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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상의 태극정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6. 8. 17:33
한강 밤섬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이것저것 조명했음에도 정작 내가 사는 곳 주변 동네인 남양주 밤섬에 대해서는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조명한 사능리 광해군 딸의 무덤에 다녀오다 밤섬을 지났다. 그러면서, 다음 주에는 무조건 방문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늦은 시각임에도 남양주 내각리 느티나무를 찾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1로 89번 길(내각리 285)에 있는 내각리 느티나무는 밤섬의 위쪽에 위치해 있는 바, 다음번에 다시 올라갔다 내려오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내각리 느티나무는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남양주시 보호수(경기 남양주-12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당시 수령 약 400여 년으로 추정되었으니 440년 정도 나이 드신 나무 되시겠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나무라는 얘기다. 높이는 약 25m, 둘레는 가운데가 6.37m, 밑동 부분은 7.8m이며 가지가 뻗어나가 이룬 수관(樹冠) 폭은 동쪽 약 9m, 서쪽 약 13m, 남쪽 약 12m, 북쪽 약 11m이다. 전체적으로 수형이 풍성하고 좋으며, 외과 수술의 흔적도 남쪽 하단부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각도에서 본 내각리 느티나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밤섬 유원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있는 유원지로 왕숙천(王宿川)이 흐르는 유역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5만 8000㎡ 섬 안의 강변 유원지이다. 역사적 유적으로는 이단상(李端相)의 별서 정원 태극정(太極亭)이 있다고 쓰여 있는데, 요점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밤섬은 조선 현종시대 문신인 이단상(1628~1669)이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에 힘쓰던 태극정(太極亭)과 정자 내의 연못 경관이 아름답고, 수도권의 단체수련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47번 국도 바로 옆에 위치하며, 밤나무와 포플러 등으로 숲이 이루어져 있고, 활터·탁구장·보트장이 있다. 최근 밤섬유원지에서의 골프연습장 영업 등의 그린벨트 불법 훼손으로 남양주시와 소유주 간에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활터·탁구장·보트장·골프연습장 등은 지금은 없어졌다. 골프연습장은 '연습장'이 아닌 '잔디 골프 체험장'이라는 이름으로 밤섬유원지 소유주인 남양주시 복합영농조합이 운영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골프연습장이 아닌 놀이공원 형식의 체험장일 뿐이라며 남양주시의 시설 제재에 맞서 오랫동안 싸웠다. 하지만 내가 보기는 분명 79개의 타석을 갖춘 실외 골프 연습장이었으며, 오히려 골프공 빌리는 값이 인근의 인도어 골프장보다도 비쌌다.
그런데도 이용객들이 바글바글했다. 마침 골프 인구도 늘었거니와, 아마추어의 비거리는 품고도 남을, 거리 300m가 넘는 넓은 잔디밭에 그물망도 없어 마치 필드에 나간 듯한 기분으로 공을 때릴 수 있는 매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실내 연습장이나 인도어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 티칭프로 자격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황프로 등은 나름대로 열심이어서 레슨을 받으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공의 분실률을 감안하면 '놀이시설 이용요금'이라며 받는 골프장 입장료가 당연하다는 인식까지 있었다.
하지만 남양주시는 한사코 막았다. 그린벨트이므로 골프 시설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꽤 오랫동안 운영됐는데, 오늘 가보니 '달빛새 베이커리'라는 카페만 새로 들어섰고 나머지 시설 들은 모두 없어졌다. 아무튼 넓고 깨끗해진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다만 내가 찾으려 하는 이단상이 지은 태극정은 없었다. 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조선 현종 때 지어진 태극정이라는 정자가 지금도 있는 것처럼 쓰여 있지만 이 정자는 적어도 1953년 이전에 사라졌다. 1953년은 한국전쟁이 휴전한 해이다.
왕숙천 / 경기도 포천시·남양주시·구리시를 흐르는 약 38km의 하천이다. 밤섬 유원지 입구의 다리 / 앞이 내곡교, 뒤가 내곡대교로서 진접보건소까지 이어진다. 다리 아래 풍경 / 겨울이면 철새 천국이 되는 곳이다. 골프연습장이 있던 곳 최근에 식재된 소나무들 밤섬 유원지 숲길 밤섬 유원지의 위치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동강(東岡) 등을 썼다. 할아버지는 '한학(漢學) 4대가'로 유명한 좌의정 월사(月沙) 이정구, 아버지는 대제학 백주(白洲) 이명한으로 형 이일상과 함께 조선 최초로 3대(代) 문형(대제학)을 배출한 집안 출신이다. 이단상 역시 출중한 문장으로 유명하였던 바, 인조 때 정시 문과에 급제한 후 대간(臺諫)과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이단상은 송시열·송준길·박세채·김수항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아 임금을 교육하는 경연관에 추대되었으나 더 이상의 관직을 사양하고, 양주 영지동(현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으로 들어와 은거하며 학문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단상은 영지동 연안이씨의 입향조(入鄕祖)로 여겨지는데, 앞서 말한 '남양주 동관댁'의 소유주 이덕승이 그의 후예이다. (☞ '남양주 진접읍 내곡리에 남은 풍양조씨와 연안이씨의 흔적')
남양주 동관댁 영지동에는 또 그와 관련 있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내곡 1리 회관 앞에 서 있는 靈芝洞(영지동)과 先生之風 山高水長(선생지풍 산고수장)의 비석이 그것으로, 후자는 북송의 학자 범중엄(范仲淹)이 쓴 雲山蒼蒼 江水泱泱 先生之風 山髙水長(구름 낀 산은 더욱 푸르고 강물은 깊디깊으며, 선생의 풍격·風格은 높은 산과 같고 물처럼 장구하도다)에서 빌려온 글귀라는 사실을 앞서 말한 바 있다. (☞ '남양주 영지동과 미치광이 우물')
그 비석의 뒷면에는 大明崇貞紀元後丙子秋趙相愚書 于靜觀先生遺虛(대명숭정기원후병자추조상우서 우정관선생유허)라고 쓰여 있다. 즉 1696년 조상우가 정관선생을 앞면 문장의 주인공인 엄광(嚴光) 선생에 비견해 썼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관선생이 바로 정관재 이단상이다. 비석 바로 옆에 서 있는 현대식 정자는 본래 정관선생이 강학하던 귀래정(歸來亭) 자리에 세워진 것이고, 그 앞으로는 정관지(精觀池)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전한다.
