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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신이 되어 복수를 한 단종 모 현덕왕후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2. 9. 29. 23:04

     

    전에도 말했거니와 사는 곳이 구리시 동구릉 근방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자주 찾게 되는데, 그렇다고 혼자 간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누군가 구리시를 찾아왔을 때이다. 그럴 때 동구릉 구경을 시켜주고 입구의 왕릉갈비(지금은 동구릉떡갈비로 바뀌었음)에서 식사 한 끼를 대접하면 최소한 소홀함은 면한다. 왕릉 관람에 있어서도 이제는 요령이 생겨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수릉과 두 번째의 현릉은 그냥 통과하고 세 번째 릉인 이성계의 건원릉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다음은 영조의 원릉이나 선조의 목릉으로 간다. 

     

     

    목릉 가는 길 / 홍살문이 보인다.
    목릉 선조 능
    목릉 의인왕후 능
    목릉 영창대군의 모 인목왕후 능
    목릉의 원경 / 선조와 의인왕후 능이 보인다.

     

    수릉과 현릉을 지나치는 이유는 무덤 주인공의 유명도가 낮기 때문으로, 수릉은 추존 왕 문조(효명세자)와 부인 신정왕후의 능이고, 현릉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이다. 그 생소함에 방문객의 표정은 대개 심드렁하다. 까닭에 나도 더 이상의 말을 않고 지나치지만, 사실 이 무덤의 주인들이야말로 사연이 많은 분들이다. 일례로, 문조의 부인 신정왕후는 우리가 잘 아는 조대비, 바로 그분이니 남편 효명세자가 죽은 후 무려 33년 동안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의 차남 명복(고종)을 왕위에 올리며 지존의 지위로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신정왕후 조씨(1808~1890)의 초상화
    신정왕후의 능

     

    문종도 단명한 까닭에 할 말이 없을 듯하지만, 그의 업적과 부인들에 관한 일화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문종 부인 레즈비언 썰은 사실일까?'에서 길게 늘어놓은 바 있다.

     

    축약하자면 문종은 세자 시절 총 3번의 혼인을 했으니 ▲휘빈 김씨 ▲순빈 봉씨 ▲현덕빈 권씨로서, 이중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는 전례 없던 해괴한 짓을 저지름으로써 궁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 질린 시아버지 세종은 새로 세자빈을 간택하지 않고 승휘(承徽, 후궁) 중 정숙한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세종은 빨리 후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좌의정 허조의 조언에 따라 세자빈 외 권씨, 정씨, 홍씨 3명을 승휘로 들였다) 

     

    그녀가 오늘 말하려는 현덕왕후 권씨이다. 권씨는 승휘 시절에 두 딸을 낳았는데 첫째 딸은 미숙아로 태어나 곧 죽었고, 둘째 딸은 비운의 여인 경혜공주이다.(경혜공주의 사연은 뒤로 미룬다) 그리고 세자빈이 된 후 1441년(세종 23) 경복궁 자선당에서 아들을 낳으니 훗날의 단종이다. 드디어 세종이 기대하던 원손이 탄생한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권씨는 다음날 산후열로 사망하고 말았다.  

     

     

    경복궁 자선당의 진짜 유구
    자선당은 일제시대 일본으로 옮겨져 도쿄 오쿠라 호텔에 놓였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그후 기단과 주초만 남은 것을 김정동 목원대 교수가 찾아내 1995년 경복궁으로 돌아왔으나 훼손이 심해 복원되지 못하고 건청궁에 놓이게 되었다.

     

    세자빈 권씨는 현덕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남편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되어 안산 소릉(昭陵)에 모셔졌다. 하지만 사후로도 평안하지 못했으니, 1456년(세조 2)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기도 사건에 연루된 현덕왕후의 친정어머니와 남동생이 처형당했다. 그리고 현덕왕후도 추폐(사후 폐위)되어 신주는 종묘에서 내려져 불살라지고, 무덤은 파헤쳐져 시신이 안산 바닷가에 버려졌다.

     

    사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았다 뿐, 이후 그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까닭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고, 또한 세조도 처음에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심약했던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 이장(李暲)은 늘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 제 아비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몰아냈던 바, 그게 늘 마음 쓰인 탓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연산군이 큰엄마 월산대군부인을 범했다는 썰은 사실일까?'

