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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빈출문제 '미천왕의 서안평 공격' 미스터리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6. 4. 07:53

     

    서기 313년 고구려는 낙랑군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남녀 2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이듬해에는 대방군까지 무너뜨려 무려 421간이나 이 땅에 군림하던 한족(漢族) 세력들을 몰아냈는데, 그것들에의 축출이 얼마나 지난(至難)했던지가 '낙랑공주와 자명고(自)' 설화에 잘 녹아 있다. 세상에 '스스로 울리는 북'은 없을지니 미천왕이 낙랑군을 멸망시키는 데 힘겨웠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방군은 상대적으로 쉬었던 듯하다.

     

    '다민족 다문화의 나라 고구려'에 대해 쓸 요량으로 윗글을 시작했으나 막상 써놓고 보니 좀 어색했다. '서기 313년 미천왕의 서안평 공격'은 '327년 소수림왕의 불교 공인'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고구려사의 패러그래프임에도. 아무튼 그래서인지 연대를 지금껏 외우고 있는데, 써놓고 보니 한(漢)의 일개 군현(郡縣)이었던 낙랑군이 421년이나 존치됐다는 사실이 새삼 수상스레 와 닿았던 것이다.

     

    그 421년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왔을까? 출발은 사마천의 《사기》로, 《사기》〈조선열전〉에는 우리 역사 관계 깊은 의미 있는 절대연도가 하나 기록돼 있다.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한나라 무제(재위: BC 141-87)는 그 강역에 한의 지방 군현들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해 다스렸는데,(한나라는 군현제였으므로) 고조선의 멸망 연도가 기원전 108년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해 멸망시킨 313년을 합하면 421년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108+313=421) 

     

     

     

    《사기》〈조선열전〉

    고조선 우거왕의 죽음과 한사군의 설치

     

     

    물론 《사기》에는 낙랑군이 설치됐다는 말은 물론 우리가 아는 현토, 임둔, 진번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한의 군현이 고조선 땅에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후 중국에서는 아주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은 그 군현들(이른바 한사군)을 설치한 한나라는 그 100년 뒤 멸망했고(前漢: BC 202~AD 8) 이후 신(新), 후한(後漢), 삼국시대를 거쳐 위진남북조시대라는 극심한 혼란기가 지속되었다. 놀라운 건 그럼에도 한사군은 변함 없이 존속되었다는 사실인데 그것이 자그마치 후한 멸망 후 320년간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해서 우리가 잘 아는 중국 삼국시대를 살펴보았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한사군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나라 땅에 속하게 되므로. 그런데 《삼국지》<위지(魏志)>에 낙랑의 흔적은 미미하다.(중국이 설치한 동부 군현 중 낙랑군이 가장 강력해 동부 군현을 대표했다 함에도 불구하고) 하물며 '왜인전'까지 마련돼 있는 <위지>이니 만큼 '낙랑전'은 반드시 있어야 될 것 같았음에도.

     

    대신 요동군이라는 새로운 치소(治所)를 다스리는 공손(公孫) 씨 일가들이 줄줄이 출현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현토군 태수 공손역(公孫域)의 휘하에 있다가 동탁 통치 시절 독립하여 요동태수가 된 공손탁(公孫度, 집권기간: 189~204)이다. 이후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에서부터 4대 공손수(公孫脩)까지 공손씨의 일가가 동쪽 지역을 지배하는데, 한때는 관도대전에서 조조에게 패한 원소의 아들들이 요동으로 도망 가 공손 씨에게 몸을 의탁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말왕(末王) 격인 공손수가 위나라 명장 사마의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고(238년) 이후 요동은 다시 위나라의 손에 들어간다.

     

     

    일본 게임 사이트의 공손탁 캐릭터

    공손탁은 공손도라고도 불리며 <삼국지>에 등장하는 북평태수 공손찬의 일가(一家)라 전해진다.

     

    드라마 <삼국지> 속의 공손찬

    북평태수 공손찬은 '18로 제후군'의 한 사람으로 당시 무명이었던 유비를 거둬 휘하에 넣어주고, 조정에 청원해 관직을 얻어주었으며, 유비가 서주를 구원하러 갈 때 자신의 군사를 보태주려고도 한, 유비에게는 정말로 은인 같은 사람이다.

     

    드라마 <삼국지> 속의 유비

    하지만 이때 유비는 이를 사양하고 대신 조자룡을 원한다. 상산 조자룡은 이렇게 유비의 휘하에 들게 된다. 

     

    저 유명한 장판파 싸움에서 자신을 세상에 알린 한마디.

     

    중국 드라마 '무신 조자룡' 속의 윤아

    소녀시대의 윤아는 여기서 상산 군수 하후걸의 딸 하후경으로 나온다.(정혼자가 있음에도 조자룡을 보고 첫눈에 뻑이 감!)

