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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 중국 동북공정(II)-고구려어와 만주어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7. 2. 00:26
앞서 고구려의 화폐에 대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결론은 유감스럽게도 고구려에는 주조 화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고조선과 달리 고구려의 화폐는 이제껏 발견된 것이 없으며 역사적으로도 화폐 사용에 대한 흔적이나 기록이 없기에 화폐가 없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다만 현물 화폐의 사용은 짐작되는 바,(<삼국사기> 온달전) 고구려 700년 역사와 거의 수명을 같이한 오수전(五銖錢)을 현물 화폐와 함께 사용된 고구려의 통용 화폐로 결론내렸던 것이다.(☞ '가장 오래 통용된 화폐 오수전')
하지만 학자들은 여전히 고구려 돈의 발견을 기대하고 있는 바, 고구려는 아직도 밝혀질 것이 많고 밝혀야 할 것이 많은 수수께끼의 나라인 듯하다. 일환으로 오늘은 고구려의 언어를 들여다보려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구려는 고구려어를 사용하였으며 그 언어는 같은 북방민족계 언어인 부여어, 선비어, 거란어와 맥을 같이 하는 언어였다. 이는 중국의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말해지는 부분이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즉 이상의 북방민족계 언어를 쓰는 민족들은 의사소통에 있어 적어도 통역은 필요치 않았다.
같은 부여국에서 파생한 고구려와 백제는 언어가 당연히 같았으니,<남사(南史)>에 나오는 '백제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言語服章略與高麗同)는 기록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겠다. 백제와 신라 또한 언어가 같았으니 <양서(梁書)>에는 '신라의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뒤에야 우리와 통한다'(語言待百濟而後通焉)고 되어 있다. 양나라와 친했던 백제인 통역을 거쳐서야 신라인과 대화할 수 있었다는 말이니 백제와 신라는 같은 말을 쓰는 나라였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 부여·고구려·신라·백제의 언어가 합쳐진 것이 오늘날의 한국어의 어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이 네 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 말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언어는 일본어밖에 없다.(언어가 사라진 게 아니라 나라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와 일본어는 불어·독어·이태리어 등의 굴절어와 비교해 교착어로 불려지는 독립 어군(語群)을 형성하게 되었다.(중국어는 따로 고립어로 불린다)
~ 잠시 설명하자면 교착어는 어근(語根)과 접사의 결합으로서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반면, 굴절어는 어형과 어미의 변화로써 문장을 만든다. 불어·독어·이태리어·그리스어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 언어가 굴절어에 속하는데, 영어는 굴절어라는 설과 고립어라는 설이 맞선다. 고립어는 어형 변화를 하지 않고, 문법적 관계가 주로 어순에 의해 표시되는 언어를 말한다.('다음사전')
그런데 교착어는 한국어와 일본어밖에 없는 걸까?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사정은 다르니 한국어와 일본어뿐 아니라 만주어, 몽골어, 중앙아시아의 일부 언어(공용어인 러시아어와는 다른) 터키어, 핀란드어가 교착어의 범위에 들어간다. 까닭에 (지금은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이들 언어들이 예전에는 우랄 알타이계 언어(우랄어계+알타이어계)로 분류됐던 것이다.
~ 공인된 학설은 아니지만 이들 언어의 뿌리를 홍산문명이 발생한 내몽골 홍산 지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홍산문명권에서 사용된 언어가 각지로 퍼져 나가 교착어의 어원이 됐다는 주장이다. 지금의 내몽골 적봉(赤峰)에서 기원한 홍산문명(紅山文明)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흔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골어, 중앙아시아의 일부 언어, 터키어, 핀란드어, 에스토니아어 등이 교착어에 속함은 언어유형학(linguistic typology)적인 구분이지만, 나는 그와 더불어 교착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구강 구조는 교착어에 맞게 변형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같은 어족(語族)으로서의 친연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할 것 없이 예전 미수다('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했던 핀란드인 타루 양의 한국말 솜씨를 상기해보라.
