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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은사종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3. 31. 20:27

    * '문무왕의 사천왕사와 감은사'에서 이어짐


    상당한 하이테크놀로지를 요하는 범종의 제작에는 백제의 장인들이 당연히 동원되었을 터, 탑과 종을 비롯한 감은사 건설의 노역은 필시 그들 전쟁 포로들이 담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감은사에 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일 터인데, 따로 종루를 짓지 않은 것을 보면 종은 아마도 회랑이나 중문에 걸렸을 듯싶다.(어쩌면 아래 전돌과 와당이 발견된 곳이 종루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감은사의 종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백제의 영향을 받았을까? 이 궁금한 두 개의 의문을 풀어줄 유물이 지난 1979년에 발굴되었다. 감은사 금당에 매달렸을 법한 높이 27cm의 풍탁(風鐸)으로, 흔히 말하는 풍경(風磬)으로 이해하면 무난하다.



    감은사 풍탁


    풍경의 일례(출처: 만개의 레시피)


    가곡 '성불사의 밤'과 풍경 소리로 유명해진 황해도 황주군 정방산의 성불사.(1909년 촬영)



    풍탁과 범종이 반드시 그 모양이 같으리라는 법은 물론 없다. 사실 유사한 내용을 찾아보려 했지만 국내 외의 책이나 논문 중 이에 관한 것은 없는 듯하였다. 다만 서울대 김원용 교수가 제기한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미륵사 석탑의 풍탁이 신라 및 일본 종의 시원이 되었다는 주장은 깊이 와 닿는데, 그 미륵사지 풍탁을 보기 앞서 일본의 최고(最古) 범종으로 알려진 큐슈 관세음사 종을  보기로 하자. 이 종을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위 감은사 풍탁을 범종과 같은 형식으로 보기에는 그 모양새가 너무 길지 않은가 하는 지적에 대한 반론을 펴기 위함이다. 



    큐슈 관세음사 범종


    큐슈 관세음사 범종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명문으로 밝혀진 교토 묘심사 종(698년)보다 먼저 만들어진 종으로 알려져 있다. 보다시피 그 형태가 매우 길다. 


    관세음사 범종 설명문

    명문상 최고의 종인 교토 묘심사의 종과 형제라고 불릴 만큼 유사한데, 큐슈의 같은 공방에서 제작되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세음사  안내문

    661년 백제 구원을 위해 이곳에 왔다가 아사쿠라다치바나비리이하 궁(후쿠오카현 아사쿠라군)에서 숨진 제명천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천지천황의 발원으로 세워진 절. 실제로 왜는 663년 10월 함선 170척, 2만7천 명의 백제 구원군을 보냈으나 나당연합군과의 백촌강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 


    나카가와 케이지가 그린 '백촌강 전투' 


    '백촌강 전투' 전황도

    5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이 벌어졌던 백촌강 전투의 장소에 대해서는 금강 입구라는 설과 만경강 입구라는 설이 맞서는데, 금강 입구설이 대세다. 굳이 감출 이유가 없는 데도 국내에서 이를 애써 가르치지 않는 이유을 모르겠다.(우리 역사에서 일본에게 도움 받은 일이 있다는 사실이 싫은 걸까? 그 왜의 뿌리는 원래 백제 아닌가?)


    교토 묘심사 범종

    본래 큐슈 정금강원에 걸렸던 종이나 절이 폐사되면서 교토 묘심사로 옮겨졌다. 698년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개져 있다. 이 종 역시 모양새가 긴 편이다. 



    이 관세음사종과 묘심사종은 신라 최고(最古) 종인 상원사종(725년)이나 최대의 종인 봉덕사종(771년)에 앞서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백제의 유민들이 망국 후 건너가 만든 종이기 때문이다. 감은사 풍탁이나 관세음사종의 길이가 긴 것, 그리고 묘심사종에서도 그와 같은 세장함이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당대의 조류이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하지만 일본인은 늘 한반도보다는 중국으로부터의 문화 전래 루트를 희망하고 있는 바, 관세음사종과 묘심사종의 주조법도 중국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상원사종이나 봉덕사종이 보여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정형미 역시 백제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는 바, 그것이 앞서 말한 익산 미륵사 풍탁이다. 알다시피 익산 미륵사는 백제 무왕 2년(601)에 건립된 동양 최대의 사찰로서, 1974년 그 동탑지에서 정말로 기적적으로 풍탁 1점이 발견되었다. 언뜻 보아도 봉덕사종과 매우 유사한 풍탁으로, 매(枚: 鍾乳)가 새겨진 연실(蓮室:乳廓)이나 가운데 당좌(撞座)의 디자인 뿐 아니라 그 모양새마저 봉덕사종을 연상케 하는 유물이다. 



    미륵사 풍탁(높이 15.1, 좌우 8.5, 전후 4.5cm)


    복원된 미륵사 동탑에 매달려진 풍탁 


    미륵사 풍탁과 유사한 봉덕사종



    차제에 말하거니와 나는 저 거대한 봉덕사종이나 황룡사종이 모두 백제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 것으로 믿고 싶은 바, 굳이 그에 관한 증명을 찾자면 다음과 같다. 




