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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그 문명의 새벽을 돌아보다(고대의 민족 대이동)성서와 UFO 2017. 12. 31. 23:59
그렇다면 이들의 도시국가 에녹은 과연 실재했을까? 그리고 실재했다면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성서의 내용으로서 에녹시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그곳이 에덴의 동쪽이며, 도시국가이며, 방목에서 벗어난 목축이 행하여졌으며, 일찍이 청동기를 사용하였고, 그에 걸맞은 문화생활을 누렸다는 것 등이다. 그렇게 볼 때 에녹은 에덴의 경우와 같이 구체적 지명을 동반하지 않았음에도 에덴보다도 오히려 많은 흔적을 남겼다 할 수 있겠다. 본인은 이미 터키 동남부 아르메니아 고원의 산록 일원(지금의 이란 공화국 우르미아 호수의 서쪽)을 에덴이라 비정한 바 있다.
에덴의 위치
에덴의 위치
그런데 그곳의 동쪽에 아르메니아 공화국이 있다. 아르메니아는 구소련에 속해 있다 1991년 독립한 소국(국토면적은 남한의 1/3)인 바, 언뜻 신생국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실로 유서 깊은 땅에 자리한 장구한 역사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큼 인류사에 남긴 커다란 족적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인류 최초로 밀이 재배된 곳이라는 점이다. 고대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미 1만년 전에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목축과 경작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유적이 쉬레크 지방 아라랏스키 계곡에서 신석기 시대의 취락 유적과 함께 발견된 바 있다.
아르메니아의 어제와 오늘
아르메니아의 어제와 오늘
7500년 전의 농사 암각화
함께 발견된 일부 관련 암각화는 기원전 12세기까지 올라간다.
당대의 집단 생활 유적
또한 아르메니아는 인류의 야금술이 시작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수도 예례반에 인접한 생가비트 지역과 메사모르 지역에서는 기원전 5천 년 경의 청동기 주물 공장이 동시대의 요새, 제단, 주거지 등과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3000년 경에 시작된 에게 해(海)의 청동문명을 무려 2천 년이나 상회하는 연도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신비스럽게도 이곳에는 현지 사람들이 마시스 산이라 부르는 아라랏 산이 그야말로 영산(靈山)으로 자리하고 있다. 노아의 방주가 안착했다는 바로 그 산이다.
메사모르의 제련소 유적
금, 구리, 철, 망간, 아연, 수은 등의 성분이 추출되었으며 거대한 지하 구덩이는 수은과 같은 비철금속의 저장고로 추정된다.
수도 예레반에서 보이는 아라랏 산
더불어 아르메니아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2천 년 경의 철기 또한 힛타이트 제국의 그것을 앞지르는 것으로 밝혀진 바, ‘최초의 철기 사용 민족은 지금껏 알려진 힛타이트가 아닌 고대 아르메니아의 부족’이라는 학계의 공식적인 인정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기원전 2천 년 경의 철제 마차
세반 호수 근방의 르차르첸에서 모두 12개가 발굴되었는데, 함께 발굴된 2륜 전차와 함께 아르메니아 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마차는 스튜어트 피고트(Stuart Piggott) 교수의 고전 서적인 '가장 빠른 바퀴라는 운송 수단(The Earliest Wheeled Transport)'이라는 책에 긴급 수록되기도 하였다.
더불어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선진 문명과 함께 하였을 그들의 문화생활로서, 이를 증명할만한 유물이 지난 2010년에 출현하였다. 미국 UCLA 대학과 아일랜드 대학의 공동발굴팀이 아르메니아의 한 동굴에서 고대의 와인 생산설비와 함께 온전한 형태의 가죽 신발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온전함과 현대식 모양새에 발굴팀마저 오래돼야 수백 년 정도일 것이라 착각하였을 정도였는데, 이것이 5500년 전의 유물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이를 보도한 뉴욕타임즈로부터 ‘선사시대의 프라다(Prehistoric Prada)’라는 극찬을 받기도 한 신발이었다.
