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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5- 백제 멸망의 수수께끼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4. 23:00


    의자왕이 왜 그렇게 쉽게 항복을 했는가는 지난 20세기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로 여러 추측만 난무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6년 중국 낙양 골동품상에서 백제인의 묘지명(墓地銘) 하나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비석의 주인공은 대당 좌위위 대장군(大唐左威衛大將軍)[각주:1] 예식진(祢寔進, 615-672)으로 660년 의자왕 항복 당시 웅진성 방령(方領, 성주)이던 사람이었다. 그 묘지명을 2012년 12월, KBS 역사 프로그램 '충격보고서, 의자왕 항복의 비밀'에서 전격 공개함으로써 세인들은 비로소 백제 망국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비밀에 접근하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웅천 방령 예식진이 지키던 웅진성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앞뒤)



    KBS 취재팀은 먼저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지하창고에 보관된 예식진 묘지명을 어렵사리 카메라에 담았다. 그 묘지명에서 처음 주목된 문장은 그가 백제 웅천인(熊川人), 즉 충남 공주 사람이며 그의 아버지 사선(思善)과 할아버지 예다(譽多)는 모두 좌평 벼슬을 지낸 백제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것이었다.(하지만 다른 사서나 금석문 등에서 그의 예씨 가문이 등장하지 않는 것에 미루어 할아버지 예예다 때부터 정계에 진출한 신흥 가문으로 추정했다)



    묘지명은 망자(亡者)에 대한 기록을 담아 무덤에 묻히는 돌로, 훗날 왜곡될 우려가 있는 여타의 사서와 달리 당대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까닭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문제의 글자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의 의자왕이 항복하자 소정방은 8월 2일 승전 축하연을 갖고, 그 한달 후인 9월 3일 의자왕과 왕족 및 대소신료를 포함한 총 12,093명의 포로를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간다.('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 본기) 그런데 당고종은 의외로 은칙(恩勅)을 내려 그해 11월 1일, 태자 융(隆)을 비롯한 13명의 왕자를 풀어주고,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과 국변성(國辨成)을 포함한 37명의 백제 관료 또한 방면하는 바,('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일본서기' 제명천황 6년 7월조) 위의 예식진을 이때 방면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후 당나라에서 공을 세워 우오위장군(右吾衛將軍)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같은 반열에 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비천 전투에서의 승리로써 토번(티벳)의 침략을 막고, 돌궐 토벌에 공을 세우는 등의 혁혁한 전과가 기록된 흑치상지의 묘지명과 달리(1929년 발견됨) 예식진의 묘지명에서는 당나라에서의 아무런 공훈도 새개져 있지 않고, '우무위대장군', '좌무위장군', '사반주자사', '절충도위'와 같은 화려한 직함만이 나열돼 있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흑치상지의 묘지명

     


    KBS는 그 답을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서 찾았다. 거기 써 있는 '백제의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 항복했다'(其大將禰寔 又將義慈來降)'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데리고 스스로 성을 나와 항복했다'(義慈 率 太子及雄鎭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는 내용은 물론, '신당서'에 기술된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其大將禰寔  與義慈降)보다도 구체적인 기술이었다. 즉 웅진성을 지키던 성주 예식이 의자왕을 붙잡아 소정방에게 항복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예식은 예식진과 동일인으로 예식진은 당나라 귀화 후 얻은 이름이며, 구당서에 기술된 '將'은 왕을 '사로잡았다'는 의미라는 중국학자의 해석이 있었다)


     

                      

    위는 '구당서', 아래는 '신당서'의 문장



    '장'(將)에 대한 해석을 KBS는 후자로 보았다.



    그처럼 기특한 일을 한 예식진에 대한 당고종의 보답이 없을 리 없었을 터,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다시 아래와 같은 글들이 새겨졌다. 그의 출세가도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문은 중국에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2010년 4월 산서성 서안시 장안구에서 곽사남촌(郭社南村)이라는 귀인 묘지에서 예식진과 아들 예소사(祢素士), 그리고 손자 예인수(祢仁秀)의 무덤이 한꺼번에 발굴됐다. 그때 예인수의 묘지명도 발견됐는데, 거기에는 그가 백제인의 후손이며 그 할아버지가 당나라 황제 고종에게 의자왕을 끌고 가 바쳤다는 기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예식진 묘지명의 문장


             

    예인수 묘지명과 문제의 문장

    (노란색 줄친 곳으로 큰 글씨는 확대된 문장) 



    '선조의 어진 덕을 본받은 예식진은 당이 동쪽을 토벌할 때 명을 받아 그 왕을 끌고 고종황제에게 귀의하게 되니 좌위위 대장군으로 내원부 개국공 훈작을 받았다'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선조'는 예씨 가문이 오래전 (410-420년 사이) 산동반동에서 백제 공주 지방으로 건너온 이주민임을 말하는 것인데, 2015년 7월 길림성 고전연구소가 보고한 예식진의 형 예군의 묘지명에도 동일한 내용이 써 있어('예씨의 선조는 중화와 조상을 같이 한다') 이 또한 신빙성 있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군 묘지명



    이상의 연구를 최초로 진행한 사람은 제주대학교 김영관 교수로 그는 2007년 8월 '백제 멸망의 진실 ― 예식진의 배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 그는 논문에서 '웅진성 방주 예식진이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을 붙잡아 넘겼고, 예식진은 구당서에 기록된 예식과 같은 인물임'을 피력했으나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2010년 예인수의 묘지석이 발견되며 그 사실이 명확해지자 KBS가 프로그램을 만들어 '역사추적'에 연작으로 소개를 하게 된 것이었다.