미수다에 나왔던 상팡(尙芳)이란 이름의 얌전했던 중국인 처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녀가 기억에 남은 이유는 중국인 답지 않은 자연스러운 한국어 발음 때문이었는데 역시 만주족이었다. 만주족은 과거 숙신(식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여직) 등으로 불렸다. 만주족의 기원인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무엇이 없으나 그들이 예족과 맥족의 후예인 것만은 분명하다. <관자(管子)>에서 말하는 '발조선'이나 '발숙신'의 범위가 예족과 맥족의 분포 범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관자>에 대해서는 '기록의 중요성' 참조)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고구려, 옥저, (동)예, 한(삼한), 읍루를 순차적으로 기록해 그들을 한 족속으로 분류했으며, <신당서> 동이 백제편에서는 고구려·백제 멸망 후 많은 수의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말갈족으로 편입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심하게 싸우기도 했고,(말갈은 서기 216년 백제를 공격했다 패퇴했으나 478년 신라를 상대로는 대승을 거둔다) 때로는 의지하기도 한 삼국의 이웃 나라였다. 김부식은 이 국가를 <삼국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일연은 <삼국유사>에 말갈을 포함시켜 다뤘다.(어떻게 언제 배제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말갈 역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는 얘기다)
만주족의 또 다른 이름 여진족의 '여진'이란 단어는 <요사(遼史)>에 처음 등장한다. 요사는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역사서이다. 그 이전 춘추전국시대에는 여진은 숙신으로 불렸고, 한나라 시대에는 읍루, 남북조시대에는 물길, 수당 시절에는 말갈로 불렸는데, 말갈 6부의 하나인 흑수(黑水)말갈이 여진이 되었다는 김위현 교수(<거란의 동국정책> <요금사연구>)의 연구가 있다. 이 여진족은 1115년 생여진(生女眞: 중국에 복속되지 않은 여진족)의 한 부족인 완옌부(完顔部) 추장 아골타가 대금국(大金國)을 건국하며 화려하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는 자신의 뿌리가 신라에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 여진족의 성도 금(金), 즉 김씨 성을 사용했다고 생각했다. 청나라 때 편찬된 <만주사원류고>는 이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바, '신라 왕의 성인 김씨는 수십세를 전해졌으므로 금나라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금으로 한 것 역시 신라 왕실의 성을 따른 것이다'(新羅王金姓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無疑 建國之名亦應取此)라고 적혀 있다. '우리 조상은 한 모서리 땅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으로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공손히 하였다'(自我祖考介在一方 謂契丹爲大國 高麗爲父母之邦)는 기록도 보인다.
후금(後金)을 세운 누르하치 가문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함은 경감부회가 없잖으나, ('愛新覺羅'를 만주어로 읽으면 '아이신주에뤄'인데 청태조 누루하치가 태어난 만주족의 한 부족이름이다. 여기서 아이신은 金· gold의 뜻을 지닌 음차문자로서 '아이신주에뤄'는 '김씨네'라는 의미가 된다) 신라에서 만주로 이주한 김씨 부족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성씨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훗날의 청나라가 되는 후금이 여진족의 금나라를 계승했단 것 또한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우리 민족과 뿌리가 같은 맥족으로 '전국문화정보자원 공향원정'이라는 중국 관영사이트에는 말갈은 맥족의 동음이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靺鞨是貊族同音詞) 그들 여진(말갈)족은 고구려인과 함께 발해국을 세운 사람들로 고구려어와 말갈어를 혼용해 썼을 것으로 짐작되며, 발해 멸망 이후로도 고구려어와 말갈어가 혼용된 만주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민족과 여진족과의 친연성은 이처럼 곳곳에서 드러난다.
2000년 제5차 전국인구조사에 따르면 만주족의 인구는 10,682,262명으로 이중 약 800만 명이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동북 3성에 거주하며 그중에서도 요녕성이 500만 명으로 가장 많다. 동북3성에는 이들 만주족들이 사는 많은 만주족 자치현(자치주보다 작은 개념)이 있으나 만주어를 쓰는 곳은 없다고 한다. 청나라가 중국을 점령했을 때 그 많은 한족에 대해 언어까지는 강요할 수 없었던 바, 소수(少數)어인 자국의 만주어는 자연스럽게 먹혀버렸고 결국 말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만주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서 가장 중국화된 민족으로 손꼽히는데, 중국어라는 거대한 저수지에 말을 빠뜨린 점이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그들 만주족은 분명 예맥족의 후손으로, 넓게 보자면 그들도 한민족에 속한다. 남북통일이 된다면 그들 또한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안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깰 수 있는 묘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중화인민공화국이 강성해지며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속했던 모든 나라를 자국의 역사 안에 편입시키 위한 공식적인 역사 왜곡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중 고조선과 고구려와 발해가 존재하던 동북쪽 땅에 대한 중국 역사로의 편입 작업이 이른바 동북공정이다. 만주족은 어쩌면 그 동북공정의 최대 희생양이다. 그로 인해 제 땅과 역사를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주족은 중국인, 특히 한족과는 본래부터 혈연적으로 아무 상관없는 민족이다. 하지만 한민족과는 뿌리가 같다. 나는 우리가 만주족과 만주족의 역사를 보듬을 날이 꼭 오리라 여기고 있는데, 이는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다. 또 한 가지 관심 있게 보아야 할 소수민족은 중국 남부 지방의 묘족(苗族)이다. 묘족은 중국 남부와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중국어 발음으로는 먀오쭈이다. 중국 내의 인구는 약 895만 명으로 한족, 장족, 만주족, 회족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다. 인구의 절반이 귀주성에 거주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묘족의 언어가 우리와 같은 교착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묘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 한국인과 비슷한 유전자 구조를 보이는 민족으로(조선족은 당연한 것이고, 묘족은 만주족 다음으로 한국인과 유사한 DNA 구조를 보인다) 걸그룹 피에스타 출신의 차오 루가 바로 묘족이다. 느낌만으로도 친연성을 느끼게 해주는 묘족의 비밀을 다음 회에 집중적으로 풀어보도록 하겠다. ☞ '역사전쟁 중국 동북공정(III)-고구려의 후예 묘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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