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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수께끼 도시 괴베클리 테페(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3. 12. 00:00






    먼저 사진 두 장 게재하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이 사진은 터키 동남방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 유적의 모습이다. 단지 사진으로도 뭔가 엄청난 유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곳의 건립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으로 앞서 말한 이집트 피라미드 건립 연대를 적어도 7,000년 이상 상회한다. 아울러 아래의 설명처럼 저 유명한 스톤헨지를 근대 건축물로 보이게도 만드는 바, '살아 있는 초고대문명', '리얼 SF' 등의 특별한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이 장소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지난 1995년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작년 2017년의 발표에 의하면 최근 발견된 유물들 중에는 14,000년 전인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Epoch, 홍적세) 말기 것도 있다고 하며, 지층의 레이저 탐사 결과로는 15,000년 이전의 것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 시기는 우리 인류문명이 시작되기 1만년 전으로, 지질학적으로 말하는 플라이스토세는 멸종된 매머드(mammoth)가 살던 시기이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 유적지는 '옛날 옛적', 'long long ago'로 표현되는 시절에 지어진 것이라 보면 되는데, 덧붙이자면 그 시기가 빙하기 이전이다. 경악스럽지만 세상에는 이 같은 인류 문명 유적지도 존재한다.   







    한마디로 괴베클리 테페는 인류가 만든 세계 최고(最古)의 유적인데, 말한 바대로 그 건립 연대는 우리를 당황시킨다. 신석기 시대(매머드를 사냥하던 시절?)에 그와 같은 거대 유적지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그러하거니와, 그것이 신전과 같은 종교 시설이라는 가정은 더욱 놀랍다. 그럴 경우 이 유적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농경 → 정착 → 종교의 탄생 → 도시의 생성'이라고 인류 문명화의 코스를 일거에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농업 이전에 종교가 탄생했다'는 새로운 이론이 개진되기도 하였던 바, 괴베클리 테페 유적이 가져다 준 사회적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잠작하게 해준다. 지금은 많이 희석됐지만 4년 전 처음 괴베클리 테페의 자료를 접했는 때는 나 역시 얼마나 놀랬든지..... 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해 본 결과 그것은 종교 시설이 아니었고, 단지 시대가 오래되었을 뿐 '우리 인류가 걸어온 그리 특별하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깨달음을 공유하고자  하는 바, 먼저 그 위치부터 천천히 살펴보기로 하자.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을 뜻하는 괴베클리 테페는 보다시피 시리아와의 국경 근처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는데, 까닭에 이곳에 대한 '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국가는 아르메니아이다. 지금 터키 공화국 내에서는 그 시발을 힛타이트 제국에서 찾으려는 국수적 노력이 엿보이나, 뿌리는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 계로 국호인 터키(Turky) 자체가 돌궐(족)에서 비롯되었다.(* '아시아의 기독교 왕국 요한의 실체' 참조) 반면 아르메니아는 당시 이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바, 그들이 주장하는 '지적 소유권'은 딴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수메르, 그 문명의 새벽을 돌아보다' 참조) 하지만 이 문제는 뒤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우선은 이 '배불뚝이 언덕'에 집중해보자. 


    이곳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3년 도굴꾼들에 의해서였다. 이후 얼마간 이곳은 일대에서 나온 T자형 거석들로 인해 중세시대의 묘지로 오인되었으나, 1995년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드 슈미트가 이끄는 독일 발굴팀이 투입된 이후 선사시대의 종교유적지로 밝혀졌다. 이곳이 종교유적지로 여겨지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일대에서 주거시설이 발견되지 않은 까닭이다. 이에 발굴팀은 향후 주거시설에의 발굴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나, 나의 생각은 크게 다르다. 그들이 생각하는 종교유적지는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단순한(?) 주거시설일 뿐이며, 앞으로도 그같은 주거시설만이 계속 발굴될 것으로 여겨진다.(괴베클리 테페는 축구장 12개 넓이에 해당하는 9만 스퀘어미터로 지금까지 발굴된 면적은 채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괴베클리 테베의 원경과 안내판(비교적 최근 사진이다)




    괴베클리 테베가 공동묘지로 오인된 이유


    현장의 부감



     

    이상은 발굴 중인 현장


    일부는 벌써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적지는 최대 6m의 T자형 돌들이 20~30m의 원형 중앙에 2개, 그리고 벽체의 기둥돌처럼 박혀 있는 형식으로, 그 기둥돌 사이의 벽체는 잔돌들로 쌓아올렸다. 현재까지 이와 같은 입석은 약 200개가 발견되었으며 그 무게는 5~20톤 정도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이 원형 건물의 갯수는 20개인데, 이와 같은 건물들을 세운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돌을 다듬을 수 있는 연장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스테리이다. 때는 신석기 시대인 바, 당시의 간석기로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기둥들은 모두 기반암을 쪼아 만든 소켓에 맞물려 있는 바, 그 기반암을 간석기로 쪼아 팠다는 사실은 더욱 믿기지가 않는다