영국 오스포드(Osford) 방사선 탄소 실험실의 3가지 테스트에서 모두 동일한 연도를 산출하였는데, 현대의 모카 신발과도 유사하다.
발견 장소와 당시의 모습
아르메니아 남부 동굴에서 발견된 6100년 전의 와인 생산시설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제조공장이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포도 재배의 발상지로 간주되고 있는데, 노아 할아버지가 마시고 뻗은 것도 이 같은 와인이었다.(창세기 9:21)
발굴 과정 사진
기타 아르메니아 각 지방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것들은 다음과 같다.
7500년 전의 천문대(추정)
스톤헨지처럼 동심원 열주(列柱)가 세워져 있어 아르메니아의 스톤헨지라는 뜻의 카러헨지(혹은 Zorats Karer) 불리나 영국의 스톤헨지 보다 무려 4400년이나 오래됐다. 구멍 뚫린 돌을 통해 보면 고니 자리의 가장 밝은 별인 드네브(Deneb)에 맞춰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의 뇌
6000년 전의 것으로 아르파 강 부근의 동굴에서 모두 3개가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뇌보다 1000~1200년 앞섰다고 보고되었는데, 동굴의 습기와 통풍 구조가 붉은 색과 흰색의 혈액세포를 보존시킬 수 있었다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물(織物)
지난 2010년 아르메니아 남부 아레니 제 1 동굴에서 발견된 고대의 치마 조각으로 갈대로 엮어졌다. 방사선 검사 결과 5900년 전의 직물로 밝혀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터
아르메니아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무려 32만 5천 년 전의 부싯돌이다. 두 개의 특별한 돌이 만나야 화력이 극대화되는 이른바 Levallois 구조를 취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 말 굴레
4500년 전의 것으로 청동기 시대 기병대의 존재를 증언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에치미아진 성당
교회라 불러야 할지 성당으로 불러야 할지 애매하지만 아무튼 세계에서 가장 가장 오래된 크리스트교 예배시설이다. 수도 예레반 서쪽 18km 지점에 있으며,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아르메니아가 301~303년경 건립했다.
아라랏 산을 배경으로 한 즈바르트노츠 유적
예레반 서쪽 15km 지점에 있는 교회 유적으로 643~652년경 건립되었으나 930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아르메니아는 중동 지방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서기 1세기) 나는 무엇보다 이 사실이 신기한데, 위의 두 건물은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2000년) 등재 이유는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정신과 혁신적인 예술적 성취도를 이룩한 건물이라는 것으로, 특히 에치미아진 교회는 세계 최초의 교회 건물이라는 점이, 아래의 즈바르트노츠 유적은 주변 교회 건축 양식의 규범이 되었다는 점이 중요시되었다.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건물은 지금 이스라엘의 국기인 이른바 '다윗의 별'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즈바르트노츠 유적 복원도
건물의 기단은 원형에 가까운 32각 형태이며, 첨탑은 6각의 '다윗의 별' 형태이다.
이와 같은 환상열주식(環狀列柱式) 구조는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모두가 즈바르트노츠 유적의 형태를 따랐다. 바닥은 환형(環形)이나 꼭대기는 '다윗의 별'을 지향한다.
'다윗의 별' 형태의 아르메니아 교회 천장 양식
아르메니아의 고대 건축물에서는 사실 이 같은 '다윗의 별' 문양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별은 이후 로마와 비잔틴 시대를 거쳐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과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의 단골 문양이 되었다가,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 건국 이후 나라의 국기 '다윗의 별'로 자리 잡았다. 지금의 '다윗의 별'의 유래가 실은 아르메니아였던 것이다.