     

    삼국시대 당시 공손 씨의 영역

     

     

    이후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 ?~225)이 요동 땅을 의지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관구검이란 자는 <정사 삼국지>에도 비교적 자세히  언급돼 있기도 하지만 고구려 땅에다 자신의 비석도 남긴 우리와는 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을 앞서 '백발 인물열전(천자문의 저자는 누구인가?'에서 소개한 적이 있기에 여기서는 그 전재(轉載)로써 갈음하려 한다.

     

    ~(천자문의 저자) 종회는 우리나라와도 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인물로서 다름 아닌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다. 알다시피 관구검은 유주자사 당시 고구려의 동천왕이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공격해오자 이를 물리치고, 내친 김에 고구려를 정벌하여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켜 동천왕을 옥저 땅으로 몰아낸 장수인데, 이때 세운 공적비인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가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다. 이후 관구검은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의 전횡에 대항하여 문흠(文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종회와 사마소가 이끄는 대군에 패퇴하다 화살을 맞고 죽는다. 이 과정은 <정사 삼국지>와 <연의>가 대동소이하다.

     

     

     

    일본 게임 사이트의 관구검 캐릭터

     

    드라마 <삼국지> 속의 관구검

     

    위나라 어린 황제 조예에게 칼을 겨누는 관구검

     

    관구검기공비

    245년 관구검이 고구려 정벌을 기념해 세운 비석의 부분이다.(요녕성 박물관)

     

    관구검기공비의 탁본

    1906년 집안현 판석령 도로공사 중 관구검기공비의 조각이 우연히 발견됐다. 길이 25.8㎝, 너비 26.4㎝, 글자 간격 2.7㎝로 생각보다 작은 크기이다.(이 때문에 일본인의 위조품이라는 말도 있다)

     

     

    아무튼 이때 동천왕이 해내지 못한 서안평 점령을 이후 313년에 미천왕이 해내게 되는데, 문제는 <삼국사기>에 쓰여 있는 이 스토리가 과연 사실에 부합되는가와 그 서안평 지역이 어디인가는 지금껏 미스터리다. 하지만 그것이 2000년 이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의 학생들은 미천왕이 313년 서안평을 점령했다고 배웠고, 421년만에 중국의 세력을 쫓아냈다고 배웠으며, 낙랑군이 있던 곳은 대동강·청천강 일대의 땅이라고 배웠다. 아울러 낙랑군과 대방군(황해도 일대)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이 기념비적 사건은 그 시기 및 서안평의 위치를 묻는 형식 등으로 시험문제에 자주 등장했다.

     

    ~ 여기서 '낙랑공주와 자명고(自)' 설화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으니 적이 쳐들어오면 제 스스로 북소리를 내는 초첨단 레이저 기지가 있었던 나라와,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이 멀어 그 장치를 망가뜨린 낙랑국의 공주가 살았던 나라는 분명 미천왕이 멸망시킨 그 나라가 아니고, 낙랑공주와 썸이 있던 호동왕자 역시 미천왕의 아들이 아니다. <삼국사기>에서 자명고가 있던 나라는 낙랑군(樂)이 아니라 낙랑국이다.(다만 한자는 똑같다)

     

    어울러 그 시기는 추모왕과 유리왕에 이어지는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년~44년) 해무율(解無恤) 때이며, 대무신왕이란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과 같은 의미의 시호로서 고구려 초기 가장 많이 영토를 넓힌 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조>에 의하면 대무신왕은 즉위 후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재위 27년 동안 동부여, 압록강 상류의 개마국, 북옥저 근방의 낙랑국, 구다국 등을 정복했다. 더불어 한나라 요동태수의 공격을 잘 방어하기도 했다.(AD 28년) 

     

    지금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썸은 미천왕 때의 일이 아니라고 수정되었지만, 낙랑군이 이 당시 소멸됐다는 주류사학계의 주장은 아직 교과서에 실려있는 듯.

      

    그런데 동천왕과 미천왕이 공격한 서안평은 대체 어느 곳일까? 문자대로라면 그곳은 서쪽의 '편안하고 평평한 땅'이니 일단 압록강은 넘었을 것이다.(당시 고구려의 위치에서 보면 압록강 이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땅 개마고원이다) 그래서 주류사학계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애오라지 주장하는 곳은 단동이다. 단동의 옛 지명은 공교롭게도 안동(安東)이니 중국 쪽에서 보는 '편안하고 평평한 땅'이다.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다.

     

     

    '미천왕의 서안평 공격'

     

     

    <후한서>의 성명은 보다 명확하다. 