    [Daum백과] 황룡사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 13년(754) 황룡사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장 3치이며 두께는 9치고 무게는 49만7581근이며, 시주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 했고 만든 장인은 이상택(里上宅)의 하전(下典)이다(新羅第三十五 景德大王 以天寶十三甲午 鑄皇龍寺鐘 長一丈三寸 厚九寸 入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一斤 施主孝貞伊王三毛夫人 匠人里上宅下典)"


     앞서도 언급한 이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108.5톤의 구리를 가지고 황룡사의 종을 만든 사람은 이상택(신라 35 금입택의 하나)의 하전이다. 여기서 하전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상전의 반대 개념으로 보면 될 터이다. 이처럼 백제의 유민은 망국민의 처지 그대로 기술자라 할지라도 귀족 집안의 하인에 불과한 존재였으니, 이 엄청난 불사를 주도한 사람의 관등과 이름조차 없이 그저 하인으로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그 형편을 알 수 있을 터이다. 


    또 굳이 해석을 달자면 봉덕사종에 얽힌 그 비정한 스토리인즉 종의 주조에 참여했던 백제 장인들의 태업(怠業)의 반영으로 보고 싶다. 그것이 아니고는 이제껏 잘 만들어내던(게다가 그보다 4~5배 더 큰 종도 황룡사 종도 거뜬히 주조했던) 종에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앞서 잠시 언급했거니와 불국사 석가탑, 이른바 무영탑(無影塔)에 관한 전설을 보면 백제의 노동자들은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마저 보장받지 못했던 듯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불국사 삼층석탑 제작에 참여한 아사달이 자신을 찾아온 아사녀를 만나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 다 자살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 하는 스토리는 백제 유민들이 거의 노예 신분이었지 않나 하는 강한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지 않고서야 멀리서 찾아온 부인에게 어찌 면회 한번 허락되지 않았겠는가?  



    불국사 3층 석탑(일명 석가탑, 혹은 무영탑)

    불국사 무영탑의 전설에는 신라의 비인도적인 유민정책이 배어 있다. 




    그렇다고 신라에 종 만드는 기술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리니 "삼국유사" '원종법사 법염촉멸신(原宗興法 厭觸滅身)조'에 '천가(天嘉) 6년(565)에 범종을 사찰에 걸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보다 무려 150년이나 뒤져 불교를 받아들였던 만큼 불교 미술에 관해서는 여러모로 백제보다 뒤졌을 것이라 여겨진다. 즉 백제의 유민들은 신라의 불교 미술을 보다 세련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서설이 길었다. 어서 그 감은사 종을 찾아보자. 일단 말하고 싶은 것은 변형된 지형이다. 아래의 <그림 1>은 현재의 지형이고 <그림2>의 파란 선은 내가 생각하는 신라 시대 문무왕 당시의 대종천과 해안선이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감은사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세월이 흐르며 대종천의 토사가 쌓여 해안선이 밀려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림 1>


     <그림 2>


    따라서 나는 혹자가 주장하는 2000년 초의 사진에 근거한 아래의 <그림 3>과 <그림4>의 주장, 즉 바다로부터 용지(龍池)를 따라 이어지는 수로가 있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그림 3>과 <그림4>의 용지 역시 옛 물길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서울 잠실의 석촌호수가 한강의 옛 물길이었듯) 다만 문화재청의 조사에서 발굴된 아래의 용당(용연)은 당시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 3>


    「문무대왕 유적성역화」の画像検索結果

     <그림 4>


     용연(출처: 문화재청)


     <그림 5> 항공사진으로 파악해본 옛날 해안선(파란 실선과)과 대왕암(붉은 화살표) 


    감은사 건립 후 오랫동안 언덕 아래의 논 자리는 민물과 바닷물이 뒤섞여 출렁였다. 


    용연 앞 위의 파란 실선 안쪽에서 출토된 기와편과 전돌. 바다 인접한 곳에 감은사의 부속 당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전설 따라 삼천리'가 사실이라면 외적들이 빠뜨린 감은사종이 <그림5>의 파란 실선 내에 존재하라 생각되는데, 다만 그 규모가 전설상의 대종이 아닌, 적어도 그보다는 작은 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79년 감은사지에서 풍탁과 함께 발견된 '지정십일년명(至正十一年銘) 금고(金鼓)'에 기록된 명문(銘文) 때문이다. 



     감은사 지정십일년명 금고(국립경주박물관)



    지정 11년, 즉 1351년(고려 충정왕 3년)에 감은사에서 만들어진 이 청동 쇠북에는 제작연대와 장소를 비롯한 총 76자의 글이 새개져 있다. 그중 특히 주목할 것은 '1351년 4월 7일 그 전의 쇠북과 작은 종을 왜적들이 훔쳐가 그해 12월 3일 다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至正十一年辛卯十二月初三日..... 飯子小鐘禁口乙造成爲乎事叱段倭賊人亦同年四月初七日右物之偸取持去爲良在乙造成) 


    억지로 추정을 하자면 몽골군이 가져간 큰 종을 대신해 작은 종을 만들었으나, 그것마저 고려말  왜구들이 훔쳐갔다는 내용일 수는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됐든 종을 빠뜨렸다면 그곳은 위의 장소로 보이는 바, 전설상의 장소에서 동해 앞 바다와 대종천이 혼재하는 이유 역시 그 가능성을 높여주는 예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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