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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4 - 의자왕의 억울한 누명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3. 00:59


    일찌기 다산(茶山) 정약용은 자신의 시문집 "여유당 전서"에 '조룡대기'(釣龍臺記)를 적은 바 있다. 거기서 정약용은 패망한 나라의 왜곡된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부정한다.

     

    옛날 서울에서 지낼 때, 한 민가 벽에 그려진 그림을 봤다. 황금 투구를 쓰고 무쇠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장수가 쇠줄 한 가닥을 잡고 물 가운데 바위에서 용()을 낚느라 애쓰는 모습이다. 용은 낚시에 걸려 입을 크게 벌리고, 하늘로 머리를 든 채 앞발로 바위를 밀며 끌려 올라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장수와 용은 서로 온힘을 쏟으며 혈전을 벌인다.


    나는 물었다. “저것이 무슨 그림이오.” 

    답이 왔다. “옛날에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백마강에 이르렀는데, 신룡(神龍)이 나타나 짙은 안개와 괴상한 바람을 일으켜 배를 탄 군사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오. 소정방은 화가 나서 백마(白馬)를 미끼로 삼아 그 용을 낚아 죽여 버렸지요. 그러자 안개가 걷히고 바람이 잦아져 비로소 백제를 정벌할 수 있었지요. 이 그림은 그 사연을 표현한 것이오.” 

    나는 말했다. “참 해괴한 사연이오.” 


    그해 가을 나는 금정(金井)에 있었다. 부여 현령 한원례(韓元禮)가 여러 차례의 글을 보내 백제의 고적을 구경하러 오라고 했다. 그래서 부여를 찾았고, 9월 보름에 고란사 아래에 배를 띄워 조룡대 위에 올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황당한 것을 좋아 하는가? 조룡대는 백마강가에 바로 붙어 있다. 이 정도면 이미 부소산 기슭에 닿은 것이나 진배없다. 죽을 힘으로 용과 싸울 필요가 없다. 조룡대의 위치로 보면 소정방의 군사는 이미 부소산성을 함락한 뒤라고 생각된다.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 금강으로 올라왔다면 굳이 절벽이 있는 부소산 북쪽 백마강까지 올 까닭도 없다. 그 이전에 상륙할 쉬운 지점을 놔두고 조룡대가 있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라의 시조(始祖)가 탄생한 때는 한()나라 선제(宣帝) 때의 일이다. 당시 기록된 내용도 황당하기 그지없으며, 백제가 망한 때는 당()나라 고종(高宗) 때다. 용을 낚시로 낚아 올렸다는 설()은 지극히 황당하다. 그러므로 한나라나 당나라 이전의 이야기들은 그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우리나라 역사도 고려시대 이전의 일은 모두 불명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은 "우리문화신문" '부여문화통신' 기사의 것을 빌려왔다. 조룡대 이야기가 왜곡된지는 꽤 오래 전인 듯 정약용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직접 백마강 조룡대까지 가서 설화의 허황됨을 고증하기도 했다. 그 조룡대의 위치는 부소산성의 위쪽에 있으므로 소정방의 배가 이곳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매우 당연한 말씀이다. 취미로 낚시를 했다면 모를까, 부소산성이 함락된 마당에 소정방이 거기서 애써 용을 낚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3편,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내용을 다시 빌리자면 부소산성에서 나당 연합군과 싸우던 백제 장수 의직(義直)은 이곳 바위섬 있는 곳까지 밀려왔다 결국 여기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짐작된다.(아래 사진을 보면 이곳까지 건너갈 수 있다) 따라서 이 바위섬의 이름은 '의직대'나 '의직암'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조룡대(우리문화신문 사진)


    일제 시대의 또 다른 조룡대 엽서



    백마강은  나당연합군이 부여에 오기 전부터의 지명이다. 그 지명 백마가 이후 어느 순간 소정방의 낚시 미끼로 전락한 것인데,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지만 매우 악의적이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낙화암과 삼천궁녀에 관한 이야기 또한 실은 전혀 가당치 않다. 살펴보자면, 낙화암과 관련된 명칭은 고려 말 이곡(李穀)의 시('釣龍臺下江自波')에 처음 등장한다.


    하루아침에 철옹성이 기와장처럼 부서지고(一旦金城如解瓦)

    천척의 푸른 바위 낙화라고 이름 지어졌네.(千尺翠岩名落花)


    아울러 동시대의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가 왕도 부여를 회고한 시 '석탄행(石灘行)'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낙화봉 아래에는 물결만 출렁이고(洛花峰下波浩蕩)

    흰구름 천년 세월 속절없이 아득하다.(白雲千載空悠然)

     

    조선 초 연산군 때 인물인 홍춘경(洪春卿)의 시에서도 보인다.


    낙화암 언덕 꽃은 아직 피었으니(落花巖畔花猶在)

    비바람 치던 그때 모두 날리지 않았음일세.(風雨當年不盡吹)


    삼천이란 단어는 조선 성종 때 김흔(金訢)의 '낙화암'이란 시에서 처음 출현하고,


    삼천 궁녀들이 모래먼지에 몸을 맡기니(三千歌舞委沙塵)

    꽃 지고 옥 부숴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紅殘玉碎隨水)


    명종 조 민제인(閔齊仁)의 '백마강부'에서도 보인다.