내곡1리 회관 앞의 비석 비석의 뒷면 / 1696년 가을에 조상우가 이단상이 생활한 유허지에서 썼다는 내용이 새겨 있다. 더불어 이단상은 왕숙천 하중도(河中島)인 현재의 밤섬에 별서 정원도 꾸몄다. 즉 왕숙천의 물을 끌어들여 서호(西湖)라는 연못을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아호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연못 앞 절벽 위에 태극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주변의 기암(奇岩)에 등심석(登心石)이라 새겼다. 모두 <주역>에서 기인한 문구로서, 우암 송시열의 제자(題字)였다.
등심석 바위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태극정은 그보다 훨씬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까닭에 지금은 그 위치만 분분할 뿐인데, 내가 생각하는 서호와 태극정 자리는 아래 사진과 같다.
서호로 추정되는 샛강 샛강 절벽 위 정자 자리로 추정되는 곳 정자 터에서 내려 본 샛강 다리 태극정과 별서 정원은 아마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한다. (춘천 청평사 앞의 원림이다) 명문가 집안으로 잘 나가던 그가 무슨 일로 관직을 접고 이곳으로 들어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664년(현종 5) 사헌부 집의가 된 후 '입지(立志)와 권학(歡學)에 관한 다섯 가지 조목'을 상소하고 관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마도 심화되기 시작한 당쟁에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 물러나 초야에 묻힌 듯 보인다. 실제로 이후로는 당쟁이 더욱 격화되었던 바, 1689년 기사환국 때는 박태보가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진 다리를 끌고 유배를 가다 길에서 죽는 일까지 일어났다. (☞ '조선의 드문 선비 박세당 박태보 부자')
그 일에서도 언급했거니와 과거 서슬퍼런 당쟁의 와중에서도 혹간은 박태보 부자(父子)처럼 죽을지언정 바른 말을 하는 선비가 있었고, 아니다 싶으면 이단상처럼 물러나 은둔하는 공직자도 다수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 때 여당인 공화당내에서도 뜻 있는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으니 사무총장 예춘호를 비롯한 5명의 의원은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예춘호·정구영·양순직·김달수 의원은 제명되었으나 끝까지 개헌 반대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진 개헌안은 총 유권자 77.1%의 참여에 65.1%의 찬성을 얻어 통과됨으로써 유신 독재정치가 시작됐다. 총통정치를 해도 괜찮다는 국민의 허락을 얻었으니 제멋대로 독재를 한 것인데, 모두가 알다시피 결국은 비극으로 끝났다. 엊그제 끝난 21대 대통령 선거는 이재명이 49.42%를 득표하며 당선되었는데, 그가 대통령이 되면 3권을 독식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표를 주었다. 말하자면 독재를 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해준 셈이나 다름없다.
그 여망에 부응하려는 듯, 당선되자마자 사법부 장악을 목적으로 하는 대법관 증원 법안과 반대파들을 쓸어버리려는 3대 특검법 및 이재명을 수사했던 검사들을 손보려는 검사징계법을 상정했는데, 이와 같은 무리수를 염려하는 여당 의원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희한한 법을 만들어 이재명에 잘 보이려는, 그리하여 한자리 얻으려는 족속들만 눈에 띈다. 하긴 그래도 아무 상관이 없다. 야당인 국민의힘에서는 이를 막을 수 있는 뾰족한 방법도 없고, 국민들은 이재명의 독재를 이미 허락한 마당이니 말이다.
선거 기간 중 회자되었던 "모든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In every democracy, the people get the government they deserve.)고 한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명언과, 하버드대 교수들이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나오는 "민주주의는 투표로서 붕괴된다"는 말이 정말이지 피부에 와닿으면 소름 돋게 하는 즈음이다. 익히 아는 대로 히틀러의 나치당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선거로써 집권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 후 독일제국이 무너지고 탄생한 민주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시 히틀러의 나치당이 획득한 표는 43.9%로, 288석의 다수당이 되며 나치 1당독재와 히틀러 총통정부가 시작되었고 국민들은 환호했다. 나치당은 곧 수권법(授權法, Ermächtigungsgesetz, Enabling Act)이라는 무소불위의 법률을 통과시키며 독재의 서막을 열었다. 그 끝이 어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모든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지며 그 대가 역시 국민들이 치러야만 되는 것이다.
이단상이 살았던 원내곡마을 풍경 / 원내곡에서 이단상의 별서가 있던 밤섬까지는 걸어서 약 15분이 걸린다. 원내곡마을의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이단상의 묘가 있는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1-1의 야산 / 묘소의 입구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고 어둠도 내리고 해서 결국 산을 내려와야 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가 보려 한다. ▼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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