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도(牛島) 김진사
    탐라의 재발견 2021. 9. 17. 01:06

     

    상허 이태준은 1934년 <농민순보>에 발표한 단편소설 <촌뜨기>에서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령이 농민에게 끼친 해악을 극명히 드러낸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한 2년 후인 1912년 전국 토지조사령을 내려 실질적으로 조선의 땅을 빼앗기 시작하는데 1930년대 들어서는 전답은 물론 임야까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 <촌뜨기>는 주인공 '장군이'가  땅을 빼앗기고 떠돌이가 되는 그 강원도 촌뜨기의 비극을 그렸다. 

     

     

    '촌뜨기 길'이 시작되는 철원 대마리 / 이태준의 소설 <촌뜨기>에서 따와 명명했다.

     

    장군이가 땅을 빼앗긴 이유는 일제의 토지조사령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군이 부부는 산에서 화전을 일구며 숯굽기와 수렵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터인지라 설마 하니 일제가 화전민의 박토까지 빼앗으랴 생각했던 것이었다. 물론 측량을 하고 일정한 양식을 갖춰 신고를 해야 되는 어렵고 복잡한 절차를 이해할 리도 만무했으니, 그 무렵 대부분의 조선사람들이 일제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대부분의 농민들이 문맹이었다) 

     

    당시 사람 대다수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게다가 토지문서까지 있는 내 소유의 땅을 따로 신고할 필요로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미신고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가 되었고, 그것들은 다시 일본인에게 싸게 불하되었던 바, 어제까지 지주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농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해야 했다. 이태준은 이 기막힌 현실을 특히 주시하여 작품에 투영하였으니 '촌뜨기' 외, '고향' '돌다리' '농군(農軍) 등에서도 일제의 토지 수탈이 그려진다.*

     

    * 앞서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삶'에서 말했듯 상허는 공산주의에 경도돼 자진 월북한 작가이다. 그런 그가 월북 후 북한의 토지개혁을 주제로 쓴 '농토'라는 소설의 사상성이 문제가 돼 숙청된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제의 토지 수탈은 이렇듯 지독하고 간악했다. 그래서 제주도 우도에 있는 진사 김석린의 비석은 더욱 빛난다. 일제의 토지조사령이 외딴 섬 우도라고 비껴갈 리 없었다. 일제는 병탄 후 토지 조사 사업을 전개하면서 1912년 (8월 13일) 제정 발표한 법령(토지조사령)을 근간으로, 소유한 토지를 일정 기간 내에 신고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앞서 말한 신고 과정의 복잡성과 민족적 감정으로 이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은 토지를 빼앗기는 형국이 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령 관련 문서 (1924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의 측량 모습 (191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한국의 자본과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건립된 총독부 산하의 국책회사. (현 을지로1가 하나은행 본점 자리)&nbsp;

     

    하지만 우도 사람들은 토지를 전혀 빼앗기지 않았으니 그 배경에는 우도 개척자인 공서(公瑞) 김석린(金錫麟, 1806~?)의 손자  김근시(金根蓍)의 공로가 지대했다. 1912년 총독부의 토지조사령이 이곳 우도에까지 하달되자 섬 전체가 뒤숭숭해졌고, 이에 마을 대표인 고(高)아무개가 김근시를 만나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해결책을 논의했다. 마을 대표가 김근시를 만난 이유는 다음 같았다.

     

    우도는 조선 헌종조 이전에는 입도(入島)가 금지된 섬이었으나 1842년(헌종 8년) 비로소 우도의 기경(起耕, 경작) 허가가 내려졌다. 그러자 제주 동광양 출신으로 1828년(순조28) 생원 시험에 합격 후 진사가 되어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경주김씨 가문의 김석린이 1844년 부인 신씨와 함께 우도로 들어왔다. 말하자면 김석린 부부는 우도의 최초 입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 <경주김씨 익화군 제주파세보(慶州金氏益和君 濟州派世譜)> 등의 문헌에 따르면 이때 김석린은 우도 땅 전체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김석린이 우도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식수 해결을 위한 우물을 굴착한 일로서,(<제주향교지>에는 "지금도 이 우물을 '진사우물'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소재지는 불분명하다) 그밖에도 섬의 지도자로써 우도 이주자들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훈학(訓學)에 진력했다. 그리하여 이원조(李源祚)가 제주목사로 있던 시절, 주민들에게 농산물과 해산물에서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세금으로 사복시(司僕寺)에 납부하도록 하자 김석린은 앞장서 남징(濫徵)의 폐해를 막았다.

