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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의 인목대비와 명빈 김씨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3. 2. 14. 21:56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는 남한강의 물줄기와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두물머리 승경을 품은 절로 유명하다. 앞서 '남양주 겨울기행 - 여유당과 수종사 & 다산 정약용'에서 말한 대로 그 승경을 보기 위해서는 610m 높이의 운길산을 오르는 수고를 해야 한다. 절이 정상 가까운 곳에 위치한 까닭인데, 그래서 수종사를 갈 때면 언제나 이 절묘한 심처(深處)를 찾아낸 어떤 이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사적기(寺跡記)는 발견자 중의 유력 후보로서 세조로 들고 있다. 사적기에 따르면, 피부병에 시달리던 세조는 1408년(세조5년) 치료를 위해 강원도에 다녀오다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고 새벽에 종소리를 듣는다. 이에 종소리를 따라 운길산을 오르게 되었는데 그 종소리는 다름 아닌 바위굴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세조는 굴속에서 18 나한상을 발견하는 바, 이 나한상들을 봉안할 절을 짓고, 낙수(落水) 종소리가 들린 곳이라 하여 수종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 아님은 수종사 대웅보전 옆에 자리한 사리탑으로 인해 금방 밝혀진다. 이 사리탑 옥개석에 太宗太后貞□翁主舍利塔施主□□柳氏錦城大君正統己未十月日立(태종태후 정□옹주 사리탑 시주 □□유씨 금성대군 정통기미 10월일입)이라고 새겨진 글이 있기 때문이다.
즉 1439년(세종 21)에 태종의 부인(의빈 권씨)이 발원하고 유씨와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이 시주자가 되어 조성한 정□옹주의 사리탑임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 사리탑의 주인공은 예전에는 정의옹주로 추정되었으나 지금은 태종의 다섯 번째 딸 정혜옹주(?~1424)로 수정되었다. 정혜옹주는 태종과 의빈 권씨 사이에 태어났으며 생전에 불심이 깊었는데 다비를 하자 사리가 나왔다고 전한다
이 사리탑은 지대석(地臺石)과 2층의 기단부, 탑신, 팔각지붕 모양의 옥개석 및 상륜부까지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건립연도가 확실하여 승탑 연구의 바로미터가 되는 까닭에 일찍이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미적으로도 뛰어나 수작(秀作)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탑의 주인공인 정혜옹주는 수양대군(세조)의 고모로서 생몰연대가 세조 치세에 앞서는 바, 절이 세조 때 세워졌다는 전설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팔각오층석탑에서 두 차례에 걸쳐 발견된 유물들이다. 대부분이 불상인 이 유물들은 석탑의 중수, 혹은 해체·이전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1967년 1차로 1493년(성종 24)에 봉안된 불상들이 석탑 1층 기단과 초층 옥개석에서 6구가 발견되었다. 이어 1970년 해체·이전 때 석탑 2층 옥개석과 3층 옥개석에서 1628년(인조 6년)에 봉안된 금동불상과 보살좌상 등 23구가 수습되었다.
이 불상들은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같은 무더기 발견이 이례적이기도 했거니와, 조선전기 조성된 불상 중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매우 드물었던 까닭인데, 특히 불상들에 새겨진 제작시기와 제작자, 발원자 등의 명문이 당시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높였다.
2차로 발견된 불상들은 그 명문을 통해 광해군에 의해 폐위되었던 인목왕후(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 복권한 후인 1628년에 봉안한 불상들임을 알 수 있는데, 자식인 영창대군을 잃고 유폐생활을 해야 했던 한때 고귀했던 한 여인의 인생유전과, 반정 후 대왕대비가 되어 다시 권력의 정점에 선 파란만장의 일생이 엿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목대비는 이 불상들을 봉안하며 광해군에 의해 비명횡사한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이와 같은 불상들이 장엄됐던 팔각오층석탑은 원래 사찰 입구 동쪽 능선에 있었다. 그러다 1970년 정혜옹주 사리탑 및 삼층석탑과 함께 대웅전 옆으로 옮겨졌는데, 그 과정에서 위의 불상들이 발견됐다. 높이 3.3m로 규모는 작지만 보물창고 같은 탑이었던 것이다. 이 탑은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평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과 같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계보를 잇는 희귀 작품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석탑 중 유일한 팔각다층석탑이다.
까닭에 이 탑은 2013년 보물(제1808호)로 지정되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인목대비가 봉안한 불상들보다 1967년 1차로 발견된 불상들에 관심이 더 간다. 금동석가모니불좌상, 금동지장보살좌상, 금동반가사유보살상 등으로 발견 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되다 지금은 안국동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2007년 개관기념 전시회에서 처음 일반에 공개되었다.
내가 그 출토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금동석가모니불좌상에 새겨진 '시주 명빈 김씨'(施主 明嬪 金氏)라는 명문 때문이다. 명빈 김씨는 태종의 후궁이었던 사람으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구리시에 무덤이 전한다. 하지만 다만 그것뿐 그녀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다. 나는 산책로로 자주 그녀의 무덤 앞 길을 밟으며 그 앞 안내문에 쓰인 내용을 눈에 담는다.
명빈묘는 조선 3대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明嬪 金氏, ?~1479)의 묘이다. 명빈은 김구덕의 딸로 태종 11년(1411)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명빈에 봉해졌다. 자세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성종 10년(1479)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에는 문석인(文石人), 석상(石牀), 묘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후사도 없었던 그 여인은 깊은 불심으로써 외로운 한세상을 견디며 살다 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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