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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주몽)의 성(姓)은 무엇일까?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6. 18. 09:43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건국 스토리를 다룬 몇 해 전 드라마 '주몽'은 국민드라마로 상당한 시청율을 구가했다. 총 81부작으로 무려 1년 동안이나 방영되었으며 한 회 방영시간이 1시간 20분으로 영화와 맞먹었다. 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본다는 인기 드라마였던지라 거기 나온 탤런트들은 탑(Top)이었거나 탑이 되었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몇 해 전이란 표현은 어폐가 있는 듯하다. 거기서 주몽의 부인으로 나왔던 방년(芳年)의 송지효 씨가 마흔 살이 되었다 하니 말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말밖에.....
MBC '주몽'은 우리나라에서 고구려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최초의 드라마로도 기억되는데, 그에 힘입어 방송 3사의 드라마에서 이른바 '삼국시대 상품'들이 쏟아졌던 것도 기억이 난다. 아무튼 '주몽'은 인기 있었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고증에는 여러가지로 불충실했으니 모팔모(이계인 분)란 야철장(冶鐵匠)이 강철검을 한(漢)나라보다 훨씬 늦게 만들어내나 훨씬 강하게 만들어내는 고진감래 · 대기만성 스토리에 대해서는 앞서 '고구려 강철검 스토리'에서 그 오류를 지적한 바 있다.
~ 그런데 이 강철검 스토리에는 한가지 큰 오류를 안고 있었다. 동이족(東夷族)의 기술이 중국에 한참 뒤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의도가 '고난을 극복하고 중국에 앞서는 철기 제련술을 개발해 마침내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드라마의 도식적 패턴을 좇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역사 왜곡이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대 중국이 한반도보다 문명이 발달됐고 한반도는 그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장했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그리고 작가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늘 말하려는 것은 주몽의 왜곡된 성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sex나 gender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에 먼저 결론부터 들이대자면 주몽의 성은 해(解)씨다.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니(동부여 왕 해부루와는 형제) 해씨임은 당연한 노릇이다. 드라마에서도 주몽은 해모수와 유화 부인의 애뜻한 사랑에 잉태되어 태어난 아이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다수가 그를 고(高)씨(고주몽)라고 생각한다.
~ 사서를 보면 부여와 고구려는 건국신화의 상당부분을 공유한다. 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르다. 해모수 왕은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천신(天神) 또는 천신의 아들로 등장하는데, 부여 신화에서는 해부루의 아버지이고, 고구려 신화에서는 주몽의 아버지로 그려진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또 해부루 왕의 아들이 금와 왕이라 말하고 있어 족보가 꼬인다. 그렇다면 주몽은 해부루의 손자뻘이 되는 게 맞다. 이 복잡한 관계에 대한 중론은 다음과 같다. 해모수는 부여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부여의 것이 오리지널인데 훗날 부여가 고구려에 병합된 후 고구려의 건국신화로 차용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주몽이 해씨임은 불변이다.
주몽은 분명 해씨거늘 왜 고씨라 부르는가? 광개토대왕비에 그 힌트가 있다. 거기에는 태초에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의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돼 있는 바, 주몽의 성이 해씨임을 알 수 있다.(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양서(梁書)>에서도 고구려의 동명왕은 북이(北夷, 북쪽 오랑캐) 이왕의 아들로써 이왕을 떠나 나왔다고 되어 있다.(高句驪者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 離王之子, 離王出行) 그런데 광개토대왕비에서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 명시하고 있어 우리가 아는 고구려 왕의 족보와 어긋난다.(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우리는 광개토왕을 고구려 19대 왕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구려인의 사고에는 우리가 아는 광개토왕 이전의 18명의 왕 중에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뜻이다. 그 왕을 찾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바로 5대 모본왕(慕本王, 재위 48-53) 해애루(解愛婁)로 대무신왕 해무율의 아들이다. 그는 형인 민중왕 해색주에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성군이었던 전왕(前王)들과 달리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망을 사다 결국 신하인 두로(杜魯)에게 살해되고 만다. 포인트는 모본왕에 이어 왕이 된 6대 태조왕 고궁(高宮)이다. 그는 20대 장수왕보다 더 오래 산 사람으로 무려 118세를 살며(AD 47-165) 94년 간을 왕위에 있었으며(AD 53~146) 전왕들과는 성이 다른 고씨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어불성설의 수명과 재위 기간, 그리고 역성(易姓, 성이 바뀜)은 문자 그대로 역성혁명이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그 혼란이 무려 70년이나 지속되었다. 즉 해씨 정권이 고씨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해씨와 고씨 간의 피 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었고 왕좌가 몇 번이나 뒤바뀐 끝에 결국 고궁이 집권하는 파노라마틱한 광경을 엿보게 해주는 것이다. 사서의 조각들을 모아보면, 고궁은 고추가(高鄒加) 고재사(高再思)의 아들로 모본왕의 아들 해익(解翊)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추론하면 고재사가 역성혁명의 주인공이었던 듯하나 나이가 많은 관계로 아들 고궁이 왕위에 오르고 그는 잠시 섭정을 하다 죽은 듯하다.
