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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례방 인물사 II - 류성용 · 이항복 · 이덕형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29. 23:14

     

    이제 깡패 얘기는 좀 건너뛰고 명례방 남산 기슭에 살던 선비들을 살펴보자. 앞서 남산골 샌님(생원님)을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남산 인근에 생원들만 살았을 리 없다. 아니 오히려 정승 판서가 수두룩했으니 대표적인 인물로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을 들 수 있다. 그가 살던 시절은 요즘과 매우 비슷해 정치가들이 좌우 붕당을 이루어 서로 잡아먹을 방법만 골몰해 대었던 바, 1592년 봄 왜군의 배가 부산 앞바다에 새까맣게 밀려들 때까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임진왜란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부산 초량왜관에 살던 왜인들은 히데요시가 전쟁 준비하고 있는 것을 당연히 알았다. 만일 전쟁이 나면 자신들의 생업이 끊길 터, 그들은 조선 관가에 일본의 침략 의지를 지속적으로 알려 대비할 것을 권했다. 그들이 하도 떠들어대자 조정에서도 혹시나 하는 염려에 사신들을 보내 일본의 내부 사정을 정탐케 했다. 이른바 조선통신사라는 이름으로서였다. 

     

    그런데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의 보고 내용이 달랐으니,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한 것이 반드시 침범이 있을 것"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마치 쥐새끼처럼 생긴 것이 두려워할 인물이 못 되며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정반대의 의견을 개진했다. 

     

     

    변박이 그린 초량왜관도 / 지금의 용두산공원 일대다.


    선조 임금은 김성일의 의견을 따랐다. 전쟁이 나는 쪽보다는 안 나는 편이 좋았으니 편의 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무려 7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바, 그간 조선 백성이 겪은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같은 것을 보고서도 황윤길과 김성일의 생각이 달랐던 것일까? 그들은 단지 히데요시의 관상만을 본 것이 아니라 1년 가까이 머물며 첨단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막강한 정병의 왜군 진영도 직접 목도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정반대의 의견을 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즘의 국민의 힘, 민주당 처럼 두 사람의 당이 달랐기 때문인즉 황윤길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동인이(東人)이었다. 무조건 상대방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자당(自黨)의 정책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류성룡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편을 들어 전쟁이 안 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징비록>에 다음과 같은 변명을 실었다.

     

    "저도 전쟁을 의심했습니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민심이 흉흉해질까 봐 그렇게 말했습니다."

     

    말인지 막걸리인지 참으로 헛갈리는 소리다. 만에 하나라도 전쟁을 의심했다면 그 만의 하나를 대비해 방비를 철저히 시켰어야 했거늘, 백성이 놀라고 민심이 흉흉해질까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했다니.... 그래도 후세의 사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그를 명재상이라 칭했다. 그 첫번 째가 임금의 내부(內附, 중국에 귀속 됨)를 막은 일이었다. 당시의 임금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갔다. 그리고 아예 압록강 너머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했다. 류성룡이 이를 막았다.

     

    "재고하소서. 왕이 우리 땅 밖을 벗어나 내부하면 조선은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니게 됩니다."

     

    류성룡은 이렇게 선조의 내부를 막았다. 명나라가 반대를 해 도강을 못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찌 됐든 류성룡은 국외로 도망가려는 임금을 극력으로 만류했다. 그 외 전쟁 중 면천법을 만들어 왜군의 목을 따오면 천민에서 벗어나는 제도를 만든 일,(이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누구든 천민이라면 어차피 희망 없는 삶에 찾아온 인생 역전의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왜란 후 <징비록>을 써 후대에 계고한 일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공은 역시 이순신의 발탁이다.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못내 찜찜했던 류성룡은 어릴 적부터 보아 왔던 무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전격 발탁하는 신의 한 수를 두었다. 류성룡은 당시 전라북도 정읍 현감(종6품)이던 이순신을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 무려 7계급을 뛰어넘는 파격 승진이었다. 

     

    이와 같은 파격 승진은 당대에도 드문 것이어서 사간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심한 반대가 있었으나 류성룡은 갖은 편법을 써가며 기어코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앉혔다. 이와 같은 정실 인사는 물론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류성룡의 정실 인사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니, 어찌 됐든 이것이 류성룡의 가장 큰 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퇴계로3가 SK주유소 앞 류성룡 집터 표석
    서애로 풍경 / 유성룡 집터에서 남산 가는 길에 유성룡의 호를 붙였다.
    서애로
    필동 서애길 휴식 터

     

    백사 이항복(1556~1618)은 류성룡이 영의정일 때 병조판서였다. 이항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 선조를 모시고  개성으로 피난을 갔고, 의주로 피난 가는 도중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후 곧 형조판서로 특진했다가 다시 병조판서로 옮겨 전란을 일선에서 대처했다. 이항복은 앞서 말한 임금의 강력한 내부(內附) 의지에 이를 타진하러 중국으로 갔는데,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항복은 중국에서 두 가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첫째는 명 황실에서 조선 임금의 내부를 반대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환관들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고 궁중에서 10만 궁녀들과 주지육림을 즐긴 암군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파병을 결단 내렸는데, 다만 왜군을 너무 우습게 본 듯 처음 압록강을 넘어 참전한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5천 병력은 평양전투에서 대패해 도망갔다. 