    구름같은 삼천궁녀를 바라보니(望三千其如雲)

    후궁들의 고운 얼굴에 눈이 어두웠네.(眩後宮之粉紅)


    하지만 이상은 모두 시적인 표현으로 '백발이 삼천 장'(白髮三千丈)이나 '내리꽂히는 폭포수가 삼천 척'(飛流直下三千尺)과 같은 과장법에 불과할 뿐,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낙화암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기록 또한 없다. 오직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그 책에서 '여러 궁녀와 의자왕이 타사암(墮死巖)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속설이 있으나 의자왕은 당나라로 붙들려 갔으므로 잘못된 속설이다'라고 지적했을 따름인데,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이 이를 근거로 '낙화암에서 여러 비빈(妃嬪)이 자결했다'고 기록했을 뿐이다.('동사강목' 2권 경신년 7월조)


    삼국사기는 의자왕을 주색잡기에 빠진 포악한 망군(亡君)이라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신라 왕손(王孫) 김부식의 고정관념의 반영이거나 저열한 흠집내기에 불과할지니 다른 사서에서는 의자왕이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놀라울만치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신당서', '구당서'의 중국 정통 사서는 물론이요, 부수적 기록인 '대당평백제국비명', '부여융 묘지명', '유인원 기공비', '취리산 회맹문', 나아가 '일본서기'에서도 의자왕과 음주 연관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쉽고 편하게 공박할 수 있는 꺼리임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부재함은 의자왕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할 수 있다.



    부여 정림사 탑의 4면에는 소정방이 새긴 117행 2,126자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지금도 또렷하다.


    정림사 탑과 강당

    정약용은 '소정방의 평백제탑비'를 읽고'(讀蘇定方平百濟塔)라는 시를 지어 그 시절을 통탄했다. 탑 뒤의 건물은 정림사 강당을 재현한 것인데,(1993년) 혹 가시게 되면 백제식 처마 장식인 하앙식(下昻式) 공포를 눈여겨 보시길.(보면 무슨 소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음)


    백제 문화단지의 능사(陵寺) 탑

    능산리 폐사지의 목조탑지를 모델로 하여 1:1 축척으로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왜색인 양 어색하더니 지금은 눈에 익었다. 정림사 탑이 목조탑의 번안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탑과 주변 건축물에서도 하앙식 공포를 볼 수 있다.


    백제 문화단지 전경

    백제의 고도가 너무 빈약함에 1993년부터 2010년까지 17년간, 한성 백제 시기의 위례성과 사비 시대의 사비성, 능산리 능사 등을 복원했다. 처음에는 마뜩찮았지만 지금은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백제 태자 부여융의 묘지명(墓地銘)


    낙양 북망산

    부여융 묘지명은 정확한 시기와 장소를 알지 못한 채 이곳 북망산에서 발견되어진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의자왕도 이곳에 묻혔으나 위치를 알 길 없다. 부여융의 묘지명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재현품이 전시돼 있는데, 이상하게도 원본은 사진조차 구하기 힘들다.


    유인원 기공비(劉仁願紀功碑)

    일제시대 부소산성에서 세 동강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현재 부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복원돼 있다.

    취리산 회맹(會盟)의 장소로 추정되는 공주시 야산(오마이뉴스 사진)

    665년, 유인원은 웅진도독으로 세운 부여융과 신라의 김유신을 이곳으로 불러 양국의 국경을 정하고 화친케 한 후 제를 올린다. 당나라의 백제 지배 야욕을 드러낸 곳으로서, 이때의 회맹문 전문이 '삼국사기'와 '구당서' 백제전에 전한다.




    취리산 회맹문 나오는 '그가 중국과의 거리가 먼 것을 믿고 천경(天經, 하늘의 도)을 우습게 봤다'는 내용, 그리고 나당연합군이 사비성 앞까지 쳐들어왔을 때 비로소 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의자왕은 재위 중의 연전연승에 도취돼 자만했던 구석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그가 재위 기간 중 당나라에 보낸 조공 사신의 횟수가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고구려보다 적었던 것을 보더라도 증명된다.(백제 7회, 고구려 8회, 신라 18회) 선왕 무왕 때 돈독했던 두 나라와의 관계가 의자왕 때 급속히 나빠진 것이다.(무왕이 죽었을 때 당태종이 소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 '구당서'에 전한다)


    정리하자면, 의자왕은 주색잡기로 나라를 망친 왕이 결코 아니다.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어린 시절의 의자왕은 효심이 강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깊었으며,('구당서', '삼국사기') 왕위에 올라서는 용맹스럽고 대담하고 결단성이 있었다.('삼국사기') 아울러 '부여융 묘지명'에는 '과단성있고 침착하고 고고한 성품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기록돼 있는 바, 적국의 기록에서조차 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손호나 진숙보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는 말이 되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단지 패전지장(敗戰之將)일 뿐이었다. 그리고 1승1패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당나라 군사와 신라군에게 각각 1번을 패했을 뿐이고 권토중래를 노려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말한 바대로 그곳은 평지성인 사비성에 비해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고, 훗날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거성(巨城) 임존성(任存城, 충남 예산)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안팎의 아군들이 적절히 호응하면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일이 웅진성에서 벌어졌다. 그곳으로 피신했던 의자왕이 불과 5일만에 성을 나와 항복한 것이었다.(사서에서는 단 한차례의 전투 기록도 보이지 않음에도) 왜 그랬을까? 그 5일 간, 웅진성 안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공산성 동문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은 돌연 성문을 나와 항복한다. 왜 그랬을까?


    * 5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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