고궁이 즉위한 시기는 121년 이전으로, 왕위가 안정된 그해 그는 한나라의 요수현(遼燧縣)을 공격, 요동태수 채풍을 척살하며 서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다.(태조왕의 정복 사업은 왕위가 안정됐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아울러 왕권을 강화시키는 방편이기도 했으리라) 그가 왕좌에 연착륙했음은 국조왕(國祖王), 혹은 태조왕이라는 시호로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고씨의 고구려가 시작되게 됐다는 뜻으로, 이후 마지막 28대 보장왕까지 고씨의 왕위 세습이 이어지게 된다.*
* 이들은 1대 동명성왕, 혹은 2대 유리명왕이 고구려 현을 예속시킬 때 고추가라는 귀족 계급에 편입된 고씨의 후예들이다. 고추가에 대한 설명은 아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따르면 무난할 듯싶다.
고추가의 기원은 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전 원고구려지역의 소국 수장이 칭하던 호칭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가 주변 소국들을 굴복시키며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 수장의 기존 호칭을 그대로 인정해준 것이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국왕을 중심으로 나부체제(那部體制)를 구축하고 관제가 정비되면서 고추가는 그 수여 범위가 왕족과 일부 나부 대표에게 한정되면서 봉작적 성격의 관등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고추가는 고구려 고위 관명 중 유일하게 초기부터 말기까지 보인다. 고추가가 등장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으로, 계루부(桂婁部) 고위 왕족과 전 왕족인 소노부(消奴部)의 수장, 왕비족인 절노부(絶奴部)의 수장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주몽의 성은?
고씨 = O 점(고씨와는 아무 상관 없으므로)
송씨 = 50 점(말은 되므로 ←송일국 ^^)
해씨 = 100 점(해모수의 아들이므로)
북한 역사만화영화 고주몽은 O 점
이상이 해주몽이 고주몽이 된 이유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그 아들인 비류나 온조의 성 역시 아버지 주몽의 성을 따라 해씨였을 것이다. 굴러들어온 돌에 뽑혀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으되 그렇다고 성이 변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기에..... 그런데 우리는 백제 왕족의 성씨를 부여씨라고 알고 있다. 사서의 설명은 없지만 이는 필시 온조가 남쪽으로 온 후 아비의 성을 버리고 부여씨라는 성을 취했기 때문일 것다.(비류는 일찍 죽었기에 성을 바꿨는지 어쨌는지 모른다) 온조는 십제(十濟)라는 새로운 나라를 개창한 마당에 고구려의 성씨인 해씨를 따를 필요가 전혀 없었을 터, 온조와 그 유민들의 본향(本鄕)인 부여를 성씨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뿌리가 고구려가 아닌 부여에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고구려에 우선하는 정통성을 피력한 일이기도 했다. 온조는 갑자기 나타난 듣보잡 유리 때문에 태자인 비류와 함께 남으로 내려와야 했다. 이에 화도 나고 선명성 경쟁도 하고 싶었을 터, 아비의 본국인 부여국을 자신들의 성씨로 삼아 백제가 진짜 부여의 적통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훗날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나왔다(하지만 진짜 적통은 우리 백제다)'고 적시한 것이나,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바꾼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왕은 538년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며 국호도 개칭했는데, 이는 분위기 쇄신의 의미도 있겠지만 고구려에 대한 강한 적의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는 고구려에 빼앗긴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강력한 북진정책을 취했고 실제로 신라와 연합해 한강유역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그 땅을 다시 신라에게 내주게 되었던 바, 분기탱천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다 그만 목숨을 잃는다. 그가 죽은 관산성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충북 옥천인 것은 확실하다.
시인 정지용이 '고향'과 '향수' 등에 절절한 그리움을 그려낸 그곳으로, 뜬금없지만 주옥 같은 시와 곡이 어우러진 '고향'과 '향수'를 담아본다. 그 아름다운 고장에 살던 옥천 수재 곽효섭이는 지금 무얼할는지..... 혹시 이 글 보았거든 댓글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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