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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한 장에서 비롯된 태평천국의 난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5. 2. 07:46
제 1차 중영전쟁, 이른바 1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박살난 일에 대해서는 앞서 '미중 무역전쟁'에서 언급했다. 이에 '잠자는 사자'에서 졸지에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은 이후 세계 열강의 놀이터가 돼버리고 마는데, 그와 같은 청조(淸朝)의 몰락에 일조를 한 것이 이른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으로 그 미증유 내전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로서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하고나서도 청국 조정은 별로 깨우친 것이 없어 보였다. 워낙에 땅덩이가 컸던 청나라였던지라 조그만 홍콩 섬 하나 떼어준 것 쯤은 그저 머리털 하나가 뽑힌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난징조약의 결과로서 광동과 상해를 비롯한 다섯 개 항구가 개방되고, 수출입 관세 협정권, 치외법권 보장,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등의 주요 권한이 영국에 넘어갔지만 그것이 향후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는지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재수없게 똥 밟았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입장은 달랐다. 다섯 개의 무역항이 개항되면서 도시에는 경기 불황이 닥치고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증세를 한 것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편의 보급으로 인한 노동력의 저하였던 바, 이제 막힘없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아편은 빈부를 가릴 것 없이, 또 남녀와 노소를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번져나갔다. 경제의 피폐 또한 말할 수 없이 심각했으니, 차(茶) 수출로 끝없이 들어오던 은(銀)이 이제는 아편을 사기 위해 무더기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전쟁 전 400~500만 명이던 중국의 아편중독자 수는 난징조약 후 그 배가 증가하였다.
아편에 취해 헤롱대는 중국인들
하지만 난국에도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객가(客家, 타향에 이주해 사는 한족을 일컬음) 출신의 광동성 사람 홍수전(흥수취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중농(中農)이던 그는 이 난국을 바로 잡아보고자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는데, 이 또한 부정한 사태 탓이라며 울분을 삼키던 중 우연히 길바닥에 버려진 청교도 출신 아편 무역상들의 기독교 전단지 한 장을 집어들게 되었다.
언필칭 '바른 생활의 사나이들'인 청교도들이 마약 장사를 했다는 것이 언뜻 의아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오른손은 성경, 왼손에는 아편'을 든 영국 청교도들을 찾아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시절이었다. '오른손의 성경'은 제국주의자들이 저 아프리카와 중남미 및 인도, 필리핀 등지에서 습관적으로 해오던 침탈의 수법이었다. 경제 식민지화를 넘어 주님의 은총으로 사상까지 개조시키겠다는 것이 저들의 생각이었다.
홍수전은 이 수법에 제대로 걸려든 케이스였다. 한동안 실의에 잠겨 있던 그는 결국 열병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40여 일 후 깨어난 홍수전은 자신이 어떤 금발 노인에게 계시를 받았다는 헛소리를 해댔다. 그리고는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전단지를 꺼내 봤는데, 거기 그려진 노인이 우연찮게도 자신이 본 환상 속의 사람과 비슷했다. 그는 정말로 어떤 계시를 받은 기분이었다.
이후 홍수전은 중국의 첫 개신교 목사 양발(梁發)이 쓴 기독교 전도서 '권세양언(勸世良言)'을 읽게 됐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신기한 체험을 이해했다. 자신이 환상 속에서 만난 노인은 바로 천부(天父)이자 상제(上帝)인 여호와이며, 곁에 동반했던 중년 남자는 천형(天兄), 즉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자신의 환상을 근거로 스스로를 천부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예수의 뒤를 이어 세상을 구원하라는 명을 받은 구세주로서 세상의 악마를 몰아낼 것을 다짐했다. 1844년 경의 일이었다.
홍수전(1814-1864)의 초상. 그의 초상화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 바, 구전을 통해 그려진 그림이다.
그가 읽은 기독교 입문서 '권세양언'. '세상에 권하는 좋은 말씀'이란 뜻으로 복음서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당시의 것은 아니나 홍수전이 주워든 전단지는 이와 비슷했으리라.
홍수전은 하나님을 모시는 모임, 즉 배상제회(拜上帝會)를 만들어 기독교를 포교하기 시작했다. 객가족 출신의 도시 노동자나 빈농, 광산 노동자 등의 무산자층을 대상으로 포교하던 홍수전은 나아가 일부 소지주까지 교도로 끌어들였다. 배상제회는 당연히 유일신인 상제만을 숭배하였으니 유교, 불교, 도교 등과 관련된 일체의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아편 또한 금지시켰다. 더불어 모세의 계명(誡命)에 입각한 절제되고 금욕적인 생활 태도를 강조했던 바, 초기에는 청조 타도의 정치적 목적보다 종교적 구원이 우선시되는 분위기였다.
홍수전의 포교를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은 같은 객가족 출신의 친구 풍운산(馮雲山)으로, 제법 효웅으로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불어난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며 무산자들을 포섭해나갔다. 아직까지는 처음의 종교적 순수함이 유지되던 시절이었다. 그와 같은 순수함이 통했던 것일까, 교도들이 차츰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광서성 계평현 자형산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긴 이들은 자형산 금전촌(金田村)에 자신들의 배상제회의 본거지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3천 명의 백성을 교도로 끌어들였다.
