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가회동 엘레지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23. 00:27

     

    '제9회 서울 우수한옥'으로 지정된 가회동 수경재를 찾아가다 계동길 100-8 일대의 한옥에 들렀다. 북촌 답사꾼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곳 한옥들은 사실 '계동 48-12번지 건물군'이라는 타이틀로 이미 오래전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됐다. 가회동 상업가로 막다른 골목에 있는 이 건물군은 주거용 한옥으로는 드물게 2층으로 건축되어 있는데, 필시 그것이 미래유산 등록 사유일 것이다.

     

    대지면적 82.6㎡에 연면적 36.36㎡의 2층 목조 한옥을 중심으로 한 몇 채의 기와집 스카이 라인은 언뜻 지나치기 쉬우나 한 번 발견한 사람에게는 내내 안복(眼福)을 선사한다. 이 건물군은 지금은 상업시설로 변모한 가로변의 한옥들과는 다른 입지와 구조를 지니고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곳은 1941년에 준공된 것으로 추정되나 일대를 개발한 디벨로퍼 정세권의 솜씨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골목 입구에서 찍은 사진
    골목 안에서 찍은 사진
    위 사진의 오른쪽 집 / 서울미래유산 자료
    골목 끝
    길가 풍경

     

    오늘의 목적지 수경재는 앞서 소개한 종로구 가회동 31번지에 있는 이준구 가옥 바로 옆에 있었다. 말한 대로 이준구 가옥은 1936년 친일파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조선인 건축가 박인준에게 설계를 의뢰해 이듬해 완공시킨 서양식 주택으로 가옥 이름은 1991년 서울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될 때의 소유주 이름이다. 대지 500평에 건평 약 180평의 이 집은 개성 화강석을 운반해 와 외벽을 장식했을 정도로 정성을 들인 집이나 꽁꽁 닫혀 있어 좀처럼 들어갈 볼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가회동 이준구 가옥

     

    수경재는 '참우리건축'의 젊은 목수 김원천 대표가 2023년 가회동 꼭대기에 조성한 지하1층(99.38m2), 지상1층 (96.11m2)의 한옥이다. 이 집은 1930년대 '집장사' 정세권이 북촌 가회동 31번지 민대익(이 자도 민영휘의 아들이다) 소유의 땅을 사들여 필지분할을 통해 여러 채의 집을 지으면서 생긴 골목 맨 위에 위치한다. 그래서 그 골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앞이 트였던 바, 가히 북촌 최고의 전망대로 자리하게 되었다. (맨 아래 사진은 그 전망을 담으려는 사람들이다)

     

     

    수경재
    수경재 내부 / 나무신문 사진
    수경재 앞 골목에서 북촌을 담으려는 사람들
    사람들이 담으려 한 이미지 / 이 이미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정세권이다.
    건축 천재의 절묘한 필지 분할 (자료 출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점 후 서울은 일본인 중심의 경제 개발이 이루어지며 인구가 크게 늘었다. 이때 인구 증가는 일본인이 주도하였고 실제적으로도 일본인의 수가 늘어 1920년까지 5만5천 명이던 일본인 수가 6만5천 명으로 10% 정도 증가했다. 하지만 1920년 이후로는 한국인들의 인구가 급속히 늘었던 바, 3.1운동에 영향을 받은 선각자들이 북촌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웠고, 그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경제력 있는 중산층으로 편입됐으며, 발전하는 경성에 매력을 느낀 지방 부유층들도 속속 서울로 진출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그들을 수용할 마땅한 주택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세권은 이와 같은 시대적 사명을 안고 북촌을 개발한 사람으로서, 지금의 북촌 스카이라인은 과거 그가 그린 모습 거의 그대로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과거 북촌 대갓집들의 땅을 쪼개 수십 채의 집을 지어 팔았다. 하지만 앞서 '북촌의 모던보이 정세권'에서 말했듯, 그는 단순한 집장사가 아니라 '조선인 경성 디벨로퍼'라 해야 옳을 듯하며 아울러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였다.

     

    북촌에 대한 오버투어리즘으로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얘기는 누차에 걸쳐 했다. 그래서 지금은 시간 제한을 두어 오후 5시 이후로는 주민 외에는 골목 출입을 할 수 없도록 했는데, 잘 된 조치라 생각된다. 아무튼 북촌이 사시사철 내외국인들이 몰리는 관광지가 될 것이라곤 이곳을 만든 정세권이나 이곳에 살며 아래의 글을 쓴 춘원 이광수나 모두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광수)는 그의 소유인 가회동 가옥을 전세로 빌려서 3, 4개월을 살았지만 그(정세권)가 어떠한 인물인 줄을 잘 몰랐다. 다만 가끔 그가 토목 두루마리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바짝 깎고, 좀 검고 뚱뚱하며,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조선식 가옥의 개량과 사업의 개량을 위하야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인 줄도 알았다..... 기타 설계 · 변소 · 마루 · 토역재료(土役材料) 등 내가 안 것만 하여도 정 씨의 개량한 점이 실로 작지 않다. 미닫이 밑에 굳은 목재를 붙이는 것도 아마 정 씨의 창의(創意)라고 믿는다.....

     

    아래는 그간 북촌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 모음이다.

     

     

    헌법재판소 뒷골목이다.
    헌법재판소 앞길 / 운집한 경찰버스로 인해 차가 밀린다.
    전운 감도는 헌법재판소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