     

    그리고 현덕왕후의 혼령은 급기야 세조의 꿈에도 나타나 시동생(세조)에게 분노하며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는 저주를 퍼부었다. 세조는 이 악몽에 잠을 깼는데, 바로 그때  환관이 달려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급서했음을 고했다. 세조로서는 현덕왕후가 제 아들을 데려갔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바, 소릉을 파헤쳐고 시신까지 훼손하게 된 것이었다.

     

     

    안산문화원 마당의 소릉 상설과 난간석 / 안산군 와리면 목내리에 있던 소릉 석물들을 옮겨 놨다.
    혼유석 받침으로 사용된 고석. 4개 중 2개만 남았다.
    안내문 / 세조를 세종으로 오기했다. (뉴스타워 사진)

                                                                                                  

    이상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의경세자 이장이 사망한 날은 1457년(세조 2) 9월 2일로, 단종이 유폐되어 사망한 1457년(세조 2) 10월 21일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의 이야기는 당시 대중의 정서를 반영한 픽션임이 확실하지만, 소릉이 파헤쳐진 것은 세조 역시 혼령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아울러 이에 관한 민간의 설화도 꾸역꾸역 재생산되었으니, 세조가 평생을 고생한 피부병은 현덕왕후가 꿈애 나타나 침을 뱉은 자리가 점점 퍼져나간 것이라 하고, 바닷가에 버려졌던 현덕왕후의 관은 어떤 승려가 바닷가에서 들리는 여자의 통곡 소리를 듣고 찾은 것이라고 한다. 즉 지금 동구릉 현릉 내의 현덕왕후 무덤에 묻힌 관이 바로 그때 발견된 관이라는 것인데, 야사와 정사가 혼재된 이야기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안산 부근 절의 승려가 바닷가에 나왔는데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승려가 소리를 따라갔으나 사람은 없었고 시신 없는 빈 관 하나만 발견되었다. 괴이하게 여긴 승려는 관을 풀과 돌도 덮어 보존했다. 이후 50여 년이 지난 중종 연간, 현덕왕후의 연좌제 적용이 합당하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온 후 합의를 거쳐 왕비 복위와 현릉 합장이 결정되어지는데,(1513년 4월 17일) 이때 묻힌 관이 과거 승려가 발견한 관이라는 것이다.

     

    야사에는 바닷가에 묻힌 현덕왕후의 관을 찾는 스토리가 덧붙어 있다. 현덕왕후의 복위가 결정되자 관을 찾기 위해 안산 바닷가 언덕을 팠으나 아무리 파도 관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감역관이 꿈을 꾸었다. 시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현덕왕후가  온유한 목소리로 "너희가 고생이 많다"며 위로하는 꿈이었다. 잠을 깬 감역관은 곧바로 꿈속을 장소를 찾아 땅을 팠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시신 없는 빈관이 나왔다.

     

     

    관을 발견한 장소에 세워진 관정지  표석 / 안산 목내동 공단 내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니, 현덕 왕후는 의경세자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부자를 괴롭힌 이후에도 다시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에게도 현몽해 괴롭혔다. 이에 의경세자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해양대군 이황(李晄, 8대 임금 예종)이 즉위 13개월 만에 병사한 일,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대군 이정(李婷), 잘산군 이혈(李娎, 9대 임금 성종)이 단명한 일도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조 가계도


    이야기는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으니, 성종이 죽은 연유는 남효온 등이 현덕왕후를 복권시킬 것을 상소했음에도 이를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요, 중종 때 현덕왕후를 복권이 다시 논의될 때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는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일부 신하들이 현덕왕후의 복권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실제와 부합하니 종묘 낙뢰 사건 이후 현덕왕후의 복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성사되었다)

     

    그리고 그때  현덕왕후의 복위를 앞장서서 반대한 정국공신 유순정(柳順汀)영의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사했는데, 이 또한 현덕왕후의 저주로 치부됐다. 어느 날 집의(執義) 권민수(權敏手)가 숙직을 서다가 꿈을 꾸었다. 현덕왕후의 외손자인 해평부원군 정미수와 유순정이 다툼을 벌이는데, 유순정이 크게 쫄리는 꿈이었다. 그 후 곧 유순정이 병사하였던 바, 그 또한 현덕왕후의 복위를 반대한 까닭이라는 소문이 났다. 

     

     

    진품명품에 나왔던 유순정 초상 / 김종직의 문하로 박원종, 성희안과 함께 중종반정을 주도하였다.

