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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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대쪽선비 면암 최익현탐라의 재발견 2021. 10. 31. 00:44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일반에게 알려진 꼬장꼬장한 이미지 그대로였던 듯, 사헌부 장령 등 언관(言官)을 지내며 흥선대원군을 공박하였던 바, 결국 한직으로 쫓겨났다. 흥선대원군은 왕권 이상의 권한을 갖게 되자 그간 안동 김문(金門)에 밀린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매진했다. 그는 그 일환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을 중건시키기로 하였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여 자금을 충당했다. 최익현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그 폐단을 지적하며 흥선대원군을 격하게 공박했던 것이니 아래는 1868년(고종 5년) 10월 10일, 그가 올린 상소의 일부다. 첫째는 토목 공사를 중지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정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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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과 조광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탐라의 재발견 2021. 10. 30. 00:53
남을 돕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을 흔히 듣는데, 다(多)경험자의 말로는 물질적인 것보다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헤아리는 쪽이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천사의 마음에 악마의 심뽀로 화답하는 경우도 더러는 있으니 이런 선량함을 악용해 한몫 챙기려는 자도 있다. 그럼에도 착한 얼굴과 착한 목소리 속에 숨어 있는 악마를 발견한 것은 쉽지 않아서 대부분 뒤늦게 깨닫고 상처를 받는다. (어떤 체험자의 이야기다)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기도 하는 제주 거상(巨商) 김만덕(金萬德, 1739-1812년)의 경우는 이상의 모든 것들을 극복한 듯 보여 더욱 대단히 여겨지는데, 오늘은 그의 선행을 다시 한번 조명해볼까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선뜻 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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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산지천 석인상의 정체는?탐라의 재발견 2021. 10. 29. 00:16
우리나라가 지방색이 강한 나라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것이 문화적 특질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조형물로서는 장승과 돌하르방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 그중 제주도 돌하르방은 다시 또 지역 나름대로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제주도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3곳으로 행정 분할되었던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돌하르방이 각각 다르다. 육지에서는 이와 같은 지역적 특질이 두르러 지지 않으나 남원 실상사 인근의 석장승 3기는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는 통일성을 보인다. 이중 실상사 바로 앞에 위치한 석장승 2기에 대한 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육지는 제주사람들이 한반도 본토를 이르는 말인데 나도 한번 써봤다) 중요민속자료 제15호. 한 쌍의 돌장승이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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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와 서격렬비도 영해기점표탐라의 재발견 2021. 10. 27. 22:54
육지에 도로원표가 있다면 바다에는 영해기점표가 있다. 도로원표는 도로의 기점(起點) ·종점 또는 경과지를 표시한 것으로 서울의 경우 일제에 의해 설치된 도로원표가 흔히 광화문비각으로 불려지는 칭경비념비각 앞에 놓였다가 1997년 세종로 파출소 앞 도로에 새로 설치되었다. 이 표석을 기준으로 서울~부산, 서울~인천, 서울~광주 등, 서울과 전국 주요 도시 사이의 거리가 결정되는 것인데, 제주시의 경우는 제주시청 앞 거리, 눈에 잘 띄는 곳에 원표가 세워져 있다. 거기 써 있는 바에 따르면 서울~제주 간의 거리는 453km이다. 영해기점표는 관할해역 설정을 위한 기준점으로, 전국에 설정된 영해기점(Terrestrial Sea Base Point)을 연결한 영해기선을 근간으로 하여 12해리의 영해,(나라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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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제주 지배 100년탐라의 재발견 2021. 10. 25. 21:33
몽골인과 한국인의 외모적 유사성에 대해 '기마민족의 후예들 (I)'에서 사격선수 부순희의 예를 들어 말한 적이 있다. 그 문장을 다시 보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의 중계 때는 금메달이 바라다 보이는 현장을 따라 중계 화면이 바쁘게 바뀌는데, 마침 부순희 선수가 금메달을 다투는 순간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9점대의 타깃과 선수들의 얼굴이 번갈아 비치는 그 숨 가쁜 파이널 동안 시청자들은 부순희 선수가 아닌 몽골 선수의 사격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봐야 했다. 카메라 맨 역시 부순희 선수의 얼굴을 몰랐던 듯 계속 몽골 선수에게 포커스를 맞췄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을 몰랐던 캐스터는 그 몽골 선수가 부순희 선수인 양 중계를 계속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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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 수정사 터와 삼별초의 흔적탐라의 재발견 2021. 10. 24. 15:36
제주시의 서쪽에 위치한 외동(행정구역상의 정식 명칭은 외도동)은 제주시의 바깥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중심권이었던 듯하니 이곳에 있었던 수정사(水精寺)는 고려시대 건립된 이후 조선초까지도 130명의 노비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앞서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法華院)를 설명할 때 언급했거니와 절에 그렇듯 많은 노비가 필요했던 이유는 고려시대에는 제주도의 절이 역원(驛院, 공공 여관)의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제주 법화사 불상을 가져간 명나라 영락제') 그만큼 수정사에는 종교적 믿음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가 있었을 터이다. 까닭에 수정사는 법화사, 원당사(元堂寺)와 더불어 제주도 3대 사찰로서의 명성을 누려왔지만 그 두 절은 존재하는 반면 수정사는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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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金淨)의 '이조화명도'탐라의 재발견 2021. 9. 20. 07:13
* '충암 김정과 부인 송씨'에서 이어짐. 앞에 소개한 '우도가'(牛島歌)에서 보았듯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문장은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니 과연 두 번이나 장원급제를 한 자의 글솜씨라 할 만하다. 그런데 충암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아래의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를 보면 단박에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러다 그것을 충암이 그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그림 속에는 곤줄박이나 박새로 보이는 두 마리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그래서 '두 마리 새가 서로 화답하여 우는 그림'이라는 뜻의 '이조화명도'라는 제목이 붙여진 듯한데,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화답하여 우는 것 같지는 않고 위쪽의 수컷이 용감히 수작을 걸어 옴에 (까닭에 나뭇가지가 휘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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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 김정(金淨)과 부인 송씨탐라의 재발견 2021. 9. 19. 05:43
제주 오현단(五賢壇)에 모셔진 다섯 위인 중에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은 그 첫머리를 자리한다. 그 다섯 명 중 제주와 맺은 인연이 가장 빠른 까닭인데, 정작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다. 하지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 중종반정을 다룬 드라마 등에서 그 활약상을 익히 본 바가 있다. 충암은 정암과 동시대의 인물로, 같은 노선을 추구하다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다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충암의 전력을 살펴보면 실로 놀랍다. 충암은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지제교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 주로 사헌(司憲)의 직을 역임하다 문신(文臣)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인 '정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