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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3 - 백제 장수 의직의 재발견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1. 23:06


    660년 당나라의 백제 침공 작전은 의자왕이 죽어다깨도 알 수 없을 만큼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 일례로 들 수 있는 것이 659년에 당에 들어온 왜(일본)의 견당사(遣唐使) 일행을 661년까지 억류시켜 놓은 일이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백제에 침략 정보를 누설할까 보안을 꾀한 것이다. 이렇듯 당나라는 신라와의 밀약 속에 백제 침공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와 같은 일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의자왕은 멸망 1년 전인 659년에도 신라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 충북 영동)을 공격하는 등, 국력에 자신감을 보인다. 신라는 이 침공을 극력으로 막았다. 이번만 잘 버티면 당나라의 대군이 당도할 터,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짚고 가고 싶은 것이 있으니,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그래서 신라인은 나쁜 놈이라는 고정관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한반도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각일 뿐, 삼국시대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어는 비슷했지만 이로 인한 민족적 동질성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즉 언어의 동질성으로 민족을 나누는 것은 근세 이후의 개념으로 당시는 자신들이 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라로 볼 때는 중국인이나 고구려인이나 백제인이나 모두 외국인일 뿐이니 더 나쁜 놈, 조금 덜 나쁜 놈의 개념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 본기 18년조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최강일 때 백제는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는 것 외에 따로 북위(北魏)에 사신을 펴견해 고구려를 공격해 멸망시켜주기를 청했고,(고구려의 침략으로 조공을 바치기 어렵다는 등의 것을 구실로 삼았으나 당시 고구려와 북위의 외교관계가 돈독해 현실화되지 못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 때도 백제 위덕왕은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멸해주기를 청했었다.(544년, 백제는 그로 인해 오히려 고구려의 침공을 받는다) 즉 백제의 시각으로 볼 때도 고구려와 신라는 북위, 수(隋)와 같은 다른 나라일 뿐이었다.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

    개로왕(재위 455-475)이 북위에 보낸 편지는 도리어 고구려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던 바, 개로왕은 이곳 아차산성에서 목이 달아나고 493년 이어진 한성 백제는 멸망한다.(BC 18 - AD 475)


    성벽의 옛 자취

    아차산성은 백제가 처음 축성했으며 백제→고구려→신라의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고구려 장수 온달(?-590)은 신라에게 빼앗긴 실지(失地)를 회복하러 왔다가 아차산성에서 화살을 맞고 죽는데, 그가 우즈베키스탄인(人) 아버지와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온다르(Ondar)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연세대학교 지배선 교수)


    망대(望臺)의 치(稚)

    지금 남아 있는 성벽과 건물지들은 7세기 이후 신라가 축조한 것이나 아차산성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망대 유적에서는 고구려 성의 흔적인 '치'를 볼 수 있으며,(왼쪽 돌출된 부분) 멀리 한강 너머로는 백제 풍납토성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삼국의 가장 중요한 쟁패지(爭覇地)였음을 여러모로 보여준다.


     

    신라 역시 중국을 애용(?)해왔으니 '삼국사기' 진평왕 본기 13년(611)조에 의하면 진평왕은 수양제에 걸사표(乞師表)를 바쳐 수나라의 고구려 토벌을 주청했고, 당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주기를 청했다.(625) 이에 당태종은 645년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실패하는데, 그럼에도 신라는 648년, 650년, 그리고 659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당나라의 출병을 요청한다. 다만 이번에는 그 대상이 바뀌었으니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공격해 김춘추의 딸과 사위 김품석을 죽이고, 이후로도 끊임없는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백제에 대한 공격을 원했던 것이었다.


    사실 강국 백제의 도발에 신라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보면 648년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신라 서쪽이 10개 성을 빼앗았을 때, 신라의 김유신은 진덕여왕에게 백제와 한판 붙자고 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약한 나라가 큰 나라를 침범했다 위태롭게 되면 어찌하려는가'(以小觸大 危將奈何) 이것이 진덕여왕의 대답이었으니, 이는 당시 신라가 얼마나 힘의 열세를 체감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그런데 655년 신라는 다시 백제·고구려 연합군에 30여 개 성을 빼앗겼던 바,('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이제 신라가 살 방도는 오로지 당나라를 불러들이는 길밖에 없었다.


    ~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 다르게 당시 의자왕의 백제는 상당한 강국이었던 듯 보이니, 우선은 중국 양나라 사서에 백제가 무열왕 이후 다시 강국이 됐다(以百濟更爲强國)는 문장이 보이고, 의자왕 즉위 이후 거둔 화려한 승전의 기록(13전 11승 2패)이 이를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당대의 인구수이니 '구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에 나타난 백제 멸망 때의 인구수는 380만 명(호수 76만호X5)으로, 7년 후 고구려가 망할 때의 인구수 350만보다도 많다.(이는 사서들의 공통된 기록과 논농사가 위주였던 백제의 산업과 여러 곡창지대를 감안해볼 때 신빙성있는 숫자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김춘추가 이리 뛰고 저리 뛴 끝에 마침내 660년 6월 21일, 산동반도 내주(來州)를 출발한 13만의 당나라 군사가 덕물도(德勿島)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나라 사령관 소정방은 마중나와 있던 신라 태자 김법민(훗날의 문무왕/654년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의 영접을 받은 후, 양국의 군사가 7월 10일 사비성 남쪽 소부리(所夫里)에 집결해 사비성을 공함(攻陷)시키기로 약속하고 은밀히 금강 입구 기벌포로 이동하였다.