    예인수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들



    김영관 교수는 예인수의 묘지명에 의자왕의 피체사실이 분명히 표현된 것을 두고, "손자인 예인수에 이르러서는 백제인의 정체성을 잃고 당의 백성으로 동화되는 과정이 드러난다"며 "백제 멸망의 악역을 담당해놓고도 책임의식이 희박해져 노골적으로 할아버지의 활약상을 거림낌 없이 서술하게 된 것"이라는 소견을 밝혔다. 그런데 김영관 교수보다 먼저 이상의 사실을 밝힌 사람이 있으니 한말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의자왕은 곰나루성을 지키고자 했으나 성을 지키는 대장이 임자(任子)의 도당인지라 오히려 왕을 붙잡아 항복하려 함에, 왕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동맥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태자 효(孝)와 둘째 연(演)이 함께 당(唐)의 포로가 되어 당군의 진영에 묶이어 가니라. 당장(唐將) 소정방은, 스스로 목을 찔러 반쯤 죽은 의자왕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래도 대국에 항거하겠느냐'며 장난을 쳤고, 신라태자 김법민은 왕자 융(隆)을 굴리며 '네 아비가 우리 누이 내외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며 앙갚음을 하더라.


    의자왕이 당나라에 도착한지 7일만에 죽은 것은 필시 웅진성에서 입은 자상(刺傷)이 심해져서 일 것이었다. 그가 죽고자 했던 것은 살아 망군(亡君)으로서의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깨끗히 접자는 심정이었을 터, 하지만 그는 그나마 제 때 죽지 못했고, 또한 죽어서도 오욕을 뒤집어 써야 했으니 당고종이 내린 벼슬은 종2품 품계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였으며 오나라 말왕 손호와 진(陳)나라 말왕 진숙보의 무덤 곁에 묻혀야 했다.(그 두 사람이 얼마나 암군이었는지는 앞서 각각의 섹션으로 설명한 바 있다) 죽어서도 망신을 주겠다는 것이 (장지를 정해준) 당고종 이치(李治)의 생각이었을까....?


    ~ 이상으로 5편에 걸친 의자왕에 대한 긴 설명이 끝났다. 하지만 백제의 멸망에 대해서는 아직도 부르고픈 애가(哀歌)가 많이 남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애통한 것은 백제 젊은이들이 당한 학살이었다.('소정방이 군대를 풀어 겁략하게 하니 젊고 건장한 자들이 많은 죽임을 당했다/'구당서' 열전 소정방전) 오죽하면 처음에 항복의 대열에 함께 했던 흑치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이었겠는가?('삼국사기')


    그들 백제부흥군의 싸움은 장장 3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백제의 잃어버린 성을 거의 회복하였으며(200여 성) 당나라의 보급로를 끊어 유인원의 당나라 군대를 아사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했다. 아울러 일본에서도 백제구원군 2만7천 명이 파병되어 사상 유래없는 동아시아 국제 대전(大戰)이 벌어지나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백촌강에서 나당연합군에 크게 패하고, 백제부흥운동 또한 구심점이 없어 결국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바, 웅진성에서의 의자왕 피체 사건은 두고두고 슬프고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end-



               


    낙양 북망산의 어제와 오늘

    북망산은 낙양시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부터 왕후장상의 묘지로 사용되었다. 문화혁명 시절 밭으로 개간되며 많은 묘지가 황폐화되었던 바,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의 무덤은 찾을 길 없다. 부여융과 흑치상지의 묘지명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하늘에서 본 공산성

    (앞 화살표가 만하루, 뒤 화살표가 공북루)


                     

    만하루 전경


     공북루 전경


    2011년 10월 공산성 성안마을 땅 속에서 당태종의 연호 정관(貞觀) 9년(645년, 의자왕 재위 5년) 4월 21일의 날짜가 적힌 완전한 형태의 갑옷이 발견됐다. 묻힌지 1,350년 만의 일이었다.


    이 갑옷은 필시 백제국의 마지막 날을 함께 했을 터, 갑옷의 주인공이 누군인지 새삼 궁금하다.(주인공은 당연히 밝혀지지 않았고 백제산인지 중국산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중국 장수 이조은의 것이라는 논문을 본 적이 있는데 중국산 치고는 품질이 좋아 보인다 ^^)


    1. 우위위(右威衛)와 더불어 당나라 수도 장안성과 황제를 호위하는 친위부대의 대장으로. 정3품의 고위관직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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