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언급한 바 있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대륙 세력에 완전히 병합될 위기가 세 번 정도 있었다. 첫 번째는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까지 넘볼 때, 두 번째는 몽골이 세계대제국을 형성했을 당시 원나라에 의해, 세 번째는 티베트와 위구르와 대만을 병합시킨 청나라가 조선의 편입을 망설였을 때였다. 그 첫 번째 위기를 막아낸 나라는 신라였다. 흔히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점, 그리고 그것이 고구려의 영토를 상실한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점을 들어 감점을 주고 있지만, 신라는 당나라 50만 대군과 벌인 7년 간의 싸움에서 승리해 한반도를 지켜냈던 바, 통일의 가치가 폄훼되거나 평가 절하될 일은 아니다. 만일 이때 신라가 패했더라면 아마도 한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절단났을 것이다.
그 7년 간의 나당 전쟁은 675년 9월 벌어진 매소성 전투에서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이끄는 신라군이 20만 명의 당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676년 11월 시득(施得)이 이끄는 신라군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의 당나라 수군을 섬멸시킴으로써 끝을 맺었다. 그래서 고고학자 배기동 선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쓴 바 있다. (<한국일보> 2024.03.24)
오늘날 우리 '한국민'의 완성은 나당전쟁의 최후 일전, 즉 신라가 대승을 거두었던 매소성 전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와 만주에 정립했던 세 나라가 하나가 된 삼한일통을 이룬 사건이자, 삼국의 후예들이 합심하여 당군을 몰아낸 역사다. 그런데 중국과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매소성 위치가 애매하다. 논쟁이 반세기나 지속되었지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양주 대모산성이나 연천 대전리 산성이 유력하게 비정되었고, 각각의 지자체는 매소성을 홍보한다. 과연 어디일까. 누구든 이 질문을 들고서 고고학 여정에 나선다면, 고대 그리스 신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암송하고 아가멤논 성을 찾아 나섰던 슐리이만과 다르지 않으리라.
윗글에서 내가 감동을 느낀 것은 매소성 전투를 '한국민의 완성을 이룬 나당전쟁 최후 일전'으로 평한 문장 때문이다. 매소성을 찾는 일은 '고대 그리스 신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암송하고 아가멤논 성을 찾아 나섰던 슐리이만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문장 또한 나와 같은 아마튜어 고고학자에게는 매력적으로 읽힌다.
하지만 단언하거니와 양주 대모산성는 매소성이 아니다. 앞서 '양주 동이마을과 광주 펭귄마을'을 포스팅하며 양주 대모산성에서 발견한 고구려와 신라의 기와 혹은 토기 사진을 게재했던 바대로, 아울러 부근 봉암리 태봉산 보루(堡壘)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의 찰갑(札甲, 쇠비늘 갑옷) 편 사진을 게재했던 바대로, 대모산성은 고구려가 신라 혹은 백제와 뺏고 빼앗기는 전투를 벌인 격전의 전장(戰場)일뿐 당나라 군사가 주둔했던 흔적은 없다.
처음에는 설왕설래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경기도 연천의 대전리산성을 매소성으로 확정한 분위기다. 불문곡직 말하자면 신라의 대당 전쟁은 토번(티베트)에 신세진 바 크다. 667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신라마저 삼키려 남하하였고 전력에서 밀린 신라는 크게 고전했다. 그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토번이 호탄(和田), 쿠차, 카라샤르, 카슈가르 등의 안서4진(安西四鎭)을 함락시켰다. 토번은 이에 그치지 않고 천산남로(天山南路)를 넘어 당의 수도 장안을 향했다.(669년 9월) 그러자 다급해진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와의 싸움에 매진하고 있던 설인귀 부대마저 불러들여 서부전선에 투입시켰다. 하지만 설인귀 부대는 670년 7월, 청해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군에게 대패했고, 이것은 그간 대당 전쟁에서 고전하던 신라가 한숨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신라는672년 8월, 한반도에 상륙한 당나라 고간(高侃) 기병부대와의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으로 추정) 전투에서 자국의 주력 기병이 궤멸당하며 다시 난감한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신라는 이번에도 뜻밖의 도움을 받았으니, 673년 12월, 토번이 천산산맥 일대의 서(西)돌궐 부족들과 연합해 천산북로의 초원길을 봉쇄함으로써 재차 활로가 트이게 되었다.
당나라 서쪽 중요 무역로 중의 한 쪽이 막히자 곧바로 장안 경제에 동맥경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당나라 조정에는 다시 한반도 주둔군을 떼어 천산북로로 이동시키게 된 것이었다. 신라는 북방을 위협하던 당군(唐軍)이 현격히 줄어들자 1만 명의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요동까지 진출하였고, 이후 임진강변에서 벌어진 천성, 칠중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675년, 백전노장 이근행이 이끄는 20만 당나라 기병과 매소성 부근 벌판에서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김원술이 이끄는 신라군은 최대 3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매소성 전투에서 빼앗은 말만 30,380필이다. 대충 몇만 마리가 아니라 정확한 수치가 기록돼 전해지는 것은 그만큼 명확한 승리였다는 방증에 다름 아닐 터이다. 그런데 3만의 신라군이 어떻게 20만 당나라 대군과 싸워 이길 수 있었을까?