그 별은 다름아닌 다윗이 태어난 곳이자 예수가 태어난 곳에 떴던 '움직이는 별', 즉 UFO였음은 이미 앞선 쳅터인 '예수의 탄생 때 출현한 베들레헴 상공의 UFO'에서 그 설명을 마친 바 있다. 예수의 탄생 이전, 즉 B.C. 시대에는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다윗의 별'이 A.D. 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게 각광을 받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앞서 말했던대로 베들레헴 예수 탄생지에 표시된 별은 당시 출현했던 그 상서로운 별 UFO를 형상화한 것이다.
구약성서 창세기를 보면 그곳 아르메니아에 살던 카인의 후예들은 7대 손 라멕을 끝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그와 달리 셋(Set: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의 후예들은 노아와 셈으로 이어지며 이후의 족보가 지속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후 인구가 불어남에 따라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니, 그 과정이 창세기 10장에 소개되어 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다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이 같은 인구의 이동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것으로서 아르메니아 에녹 왕국의 사람들도 이 무렵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고학적으로는 아르메니아 고원 일대의 원주민들이 남으로 이동하게 된 이유가 '기후의 변화와 인구의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 때문'이라 설명되어지는데, 아무튼 이 같은 선진 인류의 민족 대이동은 성서의 시날 땅, 즉 메소포타미아 평원에 이르러 수메르 문명이라고 하는 기록상의 인류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키게 된다.(☞ '대홍수와 노아에 관한 진실 III' )
이 지방에 정착한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풍부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을 경작하였다. 그 안정된 생산 위에서 그들은 가지고 내려온 선진기술을 이용하여 앞서 말한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키는데, 농경, 관개(灌漑), 법률, 건축, 음악, 수학, 문학, 제련술, 천문학 등 실로 미치는 않은 분야가 없었다.(후세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어느 날 갑자기 도깨비처럼 출현한 '완벽한 거짓말' 같은 문명이었다)
그중에서도 수메르어에서는 운하, 제방, 관개, 저수지 등 치수(治水)에 관련된 단어가 많이 발견된다. 즉 수메르인들은 북부지방에서 이미 충분한 농업 기술을 습득하고 내려온 자들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북부 문화와의 연속성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바이드 토기와 북부 사마라 유적 토기와의 유사성으로도 증명된다.(☞ '신의 문' 바벨을 찾아서 II )
그리고 그들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원주민들과 함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 하였지만 워낙에 말이 달라 소통의 곤란을 겪게 된다. 말한바 대로 셈족은 영어와 같은 형식의 굴절어를 사용하였고 수메르인은 우리나라 말과 같은 교착어를 사용하였는데, 우리가 영어를 익히기 힘들고 저들도 우리 한국어를 익히기 어렵듯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두 언어 사이의 거리는 상당하다. 창세기의 내용(창세기 11:9)을 좇자면 이것이 결국 사람들이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된 요인이었다.(☞ '바벨탑과 언어혼란의 진실')
그래서 결국 굴절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교착어를 쓰는 사람은 또 그들대로 도시를 형성하게 되나, 같은 교착어를 사용하는 민족끼리라도 각기 바닷가 땅에 머물게 되는 이유는 역시 창세기의 내용 그대로 그들 또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가 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같은 교착어인 한국어와 일본어가 다르듯 그들 역시 각각의 언어가 달랐던 것이었다.(혹은 굴절어를 사용라는 셈족들이 수메르인의 민족 대이동에 묻어 내려왔을 수도 있다) 이들이 만든 대표적인 도시국가가 우르, 우루크, 키시, 라가시, 에리두, 니푸르, 움마 등이다.
