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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덕사종과 황룡사종(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3. 17. 02:45


    봉덕사종은 그렇게 억울한 누명으로서 에밀레종이 되었던 바, 차제에 말이거니와 앞으로는 그 근거없고 이미지도 고약한 에밀레종이란 말은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식 명칭으로 부르려면 성덕대왕 신종이라 하면 되고, 편하게 부르려면 그저 봉덕사종이라고 하면 된다.(반면 '에밀레종의 비밀'의 저자인 성낙주 선생은 에밀레종의 이야기가 "'육화의 순간'을 기다리는, 음습하고 불온한 한 편의 생생한 신화"라고 여전히 강조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그런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신라 종이 있다. 신라의 대찰 황룡사에 걸렸던 황룡사 대종이 그것이다. 대중에게 생소했던 황룡사종이 그나마 알려지게 된 건 아무래도 유홍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덕분이겠지만, 기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종종 입에 오르내리던 종이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서 감은사를 소개하면서 실린 종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35년 몽고군의 3차 칩입은 4년간에 걸쳐 국토를 유린했다. 경주를 불바다로 만들어 황룡사 구층탑을 태워버린 몽고군은 황룡사의 대종이 하도 탐이 나 이것을 원나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대종은 에밀레종보다 4배나 되는 무게(약 100톤)였다. 이 거대한 약탈작전은 바닷길이 아니고서는 운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강에 뗏목을 매어 바닷가로 운반하는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봉길리 바닷가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만 물속에 빠뜨렸다. 대종은 물살에 실려 동해바다 어딘가에 가라앉고 이후 이 내를 대종천이라 부르게 됐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파도가 거센 날이면 바닷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 때부터 요즘까지 종을 찾겠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3D로 재현된 황룡사


    일본 블로그에 소개된 황룡사지


    황룡사지 전경. 황룡사는 총 380,087로 불국사의 8배 규모이다. 가운데가 약 80m의 9층 목탑지이고 입구 오른쪽이 종이 걸렸던 종루 자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던 자리였으나 도중에 '황룡'이 나와 절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황량하기 그지없다.(당간지주는 옆 절 분황사의 것임)



    그 종이 엄청나다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규모 때문일터, '삼국유사'에 전하는 종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新羅第三十五 景德大王 以天寶十三甲午 鑄皇龍寺鐘 長一丈三寸 厚九寸 入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一斤 施主孝貞伊王三毛夫人 匠人里上宅下典…… ” 

     



    [Daum백과] 황룡사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 13년(754) 황룡사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장 3치이며 두께는 9치고 무게는 49만7581근이며, 시주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 했고 만든 장인은 이상택(里上宅)의 하전(下典)이다.....

     

    위 문장의 이상택은 신라 35 금입택(金入宅) 중의 하나인 유력 집안이며, 하전은 그 금입택의 하인이 아니라 집주인 삼모부인이 초빙한 주조 기술자를 말한다.(성낙주 저 '에밀레종의 비밀') 


    그런데 여기서 수치상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삼국유사'에 말하는 종의 길이(높이)는 1장 3치로 미터로 환산하면 약 3.10m이며, 주조에 들어간 구리의 무게는 49만7581 근(108.5톤)이다. 반면 봉덕사종의 높이는 3.75m인데, 주조에 들어간 구리는 12만 근(26톤)으로 1/4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면 황룡사종은 봉덕사종에 비해 재료가 4배 가량 더 들어갔음에도 높이는 오히려 더 낮은 것이다.(삼국시대의 1근은 218g) 


    이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라곤 종의 두께 뿐일 터, 하지만 두께에 있어서도 27cm(황룡사종)와 11~25cm(봉덕사종)로 별 차이가 없다. 봉덕사종의 25cm는 가장 두꺼운 밑부분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10cm 정도씩 줄어드는 형태인데, 이와 같은 체감비는 황룡사종의 주조 때도 마찬가지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봉덕사종 4배의 구리가 사용된 황룡사종은 그 높이도 4배가 되어야 옳다.    


    그렇게 보자면 황룡사종의 높이는 15m로 아파트 5~6층 정도의 높이가 된다. 게다가 100톤이 넘는 무게인데, 이와 같은 엄청난 종을 원나라까지 옮기려 했다는 말은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개연성이 크게 떨어진다. 1975년 봉덕사종을 구 박물관에서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기려 할 때 경주 시내의 교량이 종을 실은 대한통운의 트럭 하중을 감당할 수 없어 먼길을 돌아온 이야기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길게 실려 있기도 하거니와, 그 옛날 그 거대한 종을 끌고 토함산 추령재를 넘어 봉길리 감포 앞바다까지 오는 것만도 사실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오늘날에도 불가능할 것 같다)





