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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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도(牛島) 김진사탐라의 재발견 2021. 9. 17. 01:06
상허 이태준은 1934년 에 발표한 단편소설 에서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령이 농민에게 끼친 해악을 극명히 드러낸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한 2년 후인 1912년 전국 토지조사령을 내려 실질적으로 조선의 땅을 빼앗기 시작하는데 1930년대 들어서는 전답은 물론 임야까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 는 주인공 '장군이'가 땅을 빼앗기고 떠돌이가 되는 그 강원도 촌뜨기의 비극을 그렸다. 장군이가 땅을 빼앗긴 이유는 일제의 토지조사령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군이 부부는 산에서 화전을 일구며 숯굽기와 수렵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터인지라 설마 하니 일제가 화전민의 박토까지 빼앗으랴 생각했던 것이었다. 물론 측량을 하고 일정한 양식을 갖춰 신고를 해야 되는 어렵고 복잡한 절차를 이해할 리도 만무했으니, 그 무렵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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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과 우도 등대탐라의 재발견 2021. 9. 9. 12:33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의 첫 해전을 서구에서는 제물포해전(The Battle of Chemulpo), 일본에서는 인천충해전(仁川沖海戰)이라고 부른다. 러일전쟁은 만주와 조선 땅을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이 1904년 2월 8일부터 1905년 9월 5일까지 벌인 전쟁으로, 일본은 그 서막을 승리로 장식했다. 선전포고 없이 방심하고 있는 적을 먼저 갈기는, 비겁하지만 유용한 전매특허을 써먹은 결과였다. 기습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러시아 해군은 포격을 당한 바랴그함과 코레이츠함을 자침시켰다. 나포당하느니 자침을 선택한 것인데, 이로써 일본군은 완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어 벌어진 뤼순(旅順)항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기습공격으로 승리했고,(☞ '대한제국 최후의 날') 1905년의 봉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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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등대와 도대불탐라의 재발견 2021. 9. 8. 07:10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등대가 생긴 곳은 1903년 6월 점등한 소월미도 등대와 팔미도 등대가 최초이고, 제주도에서는 1906년 점등한 우도 등대였다. 전국적으로는 다섯 번째이다. 이후 약 10년이 지난 1915년 마라도 등대가 불을 밝혔고 이듬해인 1916년 10월, 비로소 본 섬 제주 산지항에 등대가 세워졌다. 제주 본 섬 등대의 역사는 생각보다 꽤 늦은 편이다. 하지만 그 입지는 기능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기가 막힌 곳에 자리하였던 바, 간혹 배를 타고 육지를 오갈 때면 제주항 주차장 뒤편 물 건너 높다랗게 솟은 사라봉 위의 산지 등대를 매번 경탄으로 우러르게 된다. 예전에 한 지역신문에서 산지 등대가 있는 사라봉이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보다 아름답다고 찬(讚)한 구절을 보고 웃은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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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할망과 우도 등대탐라의 재발견 2021. 9. 7. 07:47
오래전 남원 실상사 가는 길에서 만난 달을 보며 감탄을 거듭한 적이 있다. 필시 인월리라는 지명이 아름다움을 배가시켰을 것이다. '인월'(引月)이란 달을 끌어당긴다는 뜻이다. 그런 곳에서 보는 달이 범상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이다. 또 하나의 행운이었던 실상사 3층석탑에 걸린 만월은 아직까지 최고의 '인생 뷰'로 남아 있다. 지리(산) 8경이라는 '벽소령의 달'도 그에 못지않다. 벽소령은 하동 화개면과 함양 마천면을 이어주는 고개 이름으로 '벽소'(碧宵)는 '푸른 밤'이란 뜻이다. 벽소령은 어감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뜻으로 인해 달은 더욱 빛난다. 다만 이름값을 하려 함인지 매양 볼 수는 없다. 벽소령 일대의 다변하는 날씨 탓인데, 어쩌면 그래서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보석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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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구한 법화사 아미타삼존불은 어떻게 생겼을까?탐라의 재발견 2021. 9. 5. 06:11