     

    그밖에 <음애일기(陰崖日記)>에 나타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음애일기>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가 1509년부터 1516년 사이에 일어난 조정 사건들을 쓴 일기이다.

     

    17일에 소릉(昭陵, 현덕왕후) 옛 무덤을 팠다. 소릉이 폐한 일을 역사에는, "후모(后母) 소생 아우 권자신(權自愼)이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노산(魯山, 단종)을 회복할 것을 꾀하다가 베임을 당했으니, 후모도 연좌되어 폐해지게 되었는데, 정부의 청으로 인하여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하였을 뿐, 그 시말(始末)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소릉(현덕왕후)은 현릉(문종)의 배필이 되어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덕(德)과 행동이 겸하여 지극해서 크게 영릉(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았고, 나이 21세에 노산을 낳다가 난산(難産)으로 인하여 병이 많더니,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광묘(光廟, 세조)가 즉위하니, 노산은 영월(寧越)로 피해 나갔다가 4년이 지난 병자년에 옛 신하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 등이 함께 노산을 회복하기를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들과 더불어 꾀한 자는 모두 한 시대에 명망있는 사람들이었다. 권자신이 이 계획에 참여한 것과 소릉이 자신에 연좌되어 폐함을 당한 것은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정축년(丁丑年)에 광묘(세조)가 일찍이 금중(禁中)에서 대낮에 가위 눌리는 괴이한 일이 있었다 하며 즉시 명하여 소릉을 폐하게 했다. 그때 사신(使臣)이 먼저 석실을 부수고 관을 끌어내려했으나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군민(軍民)이 해괴히 여겨 곧 글을 지어 제사 지냈더니, 관이 비로소 나왔다. 3, 4일 동안 밖에 내버려 두었다가 명하여 백성의 예로 거두어 장사 지내게 했다.

     

    능을 파기 수일 전 밤중에 부인의 우는 소리가 능 안에서 나기를, "장차 내 집을 무너뜨리려 하니 내 어디 가서 의지한단 말이냐" 하는 소리가 마을 백성들에게까지 들리더니 얼마 안 되어 변이 일어났다. 비록 언덕에 옮겨 묻었으나, 자못 영이(靈異)한 것을 나타내서 마을 백성들이 그 옛 능 자리의 나무나 흙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풍우가 일어 서로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경계시켰다.

     

    부로(父老)들이 그 시말(始末)을 눈으로 보고 자세히 말하는 자가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추복(追復, 사후 복위됨)한 것은 하늘이 경유(驚諭)함을 보였고, 조정 의논과 임금의 결단이 합치되어 50여 년의 귀신과 사람의 원통함을 풀게 되었으니, 종사(宗社)의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다만 옮겨 묻기를 창졸간에 하였고, 수축하고 성묘함이 오랫동안 없어서 법물(法物, 관)을 얻어 보지 못할까 염려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능을 파니 안팎 관이 모두 형체가 있고 염습(斂襲)한 것이 완전해서 관을 바꿔 쓰는 데는 다만 법의(法衣, 왕후의 정식 의복)로 그 빈 데를 메울 뿐이었으니, 아,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 <음애일기>에는 시신이 온전하다)

     

    5월 6일에 현덕왕후를 다시 태묘(太廟, 종묘)에 모시었다. 모실 때에 알현하는 것과 올려 모시는[升祔] 예를 한결같이 처음 제도에 의하니, 모시고 제사 지내느라고 뜰에 있던 자들이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새 능은 옛 현릉의 좌편에 있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멀지 않고 다만 소나무와 삼나무[杉]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관을 광중(壙中)에 내린 뒤에 두 궁의 소나무 한 그루가 4, 5일이 못되어 무단히 말라버렸다.

     

    시역제조(視役提調) 장순손(張順孫) 등이 공인(工人)에게 명해서 베게 하니, 바로 그 가린 것이 열려서 두 능 사이에 다시 가린 것이 없어지므로 사람들이 모두 정령(精靈)의 감동한 바라 하였다. 또 능을 파던 날 옛 능을 둘러싸고 청명하던 날에 큰 비가 내리다가 얼마 후에 그쳤으니, 참으로 괴상스러운 일이었다.

     

     

    현릉의 현덕왕후 능과 건너편 문종 능
    현릉의 현덕왕후 능 / 앞의 봉토는 문종 능이다.
    과거 왼쪽 문종 능과 현덕왕후 능 사이에 있던 소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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