    그 첩경이 위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4번 국도로서, 뗏목을 엮는다 해도 대종천이 시작되는 양북면까지는 와야 한다. 설사 어찌 어찌 왔다고 해도 기실 대종천은 실개천 정도에 불과한 하천인 바, 그 큰 종을 띄울 수도 없다.(당시에는 어쨌을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1997년 1차 탐사 후 내린 결론은 '이건 아니다' 였다/ A 지점에서 올라간 옅은 파란 선) 아울러 대종천에 빠뜨린 종이 물살에 실려 감포 앞바다로 들어갔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대종천(출처: 두피디아 백과사전)



    이를 억지로나마 커버하자면, 황룡사에서 고려 숙종(재위 1095~1105) 때 다시 만들었다는 길이 6자 8치의 종을 들 수 있겠으나 사실 이것도 2m가 넘는(2.06m) 크기이므로 절대 만만치는 않다.(숙종 1년 황룡사를 중수하는데, 종을 왜 축소해 새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정도의 종이라면 사실 흔할 수도 있었던 바, 굳이 고생을 하며 가져갔을 성싶지는 않다.


    하지만 대세는 황룡사종을 감포 앞바다까지는 가져 왔다는 것이니, 이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없잖았다. 이에 지난 1982년 11월에는 주민들이 직접 종을 보았다는 제보에 따라 경주박물관에서 6명의 심해잠수부를 고용해 500m 반경의 해역을 탐사하였으나 종을 발견하지 못했고, 이어 1989년에는 문화재관리국이, 1997년에는 해군과 문화재관리국 합동으로, 2013년에는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탐사에 나섰지만 역시 종을 찾지 못했다. 


    나 역시 호사가의 한 사람으로 탐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었으나 결과는 없었는데,(1997~8년)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괜한 헛수고였다. 결론인즉슨 '황룡사 종은 없다'는 것이니 그것을 확신하게 해준 사건이 지난 2005년 강원도 낙산사 대화재였다. 당시 양양 일대의 큰 산불이 낙산사까지 번져 바닷가에 연접한 홍련암을 제외하고는 산사가 거의 불탔고, 그때 높이 158cm의 보물 동종도 용해돼버린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동종이 맥없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1235년 몽고군이 황룡사를 불태울 때 9층 목탑과 더불어 황룡사종도 무사하지 못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몽고군이 종루의 종을 먼저 떼어내고 절을 불살랐을 것 같지는 않기에 종의 소실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황룡사 소실의 이야기가 '아니면 말고' 식의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렇다)

      


    경내 박물관에 보관된 용해된 동종.(사진 왼쪽 위 그림이 원래의 조선 초 동종으로 보물 479호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화마에 싸인 낙산사 동종.(출처: 경향신문)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1352호) 원통보전 안에 모셔진 조선초의 건칠 불상으로 대화재 때 스님들이 대피시켜 화를 면했다. 그래서 한 장 찍었더만 그걸 본 스님이 찍지 말라고 벌컥 화를 내던데 왜 화를 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탐사를 진행하고 있는 분이 계시니 아래 사진의 김기창 씨이다. 잠수 경력 30년이 넘는 베테랑 다이버인 그가 황룡사대종 찾기에 뛰어든 것은 지난 2013년 초, 포항시 양포항 인근 수중 25m의 바닷속에서 선박의 원통형 환기구와 비슷한, 자신의 키보다도 큰 거대한 금속물체를 발견하고서부터였다. 





    [Daum백과] 황룡사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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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사 중인 수중 다이버팀.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기창 씨.(출처: 영남매일)



    당시 그는 이 물체를 자세히 더듬어본 결과 두께 20cm 정도의 원통형 금속물체라는 것을 확인했으나, 물체의 머리쪽 부식이 심하고 이물질이 많이 부착돼 있는 관계로 정확한 식별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김기창 씨는 그 얼마 후 TV에서 황룡사대종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이 본 물체가 문제의 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배 한 척 과 800만원 상당의 수중 카메라까지 구입하여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처음의 좌표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13년,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탐사에 나선 것도 그가 이 같은 사실을 문화재청에 자세히 알린 까닭이었다. 이에 앞서 말한 조사가 한달 간 벌어졌으나 결과는 없었는데, 그는 그럼에도 아직까지 '세기의 발굴'에의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김기창 씨가 말하는 인근 지역 바다는 해류가 급하고 지형의 요철이 심하며 시야 1m의 확보가 어려운 곳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김기창 씨의 탐사 작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황룡사 종의 부재를 확신하는 나의 생각대로라면 그는 그야말로 쓸 데 없는 일을 벌이는 셈일 터인데, 과연 그러할까? 하지만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 그것은 김기창 씨가 본 물체가 황룡사 종이 아닌 감은사종일 수는 있기 때문인 바, 지금 일본 조구신사에 있는 경남 진해 연지사 종처럼(* '봉덕사종과 황룡사종 I' 참조) 왜구들이 감포 해안의 감은사종을 훔쳐가다 빠뜨렸을 가능성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몽고군이 본국으로 가져가려 했던 종이 감은사종일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그 장소는 본인이 생각하는 곳과 매우 다른 바, 3편에서는 내가 짐작하고 있는 감은사종의 위치를 한번 피력해볼까 한다.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kr,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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