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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희가 찾아낸 후 기쁨으로 절규한 경주 무장사 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3. 18:07

     
    경주와 울산의 경계쯤에 억새 군락지로 유명한 무장산이 있다. 등산객들은 대부분 무심코 스쳐가지만 산정에 오르기 전 만나게 되는 절 터가 있다. 38대 원성왕의 아버지가 그의 숙부를 위해 지었다는 무장사라는 절의 흔적이다. 그곳에는 주변의 부재를 모아 복원한 삼층석탑이 있고, 옛 비의 쌍거북 돌받침과 머릿돌이 남아 있다. 지금은 경주시에서 망실된 비신까지 만들어 복원시켜 놓았지만 비석의 귀부와 이수는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로 있었다.  

     

     

    무장사지 삼층석탑
    무장사비 / 경북일보사진

     

    무장사 터는 경주시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경주역으로부터 차로 30분 이상 이동해야 한다. 신라시대에는 더욱 멀고 깊은 골짜기였을 터, 암곡동(巖谷洞)이라는 지명이 이를 방증한다. 이 바위덩어리의 깊은 산골에는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兵機)와 투구(鍪)를 매장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투구를 묻었다'는 뜻의 '무장사'(藏寺)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여지게 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전설과 달리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창건한 절이다(<삼국유사> 권3, 무장사미타전 조)   <삼국유사>에는 '그윽한 골짜기는 너무나 험준하여 마치 깎아 세운 것 같고, 절이 있는 곳은 깊고 어두워서 저절로 마음이 텅 비고 순박해질 것이니,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김경신(원성왕)의 등극 과정에서 파진찬이었던 효양의 숙부가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앞서 '장보고와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에서도 말했지만 신라 제38대 왕 김경신은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자이다. 내물마립간의 12대손인 경신은 선대왕인 37대 왕 성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태종무열왕 계의 김주원을 살해하고 등극하는 바, 어찌 보면 신라 하대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라 할 수 있다. (훗날 장보고의 힘으로 등극한 신무왕 김우징을 도운 김양이 바로 김주원의 후손이다)

     

     

    원성왕릉 / 12지신상과 난간석, 동물상과 문무인물상이 갖춰진 신라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받는 무덤이다.

     

    오늘 말하려는 무장사비(碑)는 이 절의 미타전 앞에 세웠던 것으로, 소성왕의 부인인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명복을 빌고자 만든 미타전 아미타불의 조성 내력이 새겨진 비석이다. 그녀는 요절한 소성왕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아미타불에게 지성으로 귀의하면 구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재산과 재물을 다 희사하여 명장(名匠)으로 하여금 아미타불상과 신중상(神衆像)을 봉안해 조성했다고 한다.

     

    신라 39대왕 소성왕의 이름은 김준옹으로,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의 아들이다. 원성왕이 장수를 한 탓에 아들인 김인겸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손자인 준옹이 789년 12월 29일 왕위에 올랐으나 불행히도 재위 1년반 만에 죽었다. (재위는 799~800년 / 소성왕의 무덤은 우리가 이제껏 신문왕릉이라고 여기고 있는, 시내에서 월지 가는 길에서 보이는 그 무덤이다. 지금도 무덤 앞에는 신문왕릉이라 표시돼 있다)

     

    소성왕이 죽은 후 계화왕후 13살 난 맏아들 중희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40대 왕 애장왕이다. 하지만 계화왕후의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모두 삼촌인 병부령 김언승의 칼에 죽고,(김언승은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의 아들이며 소성왕의 동생이다) 김언승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41대 왕 헌덕왕이다. 아무튼 애장왕은 시해되었고 여동생은 42대 왕 흥덕왕의 비가 되었으나 2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헌덕왕릉 / 경주시 동천동 80번지, 북천 가에 있다.

     

    이처럼 가족들을 모두 잃은 계화왕비가 어떤 심정으로 무장사 아미타불을 조성했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 무장사는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 있었으나 미타전은 허물어졌다고 했다. 그것을 보면 고려 중기까지는 절이 존속된 것으로 보이나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폐사지에서 1760년(영조 36년) 경 경주부윤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가 무장사비의 큰 조각을 찾아냈다. 

     

    1760년 경주부윤이 된 홍양호(1724~1802)는 신라 '전설의 명필' 김생의 비석이 무장사에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에 이계는 <경주읍지> 등을 살펴보고 무장사 터와 무장사비를 수소문했고, 마침내 아전들이 암곡동에서 옛 비석의 귀부와 이수를 찾아냈다. 이어 절 터 뒤 민가에서 콩가는 맷돌로 사용하던 부서진 비석편을 주목하고 그것을 관아로 옮겨왔다. 

     

    비석을 탁본한 이계는 그것이 무장사 비편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왕우군(왕희지의 괸직명)의 풍모가 있으며 글씨를 쓴 사람은 김생이 아니라 신라의 한림(翰林) 김육진"이라고 풀이했다. 이계가 그렇게 단정한 것은 신라 사람 김육진*에 대해 달리 아는 게 있어서가 아니라 무장사비문의 첫째줄에 '대나마 김육진 봉 교(大奈痲金陸珍 奉 敎)....'의 내용을 해석한 결과였다. 즉 그는 '대나마 김육진이 왕명을 받들어 비석을 썼다'고 보았던 것이다.