이렇듯 그들은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흩어져 각기 다른 도시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 시날 땅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였으니 이른바 수메르 문명의 탄생이었다. 훗날 게르만 땅의 족속들은 민족 대이동으로써 로마를 파괴했지만,(특히 반달족 같은 종족들은) 수메르인들은 오히려 시날 땅에 와서 현지인들에게 선진기술을 전수해줬고 또한 자신들도 정착하여 각각 나름대로의 문명을 발전시켰던 것이다.(그중 가장 빛나는 업적은 메소포타미아는 물론이요, 멀리 이집트까지 운송 헉명을 일으킨 '바퀴'와 우루크에서 창출된 '길가메시 서사시'가 될 것이다)
수메르인의 민족대이동
~외계 문명의 간접 영향을 주장하는 본인과 달리 제카리아 시친이나 야지마 히데오(矢島輝夫)는 위 에리두(Eridu)를 외계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도시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유대계 미국인으로 중동언어학을 연구하는 제카리아 시친은 에리두를 설명하기를, 에리두는 수메르어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이며, 지구를 의미하는 영어의 EARTH나 독일어의 ERDE 등의 어원이 바로 이 에리두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 외계인의 흔적은 빙하기 말기에 용해되어 발생한 세계적인 대홍수에 휩쓸려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당연히 공감과는 거리가 있다.
~외계 문명의 간접 영향을 주장하는 본인과 달리 제카리아 시친이나 야지마 히데오는 위 에리두(ERIDU)를 외계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도시라고 주장한다. 특히 야지마 히데오는 자신의 저서 ‘초문명(超文明 ⁃ SUPER CIVILIZATIONS)'에서 에리두는 수메르어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이며, 지구를 의미하는 영어의 EARTH나 독일어의 ERDE 등의 어원이 바로 이 에리두에서 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들 외계인의 흔적은 빙하기 말기에 용해되어 발생한 세계적인 대홍수에 휩쓸려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당연히 공감과는 거리가 있다.
출처: https://kibaek.tistory.com/78 [아하스페르츠의 단상]외계 문명의 간접 영향을 주장하는 본인과 달리 제카리아 시친이나 야지마 히데오는 위 에리두(ERIDU)를 외계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도시라고 주장한다. 특히 야지마 히데오는 자신의 저서 ‘초문명(超文明 ⁃ SUPER CIVILIZATIONS)'에서 에리두는 수메르어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이며, 지구를 의미하는 영어의 EARTH나 독일어의 ERDE 등의 어원이 바로 이 에리두에서 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들 외계인의 흔적은 빙하기 말기에 용해되어 발생한 세계적인 대홍수에 휩쓸려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당연히 공감과는 거리가 있다.
출처: https://kibaek.tistory.com/78 [아하스페르츠의 단상]수메르 문명은 그간 학자들의 연구결과로써 그 상한이 과거의 BC 4000년 경에서 BC 7000∼6000년 경으로 상향되었고, 위치 또한 상향되어 터키 아르메니아 남부로부터 북 이라크 자그로스 산록 일대에 정주해 살며 농경과 목축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이룩한 후기 신석기 문화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효시로 보고 있다. 즉 자르모(Jarmo), 하수나(Hassuna), 사마라(Samarra) 일대의 사람들로서, 그중 가장 큰 집단인 북 이라크 사마라를 대표로 들어 사마라 문화라 부르기도 한다.
위 지도의 화살표는 후기 사마라 문화의 주인공들의 이주를 그린 것인데, 정확히 어떤 언어를 썼는지 알 수 없는 그들이 BC 6000년경 그곳을 떠나 BC 5850년 메소포타미아의 에리두에 정착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아가 딜문(Dilmun, 흔히 천국으로 해석되는 고대 지명으로 바레인으로 추정함)을 통해 남쪽의 국가와도 교역했음을 도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주한 곳을 수메르에 국한 시키지 않고 북쪽의 악카드, 그리고 동쪽의 엘람 땅까지 확대했던 바, 그간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달한 촌락문화, 즉 하라프 문화를 (여기서는 도시문화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다) 메소포타미아 각지에 전파시켰다. 아름다운 채문토기(彩文土器)가 만들어지고 금속인 구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특히 그들의 집단 거주지인 에리두 일대에서 활발하였던 바, 통칭하여 에리두 문화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다음의 금석(金石) 병용 문화는 우바이드 문화(BC 5900~4000)와 우루크 문화(BC 4000~3100)로 보인다. 우바이드 문화기에 인류의 정착지는 점차 팽창 발전하였고, 구리 제련술 또한 발달하여 분포 범위도 수메르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확대되었다. 우바이드와 우르크 문화는 수메르 문명의 성립기로서 BC 3300년 경에는 그림문자(설형문자의 초기 형태)가 사용되었으며 본격적인 도시국가가 탄생하였다.