     

    이에 명나라는 이여송을 사령으로 하는 5만 병력을 보내며 본격적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되는데, 이때 이여송은 압록강까지는 이르렀으나 도강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때 이항복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이여송에게 예를 갖춘 후 조선의 지도를 건네주었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이여송이 "조선에도 사람이 있구먼"이라고 했다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이항복은 당시 드물게 당파색이 옅었던 사람으로, 후세 사가들이 '굳이 줄을 세우자면 서인 쪽'이라고 말할 정도로 미약했다. 그러니 요즘 정치인들처럼 눈깔에 힘을 주며 육두문자에 침을 튀켜가며 싸울 일은 없었을 터인데, 다만 날조된 가짜 뉴스나 유언비어 등에 대해서는 민감했던 것 같다.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심각한 해악 때문일 터, 비변사에서 있었던 아래와 같은 일이 대표적 일화가 되겠다. 

     

     

    창덕궁 앞 비변사 터 표석 /

     

    환도 후 병조판서 이항복이 비변사 회의에 지각했다.  당상들이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싸움 구경을 하다 늦었네. 늘 보는 싸움이지만 이번에는 좀 신기했어. 내가 집에서 나오자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환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중이었어. 그런데 어찌나 치열하던지 환관은 중의 머리카락을 잡고 놓지 않았고, 중은 환관의 불알을 잡고 늘어지더군. 어떤가? 볼만하지 않았겠는가?"

     

    이에 좌중이 한바탕 웃었다고 했지만, 이항복의 말대로 이 말을 들은 당상들의 얼굴이 볼만했을 듯하다. 이항복의 뜻인즉, 상대를 제거하려 없는 일까지 지어내 죄를 만드는 세태를 꼬집은 것이었을 터, 전쟁 중에도 당파 싸움은 지속되었던 모양이다. 마치 경제 위기 속에서도 당쟁을 지속하는 요즘의 국회를 보는 듯도 하다. 하지만 요즘은 이항복 같이 촌철의 해학으로 여유를 환기시키는 인물조차 없이 그저 상대의 숨을 끊으려고만 덤빈다. 보고 있자면 정말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이항복은 당파 없이 좌우 어디에도 서지 않았지만 1617년 인목왕후 폐비 사건에 연루돼 대북파의 모함을 받고 좌의정에서 실각한다. 그리고 161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는 이때 이항복은 유배 기록 <백사 북천일록>을 남기는데,  60세가 넘은 고령에다 중풍에 안질을 앓고 그는 있던  혹독한 추위에 고생하다가 결국 5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그가 서울 시절 살던 집이 남산 기슭에 있었다. 중구 남창동 20-20의 주변이다. 지금 그곳에는 일신감리교회가 있고 입구에 '쌍회정 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내용을 보면 "쌍회정은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이항복의 집 앞에 지어진 정자이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던 이곳은 이항복이 전나무 두 그루를 심으면서 절경이라고 널리 소문이 났다. 그 후 이 집의 새 주인이 전나무 앞에 정자를 지어 쌍회정이라 하였다"라고 쓴, 문맥이 다소 어색한 명판이 붙어 있다. 

     

     

    쌍회정 터 표석
    일신감리교회는 1954년 건립된 유서 깊은 교회다.

     

    아마도 영의정 권철의 집도 이 근방에 있었을 것이다. 권철은 임진왜란 때의 도원수 권율 장군의 아버지로, 어린 이항복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아들 권율로 하여금 이항복을 사위를 삼도록 한 사람이다. 이로 인해 이항복은 19세에 권율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 계기가 된 일화는 아래와 같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지만 첨언한다. 

     

    이항복의 소년 시절, 자신의 집 앞에 있던 감나무가 자라면서 가지가 옆집으로 넘어갔다. 가을이 와 그  감나무에 감이 열렸는데 자신의 집 하인이 제 집 마당의 감만을 땄다. 이항복이 옆집으로 넘어간 가지의 감도 따라고 하자 하인들이 실색했다. 그 집 하인들이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으니 아마도 영의정인 제 주인의 빽을 믿고 그러는 듯했다. 그러자 이항복이 옆집 사랑채를 찾아가 다짜고짜 창호지를 뚫고 팔을 쑥 집어넣었다.

     

    놀란 집주인 권철이 소리를 질렀으나 이항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대감, 이 팔이 누구의 것이옵니까?" 집주인은 당연히 너의 것이라 했을 터, 그러자 이항복이 다시 물었다. "대감님의 방 안에 있으니 대감님 것이 아닌지요?" 이에 권철은 "그래도 네 몸에 붙어 있으니 네 것"이라 했을 터, 이항복이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대감님 댁으로 넘어간 감나무 가지의 감도 의당 저의 집 것이 되겠네요?"

     

    그 외 이항복의 어릴 적 일화는 차고도 넘치는데, '오성(이항복의 호)과 한음(이덕형의 호)'의 일화로써 매우 유명하다. 그런데 얼마 전  '오성과 한음' 이야기가 유명인의 이름을 빌린 허구의 스토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살았던 곳이 너무 떨어져 있어 에피소드로 한데 묶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이덕형의 집은 현 힐튼호텔 아래로 서울역 세브란스 빌딩 부근에 집 터 표석이 있다. 지호지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멀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이항복과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이덕형도 출사하여 훗날 한성판윤과 영의정을 지냈다. 이덕형은 남인으로 당색은 있었지만 이항복과 더불어 내치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두루 형통하게 이끈 인재였다. 하지만 그 역시 끝이 좋지 않았으니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 탄핵당한 후 경기도  양근군  용진(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의 시골집에서 죽었다. 이항복보다도 이른 52세 때였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는 무덤의 묘표는 절친 이항복이 썼는데,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을 이항복이  찾아가 감겨주었다 전한다. 

     

     

    이항복 집터 부근에서 본 서울 풍경 / 멀리 힐튼호텔과 서울스퀘어(구 대우그룹 사옥)가 보인다. 힐튼호텔 아래 이덕형의 집터 표석이 있다.

     

    * III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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