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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진접읍 내곡리에 남은 풍양조씨와 연안이씨의 흔적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5. 7. 22:51
풍양(豐壤)은 통일신라의 풍양현이 위치했던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이다. 한국의 조씨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풍양조씨의 관향이기도 하다. 풍양현은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고장이나 지금은 잊힌 이름이 되었던 바, 풍양군, 풍양리, 풍양동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지 않다. 까닭에 풍양조씨 중에서는 관향이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도 무리가 아닐 것이 현재는 그 지명이 진접읍의 풍양중학교, 구리시의 <풍양신문>, 풍양운수, 풍양궁(豊壤宮) 정도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양운수는 혹 운행 중인 버스를 보아도 지명과의 연결은 어렵다. 조선왕조 이궁(離宮)으로서 태종 이방원이 머물렀다는 풍양궁도 진즉에 사라졌던 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723-21 일대에 그 터가 있었다는 구전과, 고종 때 세운 작은 비각만 남아 있을 뿐이다.
풍양궁터 비각 / 내각리(內閣里)의 유래가 된 비각이다. 비각 안에 픙양궁지임을 알리는 2개의 비가 있다. / 영조와 고종 때 각각 세워졌다. 과거의 위세를 말해주는 풍양궁 하마비
풍양중학교는 학교가 위치한 진접읍 일대에 과거 풍양조씨의 집성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집성촌 전도치 마을은 지금은 공장건물만 눈에 띄고 민가는 드물다. 풍양조씨는 조선시대 말 안동김씨와 쌍벽을 이루던 대단한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김씨의 세거지였던 남양주시 덕소 석실마을 집성촌이 사라졌듯 풍양조씨의 전도치 마을도 시대의 흐름에 밀려 사라진 듯하다. 다만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3-4에는 풍양조씨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조맹(趙孟)의 묘가 굳건하다. 무려 후삼국시대의 사람임에도.
조맹의 묘 구 묘표 / '개국공신 문하시중 조맹의 묘'라 쓰여 있다. 신도비 / 1632년에 세워진 신도비다. 후경 입구의 신(新) 신도비 / 1905년 조병필이 찬(撰)했다.
풍양조씨 인물에 관해서는 앞서 몇 번이나 언급되었다. 중요 인물을 다시 언급하자면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가 현지의 고구마를 주목하고 그 종자를 가져와 백성들의 구황(救荒)을 도왔던 문익공 조엄, 천주교 탄압으로 악명 높던 조만영, 1817년 추사 김정희와 함께 북한산 비봉(碑峰)에 올라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한 조인영, 이하응(흥선대원군)의 아들 명복(고종)을 왕위에 올린 신정왕후 조씨(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와 그의 조카 조영하 등이 있다.조엄의 <해행총재(海行摠載)ㅡ조제곡일기(趙濟谷日記)> /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조엄이 11개월간의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고구마 외 주교(舟橋), 수차(水車) 등 조선에 없는 이기(利器)에 대한 연구도 실려 있다.
이들은 모두 풍양조씨 회양공 한평군파의 자손으로, 관련 유물을 뜻있는 후손들이 박물관에 기증한 덕분에 일괄해 살펴볼 수 있다. 후손들은 2018년 11월에 1차로, 양주시 회양공파 묘역에서 출토된 지석, 복식, 석물 등의 유물과, 집안에서 대대로 보관해 온 고문서, 고서 등 499점을 용인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했고, 2022년 4월 다시 2차로 후손들이 보관해 온 초상화 등의 유물을 위탁했다.경기도박물관이 발간한 <풍양조씨 회양공파 후손가 기증유물’ 보고서>
파(派)는 다르나 17세기 문신인 조상우(趙相愚, 1640~1718 / 회양공 청교파)가 글을 써 세운 비석 2기가 진접읍 내곡리 원내곡 마을에 서 있다. 그 비석을 진접읍 내곡리 286번지에 소재한 여경구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129호)에 다녀오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지금은 '남양주 동관댁'으로 명칭이 바뀐 여경구 가옥은 민속문화재로 지정될 때의 소유주였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렸는데, 원래는 연안이씨 가문 이덕승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다고 한다.
만석꾼의 후손이었던 이덕승은 이 집에서 대를 이어 살아오다 근자에 작은 딸에게 증여하고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큰딸 집에서 살다 별세했는데, 여경구는 당시 사위였다. 원래 이 집은 이덕승의 8대조가 약 300년 전에 지은 집으로서, 18세기 지방 사대부 가옥의 일반적 특색에다 대문으로 출입하는 사람이 안채를 감지하지 못하게 설계한 특이성, 태묘산 줄기의 명당 터에 자리를 잡은 입지 등으로 인해 1984년 1월 '여경구 가옥'이란 이름으로써 국가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여경구 가옥'은 이후 연안이씨 가문의 지속적인 진정으로 근자에 '남양주 동관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후문이다. 대대로 이어져온 이씨 집이 졸지에 여씨 집이 되었으니 연안이씨 가문이 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동관댁은 이곳 사람들이 오랫동안 불러왔던 명칭이라고 하는데, '내곡리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집'이라는 뜻일 게다.
남양주 동관댁 문간채 문간채에 딸린 행랑과 광 / 안쪽에서 본 모습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사랑채(왼쪽)와 중문채 격인 광채 / 이로 인해 문을 출입하는 사람으로부터 여성의 공간인 안채가 철저히 보호받는다. 더불어 중문채의 광을 사랑채에서 사용하는 이중 효과를 누리고 있다. 사랑채 뒤에서 본 사랑채 / 사랑방 대청 건너방을 배치하고 앞뒤 모두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 측면과 사당 측면 / 왼쪽의 사당 측벽은 특별히 꽃담 형식으로 꾸몄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 / 반오량(半五梁)이라는 독특한 지붕틀 구성이 주목받는데, 옆에서 보면 그 결구법이 금방 이해된다. 사당 뒤의 느티나무 / 이 집과 함께 300년을 살아온 나무다. 안채 안채에 딸린 광채 / 미적 구도가 절묘하다. 안채에 딸린 날개채와 우물 / 동쪽으로 날개채를 달아 골방과 뒷방, 광을 두었다. 밖에서 올려 본 안채 담장 안채는 이 집의 가장 특징적 공간이다. / 오른쪽 아래 바깥 우물이 보인다. 우물 안을 들여다 보았다. / 물은 맑아 보였으나 식음용으로는 부적절한지 폐쇄된 상태다. 대문채 옆 안내문 구조 안내문 태묘산 오르는 길에서 본 동관댁과 안내곡마을 동관댁 아래쪽의 민가 동관댁 가는 길의 보호수 느티나무 느티나무 앞의 원내곡 쉼터 표지판 진접읍 내곡4리 원내곡마을 표석 금강로의 '남양주 동관댁' 표지판 내곡리 마을의 또 다른 보호수 느티나무 이 나무 아래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 비석으로, 풍양조씨 조상우가 쓴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에는 공부가 좀 필요할 듯해 2편에 소개하려 한다. ▼ 이어지는 글
남양주 영지동과 미치광이 우물
앞서 말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9호 '남양주 동관댁'이 있는 남양주시 진접읍 원(原)내곡리는 일명 영지동(靈芝洞)이다. 마을사람들도 이곳을 내곡리나 원내곡(리)으로 부르기보다는 영지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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