명나라 홍무제와 영락제가 제주도를 껄떡댄 사실을 앞서 말한 바 있다. 만일 이것이 현실화됐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반면 중국으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니 제주도 땅 자체를 넘어 동지나해의 반을 먹을 수 있는 찬스를 놓친 셈이다. 중국은 막대한 영토에 비해 의의로 바다의 지분은 적다. 그래서 손바닥 만한 섬이라도 더 가지려 바닷속 암초에다 시멘트를 들이붓는 좀스럽고 안쓰러운 짓을 지속하고 있는데 아래의 영토분쟁 지도를 보면 그 딱한 사정이 이해도 된다. ※ 여기서 국유화란 그전에 실효지배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개인 소유로부터의 국유화를 말한다. 2012년 8월 15일 중국인 시민단체가 이 섬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9월 11일에 개인 소유였던 섬 3개를 20억 5천만 엔에 구입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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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永樂帝)도 제주도를 탐냈다탐라의 재발견 2021. 9. 4. 05:20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는 명나라의 3대 임금으로 명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다. 주원장은 맏아들 주표를 황태자로 세웠으나 제위에 오르기 전 급사했다. 이에 주원장은 용맹하고 명석했던 넷째 아들 연왕(燕王) 주체를 후계자 물망에 올렸던 바, 주체는 당연히 자신이 황제의 자리를 이을 줄 알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장자 계승의 원칙을 내세운 신하들의 주장에 밀렸고 결국 죽은 주표의 아들인 주윤문이 건문제(建文帝)로 제위를 이었다. 1398년, 주윤문의 나이 16살 때였다. 주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지만 절치부심하며 칼을 갈았다. 그러다 건문제가 번왕(藩王,주원장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번주의 왕)의 세력을 꺾으려는 시도인 삭번책(削藩策)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그는 자신의 반란군을 오히려 난리를 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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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법화사 불상을 가져간 명나라 영락제탐라의 재발견 2021. 9. 3. 07:48
서귀포시 하원동 소재 법화사(法華院)는 고려시대 건립된 사찰로, 상원(上院, 위의) 존자암, 중원(中院, 중간의) 수정사와 더불어 제주도 명찰(名刹)로서의 유명세를 누렸다. 하원동이란 지명은 그래서 생겨났을 터이다. 제주에서는 절이 역원(驛院, 공공 여관)의 역할도 한 까닭이니, 한때 382명이나 되었다는 노비는 필시 역원에 딸린 자들이었을 것이다.(그밖에는 그렇게 많은 노비가 존재할 이유가 없을 터) 앞서 '장보고와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에서도 잠시 언급했거니와 지난 2015년 이곳을 찾았을 때는 입구에 '해신 장보고(海神 張保皐)'라고 적힌 거대한 석상과 사적비가 서 있었다. 산동 법화원을 세운 장보고와의 연관성을 내세워(사찰 이름이 비슷하며, 하원마을 포구의 옛 이름이 당포·唐浦로 불렸다는 이유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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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조 주원장은 제주도를 명나라 땅으로 생각했다탐라의 재발견 2021. 8. 18. 06:11
국립제주박물관 전시관 벽면에는 세계사 연표와 제주도 역사연표가 정연하게 마련돼 있다. 그러면서 중요 사건을 돌출시킨 그 연표들을 바라보다 문득 작은 글씨의 문장 하나에 눈길이 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81년. 명, 운남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솔을 제주에 안치. 이게 무슨 소린가? 명나라가 운남 양왕의 가족을 왜 제주도에 유배 보내는가? 제주도가 제 땅인가? 그렇다면 그때 고려 정부는 어떤 대응을 했으며, 또 양왕의 가족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국립제주박물관 연표의 위 글을 읽은 사람은 당연히 이와 같은 생각을 할 터, 이에 상황을 조금 상세히 알아보았다. 명태조 주원장은 1328년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잘 알려진 그대로 주원장의 어린 시절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으니, 전염병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