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오래 통용된 화폐 오수전(五銖錢)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6. 24. 07:09
오수전(五銖錢)은 기원전 119년인 한무제 원수(元狩) 4년에 처음 주조되어 당나라 초기인 621년까지 사용된 화폐로 장장 740년 간이나 사용됐다. 세계와 비교해보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타의 추종이 불가하지 않을까 여겨지는데, 우연찮게도 고구려의 존속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그것을 고구려의 통화로 던져놓은 바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발굴에서 고구려의 화폐라 할 만한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처치곤란할 정도로 많이 출토된 고조선의 돈 명도전(明刀錢)과 비교되어 더욱 의아하게 생각된다.(☞ '고조선의 돈 명도전')
그럼 지금부터, 많이 들어 귀에는 익으나 정작 뜻은 알 수 없었던 오수전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자. 먼저 명칭을 풀이하자면 오수전은 '다섯 오'(五) 자에 '무게 단위 수'(銖) 자를 쓰는데, 여기서 '수'는 기장(黍)이나 조(粟) 100알(粒)의 무게로 약 0.65g으로 추정된다. 즉 오수전은 1수의 다섯 배에 해당되므로 약 3.25g에 해당되는 무게겠지만,(얼추 비슷하다고 함) 무게보다는 그 가치에 이름의 뜻을 둔 듯하다. 한 끼 양식인 기장이나 조 한 줌의 가치와 동일한 가치가 있는 돈이라는 것이다. 크기는 거의가 2.3cm 내외이다.
말한 대로 오수전은 흔한 편으로 한무제 때 처음 발행된 이 돈은 평제(平帝, 재위 BC 9-5) 치세인 원시 연간(元始年間)까지 법정통화로서 모두 280억 개를 주조하였다. 그 뒤 왕망 때에는 화폐개혁으로 주조가 금지되어 신(新)나라 화폐인 화천(貨泉) 등이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후한 광무제 건무 16년(AD 40) 화천 등의 왕망전(王莽錢)을 폐지하고 오수전을 정식으로 회복시켰다. 이후 오수전은 다시 주조가 재개되어 화폐로써 사용되었던 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거쳐 수대(隋代)까지 통용되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고구려의 화폐는 전해지는 실물이 없고 화폐를 제작했다는 기록이나 구전도 없다. 물론 화폐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은 고분이 죄다 털린 터라(고구려의 고분은 그야말로 벽화만 남은 셈이다) 실물 화폐를 기대하기도 어렵지만 사서를 기초하면 애초부터 오수전이 주력 통화로 사용됐고 쌀이나 귀금속 같은 현물 화폐가 부수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자면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온달의 말을 샀을 뿐 돈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
~ 실제적으로 고구려와 통교한 나라들은 모두 오수전을 사용했으니 한나라는 물론이요 위나라와 오나라도 오수전을 썼고, 선비족의 나라 북위, 후연 등도 모두 오수전을 썼다. 사정이 이러한데 고구려만 특별히 자신 나라 고유의 돈을 제작해 사용했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의 출토 현황을 보면 북한의 경우 평양 정백동과과 황해도 은율·황주 등지에서 오수전이 출토되었으나 분포 범위와 양은 제한적이다. 오수전은 오히려 남한에서 다양하게 출토되었던 바, 백제 풍납토성(1점)을 비롯한 전국 10개 지역에서 1,100점 가량이 출토됐는데, 그 중 980점은 여수 거문도에서 발견되었다. 이 역시 신·후한 교체기에 보트피플이 짊어지고 온 돈으로 여겨진다.
공주 무녕왕릉에서도 매지석(買地錫) 위에서 90여 점이 발견됐는데, 아래 사진처럼 정연하게 발견되어졌음에도 90여 점이라고 설명되는 게 수상쩍다. 문화재 발굴위원 및 기자, 공무원, 구경꾼 주민이 복작대는 졸속 발굴의 와중에 어떤 넘이 한두 개 슬쩍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전쟁 중국 동북공정(III)-고구려의 후예 묘족 (1) 2020.07.09 역사전쟁 중국 동북공정(II)-고구려어와 만주어 (2) 2020.07.02 역사전쟁 중국 동북공정(I) - 이젠 백제사도 중국사라고? (3) 2020.06.22 동명성왕(주몽)의 성(姓)은 무엇일까? (2) 2020.06.18 다민족 다문화 국가 고구려 (1) 2020.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