     부감


     평면도

     

     

     여기도 그 배열을 천체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어디를 가나 이런 사람들은 꼭 있다)


     



    아무튼 이런 형식인데, 그런데 나는 이것을 신전으로 보는 사람들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 벽 기둥을 세우고 중앙에 지붕을 받칠 수 있는 두 개의 기둥을 세운 형태는 한 눈으로 보아도 전형적인 집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중앙 기둥 위에 대들보를 얹고, 벽 기둥 위에는 창방을 가로질렀을 것이며 들보와 연결되는 서까래를 창방에 내렸을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나무들을 이용해서 말이다. 지붕은 당연히 이엉을 엮어 억새와 같은 풀이나 나뭇가지 등을 덮었을 것이다. 이해가 어렵다면 몽골의 파오를 예로 들어보자.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둥근 집 형태인 파오의 내부에는 천정의 둥근 들보를 지지하는 T자형의 기둥이 2개 서고, 그 들보로부터 서까래들이 파생된다. 몽골 사람들은 유목민족이므로 이동이 자유로운 천막의 집을 지었던 것이고, 정착 생활을 했던 위 괴베클리 테베 사람들은 보다 튼튼한 돌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 하나의 가옥에는 적어도 서너 가구가 공동 생활을 했을 것 같은데, 그 같은 집에 대한 표준설계도나 건축 지침 따위가 존재하지는 않았을 터, 구성원의 의향에 따라 추위와 외부의 공격에 대비한 이중의 벽체를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만일 이것이 종교시설이라면 좀 더 거대하게, 그리고 하나만 지었어야 옳다. 그것이 종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무엇보다 상식적으로 타당하다) 









    연장에 대해서 다시 말하자면, 특히 T자형 돌에 새긴 아래의 환조 조각상, 그리고 수조나 돌확과 같은 것들을 신석기 시대의 간석기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데, 더욱 미스테리한 것은 이제껏 유물들 중에서 청동기나 철기 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발견된다면 지구상의 모든 역사교과서는 당연히 다 새로 써져야 할 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거론해보자. 




    위 사진을 90도 회전시킨 건데 dog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귀엽당.


    또 다른 개 같은 넘. 


    얘는 더 귀여워. 꼭 웃고 있는 것 같애.


    암튼 이런 걸 간석기로 만들었다고? 그리고 이런 생활용품이 종교시설 안에 있었다고?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아래의 앤드류 콜린 박사와 발굴단장 클라우드 슈미트 교수 등이다. 애초부터 괴베클리 테페를 종교시설로 인식한 탓에 그 생각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다. 발굴단장이었던 클라우드 슈미트는 지난 2014년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데, 그 뒤를 이어 발굴단장이 된 아내인 치그뎀 괵살(Çiğdem Köksal) 교수도 발견된 건축물을 종교시설로 보는 시각 및 아래의 유물들이 간석기로 만들어졌다는 시각에는 변함없는 것 같은 바, 나로서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괵살 교수와 남편인 슈미트 단장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들어 위의 기조가 조금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니, 결정적으로는 작년 2017년의 발굴에서 재배된 밀의 종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그간 괴베클리 테페는 수렵 채집인들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여겨졌다. 유적에서 발굴되는 다량의 야생동물 뼈들이 가축을 기르거나 농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간주된 까닭이다) 그리하여 그동안의 '수렵 채취 사회설'이 후퇴하게 된 것인데, 나는 그들의 주장이 곧 '농경 사회설'로 바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위 사진에서 돌확이 보이는데 수렵 채취 사회였다고?) 


    그 밀의 종자에 대한 DNA 조사 결과 야생 밀이 아닌 재배 종임이 밝혀졌지만 아직까지 탄소연대 측정에 관한 소식은 없다. 만일 그 결과도 밝혀진다면 그동안 제기됐던 '농경 사회 이전의 종교 탄생설'과 위 유적들이 종교 시설물이라는 주장은 자연 철회될 것이며, 아울러 세상의 관련 책들도 모두 새로 써지게 될 것이다.(앞서 '스핑크스의 진실'에서 밝혔듯 인류의 초기 농업의 상한선은 기원전 7000년이므로 괴베클리 테페의 유물 하한선인 기원전 7500년과 상충되는데, 그 500년 정도야 아직까지는 버틸만 하리라


    * '수수께끼 도시 괴베클리 테페(II)'로 이어짐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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