첫 번째는 사령관 김원술의 결사항전 의지였다. 김원술은 당나라와의 전투를 수행하다 죽은 명장 김유신의 아들이다. 그는 3년 전 석문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버지 김유신으로부터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죄로 집에서부터 쫓겨나고 사령관의 지휘도 박탈당했다. 하지만 문무왕은 김원술을 복권을 시켜 다시 대당 전투의 일선에 세웠던 바, 그의 의지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근행은 20만 명의 말갈병을 이끌고 매소성과 은대리성 등 임진강 변의 주요 성을 빼앗아 주둔하고 있었다. 그가 남진하지 않고 농성한 이유는 아마도 앞선 천성(泉城, 파주 오두산성으로 추정) 전투에서 패해 평양으로 도망간 설인귀의 군대가 남하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는 천성 천투에서 당나라 군사 1천400명을 죽이고, 전마 1천필, 전선 40척을 빼앗았다)
그래서 설인귀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 수도 서라벌까지 함락시킨다는 것이 계획이었을 터, 하지만 이근행은 매소성을 향해 북상해 오는 신라군을 보자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다. 신라군은 그 수가 3만 정도인 데다 대부분 보병이었던 바, 7만 명의 기병을 앞세운 20만 대군으로 몰아치면 일거에 궤멸시킬 수 있을 듯하였다.
이에 이근행은 전군을 몰아 전곡리 벌판으로 나왔다. 하지만 전곡리 벌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는 신라의 대승이었다. 나는 이 승첩의 비결을 <일본서기/흠명조>에서 유추해 보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長戟强弓)로 임나(가야)를 침공해 명망시켰고.... 임나의 귀족과 백성을 칼로 도륙해 회를 치고 젓갈을 담았다.... 그러자 임나의 멸망에 격분한 왜왕 흠명(欽明, 긴메이)은 562년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왜의 지휘관은 대장군 기남마려숙녜(紀男麻呂宿禰, 키노우 마로노스쿠네)와 부장군 하변신경부(河邊臣瓊罐, 카하베 오미니헤)였는데, 신라의 거짓 항복술에 속아 깊숙히 진격하다 크게 패했다. 왜국조수언(倭國造手彦, 야토노쿠니 노미야츠쿠테히코)은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다.
여기서의 왜는 물론 한반도 남부에서 태동했던 본래의 왜(倭)다. 그리고 임나는 그들이 동(東)으로 진격해 식민지로 삼은 임나(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지방의 일부)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신라의 장창(長戟)부대는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이 페르시아 원정에 나설 때 앞세웠던 팔랑크스(Φάλαγγα, 밀집 장창부대)를 연상시킨다.
당시 보병 위주였던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장창부대인 팔랑크스를 앞세워 페르시아의 전차부대를 궤멸시켰다. 요령은 장창 팔랑크스를 빗세워 진격하는 전차부대를 찌른 후 분열된 전차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김원술 역시 위 기록 그대로 신라군의 주력인 장창부대와 기계식 활인 쇠뇌를 앞세워 당나라 20만 명의 대군과 대결했다.
매소성 밖의 너른 벌판에서 벌어진 대결에서 장창과 쇠뇌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먼저 쇠뇌를 쏘아 적의 예봉을 꺾은 후 달려드는 기병을 장창부대가 찌르는 전법이 제대로 먹힌 것이었다. 당시 신라는 천보노(千步弩, 1000보 떨어진 적을 쏠 수 있는 쇠뇌)라는 신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천보노는 이름 그대로 500~600m 거리의 적을 쏠 수 있는 병기로서 그 위력이 260m 정도의 사거리를 가진 기존의 쇠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문무왕 때 개발된 신무기 천보노는 <삼국사기> 문무왕조에는 따로 기록돼 있다. 즉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천보노를 만든 사찬(沙飡, 신라 8번째 관등) 벼슬의 구진천(仇珍川)을 당나라로 데리고 와 천보노를 제작하게 만드는 내용이 출현하는 것인데, 이때 구진천은 이러저러한 구실로 제작을 회피해 신라의 국가기술이 끝까지 중국으로 넘어가지 않게 만든다.(구진천의 최후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이상의 장창부대와 쇠뇌부대가 20만 당병을 깬 두 번째 비결로서, 그와 같은 전력이 당시 동양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당나라 기병마저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이에 백전노장 이근행도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북쪽으로 달아나버렸고, 이후 김원술은 어렵지 않게 매소성을 접수해 손에 넣는데, 신라군과 당군의 대회전(大會戰)이 벌어진 전곡리 벌은 현재 전곡시가지가 들어섰고 매소성은 풍화와 더불어 군사도로가 나며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