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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수께끼 도시 괴베클리 테페(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3. 13. 07:58


    아무튼 내 주장인즉슨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건물들은 신전이 아니라 가옥이며, 그 가옥에는 아래와 같은 형식의 지붕이 설치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현재까지 발견된 20개의 건물들을 모두 종교시설로 치부한다면 발굴이 다 끝난 나중에는 정말로 설 땅이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 감당하기 힘든 숫자도 갯수도 갯수겠거니와 이미 세상들이 '농업보다 종교가 더 먼저 생겨났다'고 떠들 만큼 떠든 후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가옥으로 받아들이면 괴베클리 테페의 수수께끼들은 연관되어 대충 다 풀리게 된다. 예를 들자면 신전만 있고 민가는 없는 이상한 형태의 도시라든가, 종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먼 곳에서 왔다고 했으나 그 먼 곳에서도 민가의 유적을 찾을 수 없었던 곤혹스러움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것이 과연 신전일까? 



    이 돌들을 다듬은 도구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키클롭스 식'이라는 석공시술 양식이다. 과거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미케네와 티린스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에 크게 감탄하여 그것을 신화에 나오는 애꾸눈 거인족 키클롭스들이 만들었다고 여겼던 바, 지금도 바위를 깎아 돌을 만들어 조립하는 기술 양식을 '키클롭스 식'이라고 부른다. 이 '키클롭스 식' 건축 양식은 미케네 문명 뿐 아니라 이집트 문명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절정이 저 유명한 기자의 피라미드이다. 


    내 이야기의 요점은 미케네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이 모두 청동기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놀랍게도 20세기 초까지 세계 최대의 건축물이었던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도 무른 청동기로 깨고 깎고 다듬은 것이다) 따라서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괴베클리 테베의 청동기 문화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는 앞서 여러 장의 사진으로 강조한 귀여운 개들의 조각, 거석 기둥의 소켓 맞춤, 기타 아래와 같은 환(環) 등을 설명할 수가 없다




    우르파 박물관으로 옮겨진 발굴 유물 


    43번 대머리독수리 석주 옆의 구멍난 돌



    거석들에 새겨진 조각이 신격화된 동물의 형상이라는 클라우드 슈미트의 주장도 수긍하기 힘들다. 그러면서 그는 이곳에 신전이 만들어진 이유가 수렵의 성공을 위한 종교적 기원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이같은 조각은 신석기 · 청동기 시대의 유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만일 슈미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신석기 · 청동기 시대의 모든 동물 암각화는 토템이 되는 바, 예를 들어 말하자면 우리나라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제작한 선사시대 사람들은 고래를 신으로 모신 사람들이다. 




    세계 최초의 고래 기록물인 경북 울주군의 반구대 암각화 (사진 출처: 경상일보) 


    그런 신적 존재를 사냥해 잡아 먹는 당시 사람들(반구대 암각화의 부분) 



    쾨베클리 테페의 여러 동물 암각화



    또 그것을 천체의 별자리와 연관시키는 아래와 같은 주장도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아울러 거기 새겨진 문양들을 문자로 이해하려는 시도 역시 노력은 가상하나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괴베클리 테베의 암각화를 천체와 연관 지으려는 시도들






    괴베클리 테베의 암각화를 문자와 연관 지으려는 시도들



    그리고 지금의 발굴단장인 치그뎀 괵살 교수가 발굴 유골들과 함께 내놓은 새로운 주장, 즉 괴베클리 테페인들의 신체 훼손을 두개골 숭배나 시체 숭배와 같은 원시 종교의 형태로 몰아가려는 시도 역시 수용하기 힘들다. 이것은 모두 앞서 정립된 앤드류 콜린스나 클라우드 슈미트의 이론에 꿰맞추기 위함으로, 이런 식의 해석은 괴베클리 테페를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겨 놓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아래 유골들의 훼손 흔적은 괵살 교수가 주장하는 유해(遺骸)에 가한 종교 의식의 흔적이 아니라 단순한 가학이다. 당연히 그 가학은 전쟁에서 기인되었을 터, 신석기 시대부터 무려 4천 년 이상을 그곳에서 생활해온 사람들은 여타의 이유로서 타 지역으로부터 이동해온 새로운 종족들에 밀려 오랫동안 살아 온 그 '배불뚝이 언덕'을 포기하고 떠난 듯 보인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 괴베클리 테페의 건축물들에서는 자연적 매몰이 아닌  뚜렷한 인위적 매립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 사람들은 7천5백년 전 무렵 그렇게 조용히 '배불뚝이 언덕'을 묻고 떠났갔는데, 그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재도구인 청동기들을 모두 가져갔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곳에서 청동기의 유물이 발견되길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무척 혼란스러워지겠지만 그것이 외계인의 흔적이 아니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옳다.


    꼭 이민족의 침입이 아니더라도 4천 년을 살아오는 동안 생겨났을 기후의 변화 같은 것도 염두에 둘 수 있다. 7천 년 전 터키 아르메니아 남부와 북 아라크 자그로스 산록 일대에 살던 원주민들이 남으로 이동하게 된 이유가 '기후의 변화와 인구의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 때문이었듯(* '수메르, 그 문명의 새벽을 돌아보다/고대의 민족 대이동' 참조) 괴베클리 테페의 사람들도 그렇게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일대의 탄소 연대 측정 결과로서, 괴베클리 테페에서 가장 최초로 사막화가 이루어진 지층이 7천5백년 전의 것이다. 환경의 파괴와 그로 인한 자원의 고갈로서 떠나게 된 이스터 섬의 주민과는 좀 다른 경우지만, 그곳 라파누이 사람들이 남겨놓은 거대한 모아이들이 떠올려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이스터 섬의 위치



    최근 외신 보도에 의하면(2017년 9월) 이라크 북부 하산케이프(Hasankeyf)에서 괴베클리 테페와 거의 동시대인 11,500년 전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거대한 석주들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뚜렷한 인간의 거주 유적과 매장지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발굴에는 츠쿠바 대학 등 일본 고고학계도 참여했는데, 발굴단장인 메블뤼트 엘리위쉬크 교수(바트만 대학교)는 "하산케이프 주거지는 약 1천년간 유지됐다"면서 "발굴단은 주민들이 이곳을 버리고 떠난 이유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괴베클리 테페를 꼭 특별하게만 볼 수 없다는 방증이다.(애석하게도 이 유적지는 티그리스 강의 상류에 건설 중인 일리수 댐으로 인해 머잖아 수몰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산케이프 유적을 조사하는 츠쿠마 대학 서아시아 문명 연구센터 발굴단(돈의 위력이 그저 부러울 뿐--;;)


    하산케이프 유적지



    오히려 더 오래 돼 보이는 인근의 바트만 유적지(아직 발굴 결과가 안 나왔다)


    하산케이프 유적지에서 보이는 티그리스 강


    건설 중인 일리수 댐


    댐 건설에 반대하는 하산케이프 주민들


    당연히 이라크도 반대한다


    하산케이프의 위치와 일리수 댐


    * '재미로 본 괴베클리 테페'로 이어짐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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