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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이 된 삼미 슈퍼스타즈의 인호봉과 장명부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2. 12. 10. 23:42

     

    인호봉이라는 전설적인 투수가 있었다. 그는 최동원, 선동렬 급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가 가진 투수 부분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자신이 고교시절에 달성한 14타자 연속 삼진과 41이닝 무실점의 대기록이다. 이는 전인미답의 경지임에 분명하지만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며,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특별히 그를 기억하는 이유인즉, 위의 대기록과는 별개로 라디오와 TV 야구중계에서 투수 인호봉을 너무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다. 인천고등학교 시절 불세출의 기록을 세우며 인천고등학교를 일약 야구 명문학교 반열에 올려놓은 그는 당시 최고 투수상, 최고 타자상, 도루상, 출루상의 4관왕을 달성한 적도 있었다. 고교시절 140km 중반대를 찍던 그의 공은 가히 언터처블이었다.
     

    당시 인천은 야도(野都)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야구도시라는 뜻으로서, 인천은 구한말 선교사들이 상륙하며 가장 먼저 야구라는 스포츠를 선보인 도시이기도 했다. 이후 인천은 줄곧 대한민국의 고교야구를 이끌었으므로 그와 같은 별명이 붙었는데, 당시는 동산고등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가 인천 야구의 양대산맥이었다. 그런데 인천고등학교는 인호봉이라는 걸출한 선수의 등장과 함께 그 양강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일약 그 양강에 못지않은 전국구 야구명문고가 되었다.

     

    인호봉은 인하대를 거쳐 실업팀 한국전력에 입단했고 1982년 프로야구의 탄생과 함께 인천·경기를 연고로 하는 프로팀 삼미수퍼스타즈에 입단했다. (지금 SK의 조상팀이다) 그리고 1982년 3월 28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대망의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스타군단 삼성라이온즈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었다. 당시 삼성에는 경북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가대표 투수 황규봉과 포수 이만수가 있었지만 약체로 평가되던  삼미슈퍼스타즈에 대구 개막전에서 패하며 체면을 구겼다.

     

     

    그 시절의 인호봉

     

    하지만 당시 삼미슈퍼스타즈는 워낙에 선수층이 얇았기에 전기 리그 10승 30패, 후기 리그 5승 35패로 시즌 최저 승률 1할8푼8리의 초라한 성적으로 꼴찌를 했다. 인호봉은 그 와중에서 선발과 중간계투를 오가며 활약했는데, 선발로 완투하고도 그 다음날 경기에 중간계투로 나온 적도 부지기수였다. 요즘 같아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워낙에 투수가 귀했던 삼미슈퍼스타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삼미슈퍼스타즈 엠블럼

     

    그는 그해 팀경기의 절반 쯤에 해당하는 38경기에 등판하여 무려 133이닝을 던지며 팀을 이끌었지만 방망이의 약세로 5승10패2세이브의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 들어야 했다. 방어율도 6.03을 기록했는데, 133이닝을 던진 투수로서의 피로도를 생각하면 어쩌면 훌륭한 방어율일 수도 있었다. 즈음하여 그는 속구 위주의 정통파 투구에서 변화구 위주의 기교파로 변신했다. 

     

    꼴찌 삼미슈퍼스타즈는 이듬해 후쿠시 히로아키로라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를 영입했다. 그가 그 유명한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로 그는 1983년 자그마치 427⅓이닝을 소화하며 팀의 100경기 가운데 60경기에 등판했다. 그는 이틀 연속 선발투수로 등장한 적도 있었지만 일본 프로야구에서 익힌 다양한 변화구로 힘들이지 않고 한국타자들을 요리했다. 그래서 그는 너구리, 혹은 오중인격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 시절의 장명부

     

    장명부는 그해  60경기에 등판해 30승(16패6세이브)을 올렸다. 이 또한 한국야구에서 깨지지 힘든 대기록으로서, 기타 최다 이닝(427.1), 최다 완투(36), 최다 선발등판(44), 최다 타자 상대(1712)의 기록을 남겼고, 더불어 최다 피안타(388)의 불명예도 남겼다. (던진 이닝 많았던 까닭이니 사실 불명예라 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로 전설 같은 기록이다. 

     

    그 장명부를 인호봉과 임호균 투수가 뒷받침하며 삼미슈퍼스타즈는 전·후기 모두 2위에 올랐다. 하지만 전기와 후기로 나뉘었던 리그 중 한 번이라도 1위를 기록해야 포스트시즌(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규정 탓에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다.

     

    * 당시는 리그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전·후기 각 1위 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합리적인 제도를 채택했지만 1987년 삼성라이온즈가 전·후기 우승을 독식하며 한국시리즈를 실종시키는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초반기에 너무 혹사당했던 탓일까, 장명부는 다음 해에는 이에 크게 못 미치는 성적을 냈고 1985년에는 단일 시즌 최다 패배 기록인 25패를 당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혹사당한 인호봉 역시 성적이 좋지 못했으니 삼미슈퍼스타즈는 3시즌 연속꼴찌를 기록했다. 감사용이라는 패전처리 전문 마무리투수가 등장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영화화되기도 했던 감사용 투수 스토리

     

    이후 인호봉과 장명부는 가을 낙엽처럼 프로 야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장명부는 1990년대 초, 다사다난했던 한국을 떠나며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행방이 묘연했던 그는 (2004년 SK 와인번스가 문학야구장 개막전에 그를 초청하려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2005년 일본 와카야마현 자신이 운영하던 도박장(마작 하우스) 내실에서 고독사 했다는 소식을 고국에 전했다. 당시 54세였다.(생몰 1950~2005년) 

     

    장명부가 떠나기 앞서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인호봉은 상업은행 행원을 거쳐 인천 제일유리에 입사했다. 그리고 이후 사장까지 오르며 명망 있는 기업인으로 성공하였으나 올해 3월 돌연 그의 사망 소식이 경기일보에 실렸다. 2021년 12월에 당뇨 합병증으로 별세했다는 것이었다. 63세의 아직은 젊은 나이였는데,(생몰 1958~2021년) 오는 12월 18일이 그의 기일이라고 한다. 

     

     

    인천 제일유리 사장 시절의 인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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