     

     

    제주도 홍보물 중에서
    우도 김석린의 집터에 조성된 김진사 역사공원
    복원된 김진사의 집. 김석린은 주변에 다른 집이 들어서지 못하게 해 단 한 가구만 살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가 독야청청을 지향해서가 아니라 이주자들이 흩어져 목축과 농업과 어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도를 개간하기를 바란 까닭이다. (집은 졸속으로 복원된 느낌이다)
    집터 옆의 진사통. 김석린이 빗물을 받아 사용했다는 작은 저수지다.&nbsp;&nbsp;
    진사통의 연꽃
    주변의 딴밭. 주민들은 김진사가 경작하던 밭을 외딴 곳에 있는 밭이라 하여 '딴밭'이라고 불렀다.&nbsp;

     

    그의 애향심과 이타심은 그의 아들인 문인(文人) 난곡(蘭谷) 김양수(金亮洙)에게 이어졌고 손자 김근시에게 이어졌다. 까닭에 대정(大正)연간 마을 대표가 그를 찾아와 사태의 해결책을 물은 것이다. <경주김씨 익화군 제주파세보>의 내용을 따르자면 우도는 본래 김근시 가문의 땅이었으므로 해결책을 상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 김근시가 한 말은 실로 놀라웠다. 자신은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겠으니 주민들은 자신의 연고가 되는 땅을 그 자신의 이름으로 신고하라는 것이었다. 이 기회에 오히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으로써 주민들의 소유권을 확보해준 것이었다.

     

    여차하면 왜인들의 소작민으로 전락할 뻔했던 위기에 오히려 땅을 갖게 된 우도 주민들이었던 바, 그들은 100% 신고를 마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가 없을 수 없었을 터, 은혜에 감동한 사람들이 2000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모금해 김근시를 찾아왔다. 그러나 김근시는 이를 거절하고 조부 김석린의 우도설촌(牛島設村, 우도에 마을을 세움)의 신성한 뜻을 더럽히지 말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은 주민들은 그의 조부 김석린의 공덕을 기리는 '진사김공석린 규휼비'(進士金公錫麟 救恤碑)와 비각을 세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비각에는 우도 입경 허가 60주년이 되는 1902년(광무 6년) 4월에 세운 '진사김공석린 유애비(遺愛碑)'가 함께 보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진사김공석린 유애비'의 근거는 조맹수의 <제주의 섬> 25-26쪽)

     

     

    이 비석이 둘 중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우도 마을신문 달그리안 사진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며 그 비석들은 두 동강 나 방치 · 훼손되어 1962년 주민들에 의하여 다시 새 비(碑)가 세워졌던 바, 비면에는 김진사가 세금의 감면을 위해 애써준 천추에 남을 애민정신을 기려 "繁愛休息千秋不朽 洞演民減縮稅厚 壬寅(1962) 四月 日"의 글자를 새겼다.

     

     

    1962년 세워진 '진사김공석린 유애비'

     

    그리고 2000년 12월에는 우도 천진동 포구 광장 동쪽에도 우도 주민들 명의로 김석린을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에는 전면 가운데에 進士金公錫麟牛島救恤碑(진사김공석린우도구휼비)라 새겼고 좌우에 繁蒙休息 千秋不朽 洞演民  減縮稅厚(번몽휴식 천추불후 동연민막 감축세후, '빈민을 구제한 공적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잠시 쉬었건만 긴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아니하였다. 우도 주민들이 병들어 앓으며 여위었을 때 상소를 올려 세금을 덜고 줄여서 납부하게 한 공로는 매우 지대하다')의 글자를 새겼다. (이 비석은 김진사 역사공원이 조성되며 살던 곳 뒤편으로 이전되었다)

     

     

    &nbsp;진사김공석린 우도구휼비
    새 비석과 옛 비석

    '탐라의 재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정(金淨)의 '이조화명도'  (0) 2021.09.20
    충암 김정(金淨)과 부인 송씨  (0) 2021.09.19
    러일전쟁과 우도 등대  (0) 2021.09.09
    제주도 등대와 도대불  (0) 2021.09.08
    설문대할망과 우도 등대  (0) 2021.09.07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