼 처음으로 12폭 병풍 형태로 복원돼 전시되었다.

     

     

    간송미술관 2층에 전시된 축수서화12폭병풍

     

    자작(子雀) 민영휘의 망팔, 즉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를 맞아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해 그린 이 병풍 그림에는 김용진, 윤용구, 지운영, 김돈희, 이도영, 정대유, 심인섭, 현채, 오세창, 오일영, 유진찬, 민형식 등의 유명인 12명이 축하의 용도의 쓰거나 그린 작품이 한 폭씩 들어가 있다. 이 그림을 제작한 이는 그의 아들 '악귀' 민형식으로, 그는 겸손하게(?) 12폭 병풍의 말미를 차지해 해서(解書)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임술년 5월 5일은 곧 나의 아버지가 71세 되시는 생신날이다. 이에 세상의 여러 서화의 대가들이 경축의 뜻을 표하고자 각각 글과 그림들을 보내왔던 바, 이 몸이 삼가 받아 소자의 시와 더불어 병풍으로 꾸몄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아버지는 이날에 곧 휘문학교 재단법인에 많은 돈을 내었으니, 후학에 대한 아름다운 은혜가 우리 조선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것이라는 백당(白堂) 현공(玄公, 대한제국기의 관료이자 학자인 현채를 지칭함)의 말씀은 또한 극에 달한 것이다.

     

    이에 소자가 큰 경사를 맞아 절을 하고 춤추며 시를 올리는 바이다. 부친의 나이 이제 팔순을 바라보지만, 따뜻한 바람을 느끼고 긴 해를 보 듯 아직도 젊은 얼굴 그대로이며, 더욱 새로워지는도다. 공적을 대대로 쌓아 올렸으니 복록이 하늘에 이르렀도다..... 일찍이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 충(忠)과 경(敬)을 다하였고, 선대를 계승하려는 마음, 효(孝)와 인(仁)을 이루었다. 거기에 귀함을 더했으나 자만하지 않고 덕(德)으로써 몸을 윤택하게 하였도다.

     

    어진 마음, 어진 소문처럼 선(善)을 즐겨 인륜을 펼치었으니,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교육을 중시하였도다. 그리하여 휘문학교가 우뚝 솟고, 태도와 학식이 고루 뛰어난 수천 명의 제자들이 배출되었도다. 임금의 은혜가 깊어 지팡이까지 하사 받은 이 어른에게 술잔을 들고 깊이 축복을 올리나니 전설의 남국 장수노인이 따로 없을세라. 해마다 오늘처럼 아침저녁으로 봉양하겠도다. 아들 형식.   

     

     

    석촌 기창, 백련 지운영, 월성 김동희, 관제 이도형, 금성 정대유의 글과 그림이 보인다.

     

    이 병풍에 등장하는 작가는 모두 이름난 사람으로 따로 설명이 불필요하다. 대부분 친일파이거나 훗날 친일로 돌아선 자가 믾은 것도 설명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들의 행적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자가 이 중에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위창 오세창이다.

     

    알다시피 그는 뛰어난 서예가로써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민영휘의 망팔을 맞아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시를 득의의 전서(篆書)로 써 보낸 것인데, 뜻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그대를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하며 또한 매우 단단하게 지키시도다. 이렇듯 하늘이 오직 당신만을 도탑게 하시니 어떤 복인들 주시기를 마다하겠는가? 많은 이로움을 받은 그대, 풍부하지 않음이 없도다. 

     

    하늘이 그대를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하시니 그에게모든 복을 더하시고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는 모든 복을 주시는도다. 이처럼 장구하게 복을 받으신 당신은 정녕 부족함이 없도다.  

     

    하늘이 그대를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하며 왕성하게 하지 않음이 없는즉, 산과 같고 언덕과 같으며, 산마루 같고 구릉 같도다. 또한 냇물이 사방에서 흘러내려오는 것 같으니 불어나지 않음이 없도다.

     

    초승달이 차오르는듯, 아침 해가 떠오르듯, 남산과 같이 오래오래 이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즉, 소나무 잣나무 무성하듯 나라가 이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로다. 위창 오세창

     

    오세창의 민비어천가(閔飛御天歌)는 참으로 읽기조차 민망하다. 얼마 전, 한 정치지도자에 대한 '아버지'를 비롯한 난무하는 명비어천가에 한국민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마음에 낯까지 뜨거웠는데, 천하의 지사라는 오세창도 그에 못지 않은 지경이다.   

     

    힘이 있는 자에게 아부를 하고 줄을 서는 것은 어쩌면 우리 나약한 인간의 인지상정일는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득세에 앞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야 될 사람들이, 아울러 그러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그러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전시회가 열린 성북동 보화각 /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보화각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수집한 미술품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1938년 건립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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