     

    덕물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덕물도 위치




    7월 8일, 당나라의 배가 백강(금강) 입구 기벌포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사비성에 분주해졌다. 이제 머잖아 당군(唐軍)이 백강 하구로 몰려들어올 터, 백제는 하루빨리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백제는 그때까지도 확실한 작전 지침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에 나타난 당시의 혼란은 다음과 같았다. 크게는, 당나라와 먼저 결전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좌평 의직과, 당나라보다는 신라와의 결전이 선행돼야 한다는 달솔 상영(常永)의 의견이 대립했다.


      "당병(唐兵)은 배를 타고 멀리 왔으니 지금 상당히 곤비해 있을 것이오. 그들이 하륙(下陸, 육지를 밟음) 즈음 돌격하면 필시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오. 당병만 깨뜨리면 신라는 겁을 먹고 물러갈 것이니 굳이 싸움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당병은 멀리 원정을 왔으므로 싸움을 빨리 끝내야 유리하다는 것을 알 것이오. 따라서 하륙 순간에는 전군이 분전할 것이니 우리에게 득이 될 것이 없소. 그보다는 험로를 막아 군량을 바닥내 지치게 만든 후 공격이 가함이 옳을 것이오. 그동안 우리는 신라를 공격하면 되오. 신라병은 우리에게 번번히 패해 겁을 먹고 있으니 그들 먼저 깨뜨려 뒤를 편히 하고, 당병은 기회를 봐 공격하도록 합시다."


    결정은 당연히 의자왕이 지어야 할 터, 하지만 내내 묵묵부답이었다. 왕은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한참동안 좌고우면하더니 갑자기 귀양간 좌평 흥수(興首)의 대답을 듣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16년(656)조에 의하면 과거 좌평 성충(成忠)은 의자왕의 독단적인 정치 노선에 뜻을 달리하다 옥에 갇혀 사망했는데, 그때 성충은 죽으면서 의자왕의 독자노선이 당나라와의 전쟁을 불러 올 것이라 예견하고 이에 관한 유언을 남겼다. 흥수도 성충과 같은 도당이라 하여 고마미지(古馬彌知, 전남 장흥)로 유배를 보냈던 바, 그의 생각을 듣고자 하는 것도 딴은 이해가 갈 일이었다. 흥수의 대답 역시 성충의 유언과 거의 같았다.


      "탄현(炭峴)과 기벌포는 국가의 요충이니 장수 한 명이 칼을 들고 막으면 적병(敵兵) 만 명이 덤비지 못할 것이다. 당병은 기벌포를 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한 후, 양군(兩軍)의 식량이 바닥나고 지친 후 공격하면 백전백승할 것이다."


    사자가 돌아가 흥수의 대답을 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충의 도당이 다시 세력을 얻을까 두려워한 임자(任子) 등의 신료가 그 뜻에 반대하고 나섰다.


      "듣자니 흥수가 오랜 귀양살이에도 전혀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임금을 원망하고 성충의 구은(舊恩)만을 생각하며 복수의 날을 꿈꾸고 있다 합니다. 지금 그는 성충의 유언 찌꺼기를 주워 정세를 오독(誤讀)하고 있는 바, 그 말을 쓸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당병은 기벌포를 지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을 넘게 한 후 반격하면 옹중(甕中, 독 안)에 든 자라를 잡음과 같이 양적(兩敵)을 분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험로에 의지해 적병을 방치하며 군사들의 용기를 거두려 하십니까."


    이렇듯 신료들이 갑론을박하는 사이 방어의 골든타임은 다 지나갔으니 7월 9일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를 지나 백강까지 들어왔고,(본래는 ①썰물 때까지 진입을 막아 배를 긴 뻘에 좌초시키고, ②화공으로 배를 공격한 후, ③뻘에 내려 운신이 힘든 적병들을 궁시로 처리한 다음, ④그 나머지들을 칼로 공격하려는 계획이었겠으나) 돌성(突城, 충북 음성)에 대기하던 김유신의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까지 들어왔다. 당나라 군사가 순식간에 사비성 30리 입구까지 밀려들자 이제는 이러고 저러고 할 짬이 없었다.


    이에 의직은 제 뜻대로 전군(全軍)을 몰아 전선으로 나갔으나 지리(地理)의 이(利)를 얻지 못한 백제군은 중과부적으로 1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패를 당했고, 분전하던 의직은 전사했다.('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20년조) 신라군과의 싸움을 주장하던 달솔 상영과 좌평 충상(忠常)은 계백을 따라 5천 결사대와 함께 끝까지 싸웠으나 생포되고 말았다. 이로서 백제의 마지막 저항은 수포로 돌아가고 사비성은 함락되니 때는 7월 13일,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나흘만이었다.