     

    "한나라가 설치했다. 하작에 말하길, 탁군에 안평(安平)이 있다. 그런 연유로 요동에 서(西)자를 더했고 치천(甾川)에 동(東)자를 더하였다. 후한 및 진(晉)나라와 관계가 있었다. 나중에 그 땅에 들어온 고구려의 박작성이 되었는데 지금 봉천 요양현 동쪽 60리에 둔전한 곳의 이름이 안평이다. 서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 성 터가 있었다."(漢置.何焯曰,涿郡有安平.故遼東加西.甾川加東.後漢及晉因之.後入高麗爲泊汋城.今奉天遼陽縣東六十里有屯名安平.相傳卽其故址

     

    그러나 진보사학계의 의견은 다르니 그들이 생각하는 서안평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곳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아래 글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이 쓴 글로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글로 판단되어 옮겨 싣는다. 주류사학계에서는 질색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의 주장에 부분 부분 동의하고 어떨 때는 사뭇 감동받을 때도 있다. 아무튼 미천왕의 서안평 공격의 시기는 풀었지만 그 위치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西安平)이란 곳이 있다. 한중 고대사의 주요 쟁점 지역 중의 하나다. 한나라 요동군 산하의 현인데, 고구려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던 지역이었다. 나는 꽤 오래 전에 내몽골 파림좌기(巴林左旗)란 곳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저녁 무렵 오토바이를 개조한 세발 택시를 탔는데, 내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안 기사가 느닷없이 “여기에 고구려 성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고구려는 지금의 요하를 건너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광개토대왕이 정복한 곳 중에 염난수라는 곳이 내몽골 시라무렌 강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한국 강단사학계의 부동의 정설인 ‘한국사 강역 축소론’에 따라서 ‘믿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택시기사에게 부탁해서 가보니 ‘아! 거대한 토성이 있었다’. 다음날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모두 ‘고구려성’이라고 답했다.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조상 대대로 그렇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귀국해서 사료를 찾아보니 거란족 요(遼)나라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 「지리지」에 대답이 있었다. 요나라 수도 상경(上京)이 파림좌기였는데, 『요사』 「지리지」 상경임황부 조에 ‘본래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 땅이다〔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제야 많은 의문과 모순이 한꺼번에 풀렸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조는 “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와 처자를 사로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이 서기 146년 장수를 보내서 한 일로 나온다.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고구려가 공격한 서안평을 압록강 대안 단동(丹東)으로 비정하고, 대방을 황해도로 비정한다. 그 근거란 단동의 옛 지명 안동(安東)의 안(安)자가 서안평의 안(安)자와 같다는 것 하나뿐이다. 강단사학계의 고대사 위치 비정이 개그콘서트 수준이라는 것은 이제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런데 왜 압록강 대안의 단동을 공격했는데 황해도에 있어야 할 대방령이 죽고 평안남도에 있어야 할 낙랑태수와 그 처자가 사로잡혔는가? 강단사학은 답변이 궁해지자 대방령과 낙랑태수 부처가 안동에 놀러갔다가 발생한 일이라고도 해석했다. 개그콘서트도 문 닫아야 할 수준이다.  

     

    그런데 위의 『후한서』 기사에는 주석이 있는데 “『군국지』에서 말하기를 서안평·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郡國志 西安平, 帶方, 縣,並屬遼東郡)”는 것이다. 서안평뿐만 아니라 대방도 요동군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황해도가 언제 요동군이 되었는가? 고구려의 국시 ‘다물(多勿)’은 고조선의 옛 강토를 수복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개국 이래 고구려는 한나라를 서쪽으로 몰아내고 고토를 수복했다.한반도 북부의 낙랑군과 대방군? 물론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한 케이블방송의 요청으로 파림좌기를 다시 방문해 박물관장과 인터뷰했다. 관장은 요사에 여기가 요동군 서안평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고구려 성에 대해서도 “이 지역 사람들은 모두 모두 고구려성이라고 말한다”고 답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북공정 소조의 지침이 파림좌기까지 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후 이 내용이 방송을 타고 나서 다시 파림좌기 박물관에 가서 고구려성의 위치를 물으니 6, 7명 쯤 되는 박물관 직원들이 동시에 ‘고구려성 없다’고 대답했다. 밖으로 나와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역시 ‘고구려성 없다’는 앵무새 같은 답이 돌아왔다. 동북공정 소조의 지침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주입된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은 이처럼 사활을 걸고 역사전쟁에 나서고 있는데 우리는? ‘한국사 강역축소론’ 따위의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이른바 ‘통설, 정설’로 떠받들면서 이를 비판하면 ‘사이비, 유사’ 따위의 비학문적 용어로 매도하고, 보수·진보에 모두 포진한 언론 카르텔이 반복 재생산하는 구조다. 중국학자들은 북한강역까지 갖다 바치는 강단사학자들을 기특하게 여기겠지만 속으로는 경멸하지 않을까? 영토주권을 말할 상황은 아니지만 역사주권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또 문헌을 뒤지고 답사에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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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 소장이 말하는 서안평 고구려 토성


     

    본래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도 언급할 생각이었다. 그래야지 '미천왕의 313년 서안평 공격과 낙랑군 축출'에 관한 제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짧게 써도 적어도 오늘 쓴 만큼의 분량은 할애해야 될 것 같기에. 아울러 낙랑군의 위치는 한국 고대사의 '정말로 뜨거운 감자'인 바, 신중을 기해야 할 것도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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