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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동성당과 영희전(永禧殿)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24. 19:43

     

    명동에 일을 보러 갔다가 생각나는 것들을 두서 없이 적어본다. 명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명동성당일 터, 그것이 이곳에 세워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재론하자면, 한국 천주교의 총본산인 명동성당은 1785년 을사 추초 적발사건 때 붙잡혀 순교한 이 땅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를 기려 1892년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그의 집 부근인 종현(鐘峴) 언덕에 세웠다. 1898년 완공한 고딕양식의 이 성당 지하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신자들의 유해가 안치됐다.

     

    을사 추초 적발사건은 을사년(1785년)에 추조(秋曹, 형조의 다른 이름으로 형벌이 가을 서리처럼 매섭다 하여 붙여진 이칭)에서 명례동 종현(鐘峴)에 있는 김범우의 집을 급습해 다수의 천주교도를 붙잡아 간 사건이다. 계획된 체포작전은 아니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듦에 도박판인 줄 알고 급습했다가 안에서 미사를 드리던 교인들이 모두 잡혀갔던 것인데, 당시 역관으로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던 도마(토마스) 김범우가 자신의 넓은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명동성당 안에 걸린 김태 바오로 작가의 '명례방 천주교 집회' / 가운데 푸른 옷을 입은 이가 이벽, 문 앞에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는 이(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가 김범우, 그 앞의 갓을 쓴 3인이 각각 정약전, 정약종, 권일신이다.

     

    이때 최초의 천주교 신자라 할 수 있는 이승훈, 철신·일신 형제, 정약용 형제 등이 함께 체포되었으나 이들은 학행(學行)과 가문이 출중하여(한마디로 양반이라 하여) 풀려났고, 이렇다 할 배경이 없던 김범우만이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의 집은 현 명동성당이 있는 곳이 아닌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자리였고, 명동성당 자리에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 침계(梣溪) 윤정현(1793~1874)의 집이 있었다. 

     

     

    김범우의 집이 있었던 곳
    윤정현의 집이 있었던 곳 / 1890년 주교관으로 건립된 건물로 명동성당에 앞서 세워졌다. 현재 천주교 서울 대교구 역사관으로 쓰인다.
    서울대교구청 건물도 윤정현의 집 자리에 세워졌다.
    추사 김정희가 윤정현의 아호를 써 준 '침계(梣溪)'라는 서예작품 /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2018년 보물로 지정됐다.

     

    이곳에 가장 먼저 터를 닦은 사람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서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을 지낸 마리장귀스타브 블랑이었다. 블랑 주교는 구한말 외세에 기대려는 고종의 영향으로 기독교 선교에 대한 제약이 흐물흐물해지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종현에 있는 윤정현의 저택을 그 아들 윤태경으로부터 구입했다. 당시 윤정현의 집은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대저택으로 고종이 청백리의 삶에 감동받아 특별히 하사한 집이었으나 1894년 윤정현 사후(死後) 블랑이 조선전교 회장 김(金)가밀로의 명의로서 매입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블랑은 처음에는 윤정현의 한옥집을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중 한 채에 종현 서당을 설립, 예비 신학생을 양성했다. 그러다 1886년 프랑스와 한불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887년 5월, 부근의 땅을 구입하여 성당건립을 위한 본격적인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아울러 인천에서 중국인 조적공들을 모집하는 등 발 빠른 행보에 들어갔던 바, 1888년 초 성당이 어느 정도 외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94년 건립 중인 명동성당 / 왼쪽으로 주교관이 보인다.

     

    그러자 조선 정부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성당이 궁궐보다 높은 곳에 건축될뿐더러 높이 솟구친 건물 구조가 영희전(永禧殿)을 찍어 누르는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영희전은 현 서울중부경찰서 자리에 있던 사당으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존귀한 장소였다. 고종 개인으로서는 자신이 신하에게 친히 하사한 건물을 무너뜨리고 거기에 서양 귀신을 모시는 성당이 세워지는 것도 불만이었다.

     

     

    19세기 도성도 속의 종현과 영희전 위치

     

    이에 조정에서는 대토(代土)를 보장하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권했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고, 이에 분개한 고종은 공사 중지를 명령했다. 그렇다고 이행할 블랑 주교가 아니었을 터, 그는 고종을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프랑스 정부의 지원 속에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자 화가 난 고종은 1888년 4월 28일 기독교 선교를 금지하는 금교령(禁敎令)을 내렸고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식이 이를 외국 공사들에게  통보했다.

     

    이에 조선 정부와의 마찰을 염려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의 만류로 한동안 성당 건설이 지연되었다. 하지만 굴복한 것은 고종이었으니 결국 훈도방(勳陶坊) 영희전을 폐하고,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건립한 사당인 경모궁 자리로 영희전을 옮겨갔다. 현재 연건동 서울대병원이 있는 곳으로 대학로 동문 입구에서 응급의료센터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지금도 영희전 자리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예전, 이 쉬운 길을 모르고 위쪽 병원 본관 일대를 몇 번이나 헤맸었다. 쯧쯧) 

     

     

    1900년 고종이 새로 세운 영희전 본전
    지금도 볼 수 있는 영희전 본전의 기단
    1925년 영희전은 일제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내삼문과 기단만이 남았다.
    정비된 영희전 기초

     

    하지만 분쟁 과정에서 블랑 주교도 마음고생이 적잖았던 듯 1890년 선종하고, 새로 부임해 온 코스트 신부가 새로이 설계와 건축을 맡았다. 이후 1892년 8월 5일 정식으로 기공식을 가진 후 공사에 들어갔으며 1896년 프와넬 신부가 남은 공사를 마무리했다. 명동성당은 1898년 5월 29일 역사적인 축성식을 갖고 조선대교구 교구장 뮤(Gustave Marie Mutel, 한국명 민덕효) 주교의 첫 미사가 집전됐다.

     

    그런데 공사가 원만치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뮤텔 주교는 내내 한국민에 적대적이었으니, 고해성사로써 취득한 야고보 안명근(안중근의 조카로 삼촌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1911년 1월 11일 총독부에 밀고해 안명근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써 숙원이던 명동성당 입구의 잡상인들을 몰아내고 널찍한 진입로를 확보했는데, 그는 안명근을 밀고한 일과 그 후일담을 자신의 일기에 자랑스럽게 피력했다. (뮤텔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하며 전부 번역됐다)

     

    안명근은 1911년 10월 평양역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 고등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4월 지병으로 가출옥하였다. 그는 이때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다시 남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길림성 의란현 팔호리에서 1927년 병사하였다.

     

     

    1898년 찍은 명동성당
    완공 무렵의 모습
    지금의 명동성당
    1959년 3월 명동 일대 사진
    1967년 3월 촬영된 명동성당 입구길과 삼일로 확장 공사 모습
    지금의 명동성당
    지금의 삼일로
    지금의 명동성당 입구 / 명동성당 맞은편 KCH 건물이 어떤 불이익을 주었는지 오른쪽 사진관에서 'KCH의 폭력적인 강제집행으로 생업을 잃고 거리로 내쫓긴 사진관을 원상복구하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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