    '우리역사넷'의 도해


    기벌포의 너른 뻘 밭


    기벌포 해전 전망대(☞ 문무왕의 사천왕사와 감은사')



    하지만 이것이 백제의 패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사비성과 그 일원을 지키는 중앙군, 말하자면 수도방위군과 그 사령부만 무너진 것이고 나머지 22개 담로를 지키는 지방군들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아울러 의자왕은 사비성 함락에 앞서 이미 웅진성으로 몸을 피했던 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비성보다는 웅진성이 방어에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수성만 잘 한다면 성 안팎의 아군이 호응하여 얼마든지 적을 물리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이런 예는 청사에 수없이 많다)


    다만 안타깝게도 궁에서 일하던 나인들은 미처 몸을 피할 새가 없었다.(워낙에 창졸간에 닥친 일인지라) 이에 당나라 군사들에게 쫓긴 그들은 지금의 낙화암 절벽 끝까지 도망쳐 왔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추락해 죽으니 훗날 이곳은 타사암(墮死岩, 자살바위)이라 불리게 되었다. 아울러 낙화암 아래 백강 물가에 솟은 바위는 훗날 용을 낚은 곳이라는 뜻의 조룡대(釣龍臺)라 불렸는데, 이는 백제군을 지휘하던 의직이 죽은 곳이라 하여 훗날 신라인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었다.(의직을 용에 비유하여/이상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앞서 말했듯 의직은 의자왕 8년 신라의 10여 개 성을 공탈하고 이후로도 계속 신라 침공에 앞장 선 장수였으므로 그를 용에 비유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 내가 황산벌과 공주·부여에 처음 간 것은 20세기 말(워낙 오래 전의 기억인지라^^) 세계일보사 문화답사단에 섞여서였고, 마지막으로 간 것은 2013년 한국문화재재단을 따라서였다. 그때 백마강 유람선을 타면 뱃사공이 톤 좋은 목소리로 낙화암과 삼천궁녀, 백마를 미끼 삼아 백제의 호국 용을 낚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 이야기를 어김없이 들려주곤 했는데,(녹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것이 계속되는지 모르겠다. 이후, 이 이야기들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을 뿐더러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이 계속 주지되었기에.(뉘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그와 같은 분위기가 이루어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4편으로 이어짐

    일제 시대의 조룡대 엽서

    위 엽서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정벌할 때 신룡(新龍)이 조화를 부려 배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써 있다. 배 뒤로 보이는 작은 바위섬이 조룡대이다.

    부소산성과 타사암

    강에서 보이는 산 전체를 낙화암이라 부르는데 돌출된 부분이 타사암으로 여겨진다. 그 위쪽이 도성을 방비하던 부소산성으로, 당나라 장수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가 이곳에서 발견됐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지칭한 타사암은 필시 이곳이었으리라.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와 탁본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비로 일제시대 부소산성에서 깨진 채 발견된 것을 지금의 부여박물관 뒤뜰에 비각을 세워 복원했다. 유인원은 백제 정벌군의 부사령관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을 진압했다. 문무왕 3년(663)에 세워졌으며 대리석 비에 의자왕 및 태자 이하 700여 명을 당나라로 압송한 내용 등이 새겨 있는데 머릿돌에는 앞뒤 여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표현법으로 묘사됐다. 



    비각 안의 유인원기공비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오래 전 이 비를 처음 봤을 때 아래 백제탑 비신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의 전율이 왔다. 지금 부여박물관 주자창 계단 위에 밀려난 듯 서 있는 이 비는 그래도 명색이 보물 21호인데 홍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적어도 내가 가진) 안내 팜플렛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보는 시각이야 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 탑이 남아 있는 건 몸돌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때문일는지 모른다. 신라군사들은 백제 땅에 들어와 백제의 탑들을 모두 무너뜨렸으나 이 탑과 미륵사 탑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이 탑은 소정방이 쓴 비문 때문에, 그리고 미륵사 탑은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에 얽힌 전설 때문에..... 물론 내 생각이지만, 아무튼 지금 남아 있는 백제탑은 그 2기가 유이(有二)하다. 




    한가지 상상력을 더 발휘하자면 신라인들이 백제탑을 다 무너뜨린 것은 비열한 보복이나 점령군의 횡포가 아니라 문화적 충격에 따른 열등감 때문이었다. 당시 신라에는 분황사 모전 석탑처럼 중국의 전탑을 흉내낸 탑들만 있었지 본격적인 석탑은 건립되기 전이었다. 이와 같은 탑이 단 한 기도 없을 때이다. 서라벌에 이와 같은 신라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아비지와 같은 백제 망국 유민들이 건너간 후부터이니 불국사 무영탑 전설이 이를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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