쪽수가 늘어나자 그들은 슬슬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그때부터는 불당과 사당의 부처상이나 공자상 등을 우상 타파의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부셔댔는데, 관원들도 그들의 쪽수에 감히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교도들이 불어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뭔가 새로운 세력이 탄생하는 것 같은 기운에 백성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금전촌의 교도 수는 금새 2만 명으로 늘었났고, 배상제회가 무기를 제조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홍수전은 1851년 1월 11일, 자신의 38세 생일에 배상제회를 태평천국(太平天國)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3월 23일 스스로 천왕(天王)에 올랐다. 그리고 강구진(江口鎭)을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북정에 나섰던 바, 관촌에서 3만 명의 정부군을 깨부수고 파죽지세로 영안주성(永安州城)을 탈취했다. 영안주성은 지금의 광서성 몽산현으로 태평군이 점령한 최초의 도시였다.(아편 전쟁으로 귀주에 유배됐던 임칙서가 이때 풀려나 진압을 위해 나서지만 오는 도중 병사하고 만다)
봉기가 일어난 곳에 세워진 계평시 금전현의 기념비석
부하들을 치하하는 천왕 홍수전(금전현의 '태평천국 금전봉기 역사진열관' 그림)
광주 화도현 홍수전의 고향에 세워진 동상과 남경 천왕부의 옥좌
처음의 종교적 구원을 지향했던 홍수전의 이데아는 이제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태평천국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바뀌었던 바, 청조와의 건곤일척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홍수전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다는 기독교의 평등사상, 양반과 상놈 구별이 없는 모두가 형제 자매인 사회, 그리고 훗날의 공산주의와 비슷한 토지와 재산의 균등 분배 같은 교조(敎條)로써 적극적으로 백성들을 포섭하였던 바, 태평군의 숫자는 금세 50만 명까지 불어났다.
이후 홍수전과 풍운산은 이들을 이끌고 다니며 세력을 넓혔기 시작했는데,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뒀다. 이는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태평군의 사기가 높았기도 했지만 청나라 군대가 제1차 아편전쟁에서 너무 국력을 소모한 때문이기도 했다. 1853년 3월 19일, 거침없이 북상한 태평군은 남경을 함락시켰고, 홍수전은 그곳을 천경(天京)이라 개명한 후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남경성에서는 팔기군 3만 명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10일간의 공성전 끝에 남경성의 의봉문이 폭파됨으로써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남경으로 진격하는 홍수전
태평군의 진로(금전에서 남경까지의 붉은 선)
태평군이 사용한 화포의 모형
태평조규
홍수전이 영안주성을 점령한 후 반포한 엄격한 군령서이다.
부인부대인 여영(女營).
고향에 남겨질 경우 가족에 대한 보복이 있을 수 있으므로 태평군에서는 부인과 자녀들도 종군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엄격한 태평조규로 인해 남녀가 동거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남녀가 따로 만날 경우 부부나 남매라 할지라도 사형에 처해졌다.
남경성의 서문인 의봉문
명나라 때 지어진 이 문은 태평군의 공격 당시 남경 수비대가 굳게 지켰으나 태평군이 지하에 화약을 묻어 폭파시키며 무너졌다. 남경성은 이후로도 전화를 입어 크게 파괴됐나 1971년 대대적으로 복원됐고 의봉문은 2006년 새로 지어졌다.
의봉문의 원래 모습
남경에 도읍을 정한 홍수전은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를 반포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정치, 경제, 사회생활에 관한 일련의 제도를 새로이 마련했다. 천조전무제도에서 주목할 점은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사회주의식 운영 방법이었다. '논밭이 있으면 같이 갈고, 밥이 있으면 같이 먹고, 옷이 있으면 같이 입고, 돈이 있으면 같이 쓰자'는 것이 그들의 강령이었던 바, 이는 흡사 과거 이스라엘 쿰란 땅에 있었던 엣세네파의 생활 규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물론 홍수전이 엣세네파를 알 리는 없었겠지만, 중국대륙에 사상 초유의 기독교 왕국이 세워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천조전무제도
이어 홍수전은 천조서(天條書)라는 강령을 반포하였다. 요지는 토지의 사유를 금하고 균등하게 분배하며, 모든 생산물을 국가가 관리 분배하고 잉여 생산물은 국고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개인의 축재는 금지됐으며 더불어 노비, 기녀 등을 없애고 매매혼, 축첩, 여성의 발을 죄는 전족 등의 악습도 폐지시켰다. 아울러 화폐도 새로 발행했으며 기존의 과거 제도 또한 폐지되었으니 새로운 과거시험은 홍수전이 만든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등의 기독교 경전에 실린 내용들이 출제되었다.(ㅎㅎ 정말로 신기한 노릇이다)
천조서
홍수전이 저술한 기독교 교리서
홍수전의 옥새
태평천국의 화폐
홍수전의 왕궁이 있던 천왕부 유지
천왕부의 흔적으로 유일한 어화원 석주
당시 지어진 건물은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될 때 불타 없어지고 아랫부분의 돌로 만든 배만 남았다. 사진의 건물은 훗날 복원된 것으로서, 배 난간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당시의 역사를 증언해준다.
홍수전은 중국의 남부를 거의 손아귀에 넣었지만 야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중국 전토를 먹기 위해 북쪽과 서쪽으로 각각 대규모의 군대를 보냈다. 먼저 북벌군은 진강(鎭江), 양주(揚州)를 점령하고 1853년 10월 천진(톈진)을 공격했다. 앞서도 말했듯 천진은 수도 북경의 방어막이나 마찬가지인 도시였던 바, 함풍제의 청조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제 여차하면 나라가 망할 판이었다.(청군은 이때 다행히 북벌군을 물리쳤으나 서정군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런데 즈음하여 증국번(曾國藩)과 이홍장(李洪章) 등이 조직한 민병대의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아울러 애로 호 사건이라는 영국군과 청군이 부딪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 제 2차 중영전쟁이 발발했던 바,(1856년에 시작된 이른바 제 2차 아편전쟁에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함께 쳐들어왔다) 태평천국의 난은 태평군과 청군과 민명대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뒤엉켜 싸우는 전혀 새로운 양상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 '난세의 영웅 이수성(李秀成)'으로 이어짐.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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