     

    * 김육진은 <삼국사기>와 <구당서> 등에 나오는 인물로서, <삼국사기>에는 "809년 대아찬 김육진을 당나라에 보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무장사 비 / 가운데 조각은 경주부윤 홍양호가, 왼쪽 위 조각은 추사 김정희가, 오른쪽 아래 조각은 1914년 조선총독부 촉탁 서기 김한목과 나카자토 이주로가 부근 연못에서 발견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817년(순조 17년), 무장사비를 찾아 경주에 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추사 김정희였다. 추사는 1817년 4월 하순~5월 초순 경주답사에 나선 후 첩첩산중을 헤매며 무장사 터를 찾았다. 그리고 4월 29일 마침내 암곡동에서 무장사 터를 찾아내고 지금껏 확인되지 않은 무장사비의 다른 부분을 발견했다. 추사는 이때의 감격을 발견한 비편의 옆면에, “무장사 터를 답사해서 온 힘을 다해 부러진 비편 한 덩이를 찾아냈고 놀람과 기쁨으로 절규했다(驚喜叫絶)"고 새겼다. 

     

    김정희가 발견한 무장사비 편에 새긴 각자
    무장사비 추사 기문(記文)의 해석 / 추사박물관
    복원되기 전의 귀부와 이수
    위의 사진보다 앞선 시기에 찍은 것으로 이때는 이수가 분리돼 있다. 아마 김정희가 찾았을 때도 이 상태였을 것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

     

    추사는 이 비를 앞서 홍양호가 발견한 비석 조각과 맞춘 후 경주 관아의 행랑에 놓아 비바람을 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비문의 서품(書品, 글자 품격)을 백월비(白月碑,  낭공대사비) 위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파했다. 즉 비문은 김육진이 쓴 것이 아니라 백월비를 쓴 김생의 작품으로서, 백월비보다도 격이 높다는 전문가적 소견을 피력하고 있다.

     

     

    추사가 언급한 백월비 / 정식 명칭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 서운탑비'로 954년(고려 광종 5년) 김생 글씨를 집자해서 제작한 비석이다.

     

    아울러 이 비의 글씨를 중국 명필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와 비교하며 (과거 홍양호가 발견한) 비의 탁본을 중국의 고증학자요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1733~1818)에게 보내 고찰하게 만들었는데, 옹방강으로부터는 "김육진의 글씨가 아니라 김육진의 글을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이다. 다만 그렇기는 해도 이와 같은 명품은 중국에도 없다"는 답을 받았다. 

     

    추사는 굳이 그 사실을 부인하자는 않으면서도 이와 같은 명필 글씨를 옹수곤(翁樹崑, 1786~1815)*에게 보여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오죽하면 성원(星原, 옹수곤의 호)을 저승에게 다시 일으켜 비의 탁본을 보여주며 인연을 다시 나누고 싶다고 부기(副記)했으랴? 

     

    다시 말하자면 김정희는 그 글씨가 신라 김생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옹수곤은 이것이 왕희지의 글씨가 아님을 알아볼 것이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한스러워 해 저승에서 다시 일으켜서라도 글씨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가 이 비를 왕희지의 집자본이라 여겼다면 그렇듯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 것이다. 친필도 아닌 겨우 집자본을 가지고 말이다)   

     

    * 옹수곤은 옹방강의 아들이다. 추사는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옹방강과 교류했는데, 특히 옹방강이 소개해 준 동갑내기 아들 옹수곤과는 막역한 친구가 되어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옹수곤은 불행히도 29세 때인 1815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바, 무장사비 비편에 다시금 그 안타까움을 상기하였다. 최근 두 사람의 학문적 교류가 기록된 '고려사' 필사본 139권 19책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 웨이드 문고(Wade Collection)에서 발견되었다. 

     

    김정희의 금석문에 대한 애정과 식견은 이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그가 북한산과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내 확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적어도 두 번 경주를 방문해 진흥왕의 무덤의 찾아냈고,(비록 아직까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원효대사 비편과 대석(臺石)을 찾아내 확인하였으며, 사천왕사와 인근 왕릉지를 샅샅이 뒤져 문무대왕 비문의 아래쪽 큰 덩이를 포함한 총 4점의 비편을 수습했다. 

     

    * 경주의 현 고분은 조선 영조 시절 경주김씨 종친회에서 별다른 고증 없이 비정한 것인데, 국가유산청에서도 괜히 시끄러워지는 것을 꺼려하고, 또 한편으로는 답도 없는 관계로 그 엉터리 고증이 지금껏 통용되고 있다.

     

    김정희는 1824년, 38살의 나이에 다시 경주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생이 썼다는 또 다른 비문을 찾기 위해 남산 기슭의 창림사지를 훑었으나 붕괴된 삼층석탑에서 나온 855년(신라 문성왕 17년) 제작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를 모사해 기록으로 남기고 함께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고증했을 뿐, 비문을 찾는 데는 실패하였다.  

     

     

    김정희는 서악동 고분 4기의 주인을 우측 1호부터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으로 추정하였다.
    <해동금석원>의 문무왕릉비문 / <해동금석원>은 청나라 유희해가 편찬한 책이다. 김정희가 그에게 탁본을 건넸을 때는 파편 4점이 보존돼 있었다.
    창림사지 삼층석탑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37호)이나 장항리 서오층석탑(국보 236호)보다 고식(古式)으로 추정되고 기단 면석의 뛰어난 팔부신중 조각으로 2015년 보물로 지정됐다. 경북일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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