가장 오래된 문자
기원전 3300년 전의 것으로 쐐기문자의 원형(原形)으로 추정된다. 1928년 우루크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이다.(루브르 박물관)
우바이드 문화라는 명칭은 1920년 경 영국의 홀(H.R. Hall)과 레너드 울리가 우르 서쪽 '텔 엘 우바이드'에서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견하며 붙여진 것으로, 이때 발견한 것들은 우바이드 기(期)의 표준 유물과 유적이 되었다.(*레너드 울리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이 만난 UFO와 가나안 이주의 진실 (I)'과 '대홍수와 노아에 관한 진실 (III)'을 참조 바람)
우바이드 문화의 유물
우바이드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일어난 수메르 문명의 토대가 토대가 되었다.
우바이드 시대 유물 중 가장 유명한 토기
우루크는 1913년부터 20년 간 독일 오리엔트 학회의 무려 15번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이 있었는데, 수메르의 역사가 BC 4000년까지 끌어올려진 것도 그들 노력의 산물이었다. 우루크 문화의 가장 위대한 걸작은 단연 저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대홍수와 노아에 관한 진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주인공인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가 구도(求道)와 영생의 길을 찾는 과정에서의 일련의 사건들을 서술한 수메르 문학의 최고봉으로서, 여기에는 북쪽 사마라 사람에게 전승돼 온 고유의 전설, 이를테면 천지창조와 거인족과 대홍수의 전설 같은 것이 고스란이 배어 있다(내가 수메르 문명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으로, 이를 이해하게 되면 구약성서 창세기의 신화적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역사로 편입되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인류의 초기 역사에 과도하게 간섭한 외계인들을 인정해야 된다는 부담이 따르지만)
수메르 문명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농경, 관개, 법률, 건축, 음악, 수학, 문학, 제련술, 천문학 등 모든 분야에 미쳤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것은 그들이 이때 이룬 인권의 신장으로서, 인류 최초의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에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에 관한 개념이 명문화돼 있고 빈민자, 과부, 고아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조항까지 등장한다. 더욱 놀랍게도 그들의 사회 규약에는 상인들의 독과점 방지 조항이 있었으며 송사(訟事)에 있어서는 법관 외에 배심원들이 판결에 참여했다.
당시의 집과 도시 상상도
그러나 이들 문명은 BC 2350년 북쪽 악카드 왕국의 사르곤 왕이 남침을 개시하며 무너지게 된다. 사르곤은 56년의 치세 동안 북쪽 악카드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였는데, 특히 4대 왕 나림신에 이르러서는 동쪽의 엘람까지 넘어가면서 오리엔트의 모든 지역이 악카드 제국에 편입되게 된다. 나림신은 악카드의 신(神), 사계(四界)의 왕으로 불려졌던 바, 왕이 신격화된 최초의 사례였다.
사르곤의 흉상과 나람신 전승비
이후 수메르인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한때는 그것이 미스테리로까지 여겨졌지만(그리하여 그들이 이주하여 대륙의 끝인 우리나라로 왔다는 주장까지 생겼났지만), 발흥하는 여러 북방 민족들에 흡수 통합되어 사라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인류의 새벽을 열며 당당히 세상에 나왔던 그들로서는 한없이 쓸쓸한 퇴장이었다.
* 그림과 사진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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